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330)화 (329/1,192)

제330화

“형님, 부황께서 백성은 늘 군주의 하늘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의 동월국을 보십시오. 분열이 일어나니 백성들이 사지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수성의 화재로 얼마나 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이대로 북진을 밀어붙인다면 수많은 성이 수성의 전철을 밟을 겁니다.”

“…하여.”

태자가 책상 위에 놓인 규정을 가리켰다.

“다른 이에게 규정을 만들게 하고 내게 보냈구나.”

묵용감은 물러서지 않고 뜻을 계속 밝혔다.

“성에는 성의 규율이 있듯, 나라에는 나라의 규율이 있는 법입니다. 다만 본질은 똑같지요. 수성은 성에서 나라가 된 셈이니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형님께서 노고가 많으십니다.”

태자가 손을 내저었다.

“나를 신경 쓰지 말거라.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다만 북쪽에서 이 제안을 받아들이겠느냐? 지금은 이 장군의 행방도 불분명하니 강북의 형세를 파악할 수 없다. 경솔하게 행동했다간 전부 헛수고가 되지 않겠느냐.”

태자의 걱정에 묵용감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 북쪽과 소통할 사람을 보내 제 뜻을 밝히겠습니다. 큰형님께서 찬성하신다면 양측에 잘된 일이지만, 반대하신다면 끝까지 싸우는 수밖에요. 그때는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 * *

묵용감이 돌아간 지 한참이 지나도 태자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때, 방의 밀실에서 제갈겸유가 나와 허리를 살짝 굽혔다.

“전하,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태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어딘가 흐릿해,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듯했다. 제법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태자가 허무한 미소를 보였다.

“내가 어찌할 수 있겠느냐? 그 애의 힘을 어찌 당할까. 그 애가 치겠다면 치고, 멈추겠다면 멈추는 수밖에. 내가 손쓸 수 있는 일이 없구나.”

“노부가 며칠 관저를 돌아다니며 몇몇 하인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초왕과 왕비는 꿀단지가 따로 없을 정도라더군요. 그렇다면 초왕비는 초왕의 약점이 분명하니 전하께서…….”

“안 된다.”

태자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지금 초왕의 마음은 왕비에게 쏠려 있다. 너무 즐거우니 다른 일은 전부 내팽개쳤을 테지. 심지어 대업마저도 잊지 않았느냐? 지금 나섰다간 일을 그르치게 된다. 북쪽에서 소식이 올 때까진 기다리는 게 낫겠구나.”

제갈겸유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장군이 큰일을 당했는데도 초왕은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 북진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저리 확고한 걸 보면 혹 전하를 의심하는 게 아닐까요?”

태자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셋째는 무관이니 대범해 보여도, 빈틈이 없고 세심한 성격이다. 아주 작은 실마리도 그 애의 눈을 피할 수 없지. 그러니 항상 실수가 없도록 은밀히 움직여야 한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노부가 밑에도 그리 일러 놓겠습니다.”

제갈겸유가 수염을 천천히 쓸어내리다 물었다.

“전하, 초왕비는 어떤 사람으로 보셨습니까?”

“주아가 단순한 사람이라고 말했을 땐, 믿을 수 없었다. 어쨌든 백여름의 딸이 아니더냐. 오늘 만나 보니 주아의 말이 옳았구나.”

태자가 탁자에 놓인 찻잎을 가리키며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준 찻잎을 선물이랍시고 돌려보냈다. 그리 어리석은 사람은 초왕비밖에 없을 테지.”

“하면 왕비가 전하의 걸림돌이 될 때,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겠습니다.”

“일단은 지켜보고 있거라. 경거망동했다가 역으로 당할 수도 있다. 아직 초왕비를 완전히 꿰뚫어 본 게 아니다.”

태자가 찻잎이 담긴 통을 손 안에서 굴리다 미소를 지었다.

“셋째가 그런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이해할 수가 없구나.”

“사람의 정이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지 않습니까.”

제갈겸유가 수염을 쓸어내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정에 목숨을 걸지요. 언젠간 전하께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태자가 찻잎을 탁자에 내려놓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얼굴은 제법 예쁘게 생겼더구나.”

* * *

그날 밤, 묵용감은 연회상을 차리고 태자와 황보주아를 불렀다. 진작 생각했던 자리였지만 일부러 지금까지 미루어 왔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첫째는 황보주아가 괜한 말로 백천범에게 오해를 살까 싶었고, 둘째는 여인들의 환심을 곧잘 사는 태자를 자주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상 백천범이 제안하니 그도 마땅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들과의 식사 자리가 준비되었다.

다행히 분위기는 제법 좋은 편이었다. 황보주아는 침착한 모습으로 말을 아꼈고, 태자는 천문부터 지리까지 온갖 이야기를 차분하면서도 당차게 이야기하며 넓은 학식을 보였다. 백천범은 태자의 말에 홀리다시피 귀를 기울이다 마침내 감상을 내놓았다.

“둘째 아주버님, 정말 대단하세요. 역시, 이리 뛰어나시니 태자가 되신 거였군요.”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태자가 겸손히 고개를 저었다.

“당치 않습니다. 세상에는 저보다 대단한 사람이 많습니다. 바로 여기 셋째 같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저 책으로 배웠지만, 셋째는 전국을 누비며 직접 보고 겪으며 익혔지요.”

백천범이 고개를 돌려 묵용감에게 눈을 반짝였다.

“왕야께서는 아주 많은 곳을 다니신 거죠? 그런데 왜 제게 말씀 안 해 주세요?”

“병사들과 무리 지어 다녔을 뿐이니 딱히 해 줄 만한 이야기가 없었소.”

“하지만 별장에 있던 노병들의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었는걸요.”

“알겠소. 그대가 듣고 싶다면 전부 말해 주겠소.”

곧 두 사람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목용감은 백천범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백천범은 활짝 웃느라 눈이 다 감겨 있었다. 절로 사랑스러운 마음이 드는 모습이었다.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던 태자가 황보주아를 곁눈질했다. 눈꺼풀을 내리깐 채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던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태자 오라버니, 셋째 오라버니, 왕비 마마. 천천히 드십시오. 저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언니, 조금 더 드시어요.”

백천범이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식이 이렇게나 많이 남았습니다. 버리면 너무 아깝잖아요.”

“…….”

황보주아는 그릇을 힐끗 살폈다. 그녀는 한 번도 음식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풍파로 인해 숨어 지냈어도, 태자의 보살핌이 그녀를 풍요롭게 지켜주지 않았던가.

태자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마침 나도 다 먹었으니 주아를 데려다주마.”

시녀가 얼른 외투를 건넸다. 태자는 외투를 황보주아의 어깨에 걸쳐 주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밤에는 바람이 차니 조심하거라.”

“고맙습니다, 태자 오라버니.”

황보주아는 두 사람에게 옅은 미소를 지은 뒤 태자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백천범과 묵용감은 입구에 서서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배웅을 마친 뒤, 묵용감은 백천범의 손을 잡고 식탁으로 돌아왔다.

“더 먹을 것이오? 배가 부르면 이만 정리하라고 분부하겠소.”

백천범은 볼록해진 배를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하얀 얼굴에 난처한 빛이 스몄다.

“더 먹진 못하겠어요. 남은 음식은 어떻게 하죠?”

“그런 일을 왜 걱정하오?”

묵용감이 그녀를 힐끔 바라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랫것들이 다 알아서 할 일이오.”

“어떻게 하는데요? 설마 버리려는 거예요? 그건 너무 아깝잖아요.”

백천범이 식탁에 놓인 접시를 바라보더니 허리에 팔을 올린 채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오수진에서는 반찬 수가 세 개를 넘지 않았어요. 늘 먹을 수 있을 만큼만 만들었거든요. 간식을 다 팔지 못하는 날은 아예 식사를 만들지 않았어요. 간식만 먹어도 배부르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음식을…….”

그녀의 말에 묵용감은 점점 가슴이 시큰거렸다. 세 가지 반찬이나 간식으로 식사를 하다니, 그녀는 엄연히 자신의 아내거늘! 묵용감이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시무룩하게 말했다.

“앞으로 그대가 고생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오.”

백천범이 고개를 치켜들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고생이라니요, 전 배불리 먹었는걸요. 배를 곯는 게 고생이죠.”

그녀가 잠시 고민하더니 손뼉을 쳤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떠세요? 죄다 버리는 건 낭비니까 당직을 서는 보초병들에게 나눠 주는 거예요. 남은 음식이라 싫어할 수도 있으니 괜찮은지 물어보고 올게요!”

“감히 싫어할 수 있겠소?”

묵용감이 눈을 부릅떴다.

“그대가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는데 싫어한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궁에서는 남은 음식을 하인들에게 상으로 내렸다. 상전들은 한 음식에 젓가락을 세 번 이상 가져가지 않을 만큼 적게 먹었으니, 손을 대지 않은 음식처럼 보였다.

하인들은 남은 음식을 꺼리지 않았다. 오히려 먹으려는 하인들이 너무 많아 음식의 맛도 느끼기 전에 사라지기 일쑤였다. 겉치레를 중시하는 종실 귀족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기분이 좋을 땐 하인들에게 상으로 내렸고 그 외엔 버리는 일이 흔했다.

다만, 초왕의 저택은 달랐다. 묵용감은 주로 혼자 밥을 먹으니 화려한 상을 꺼렸다. 덕분에 음식이 남는 일이 드물었다. 어쩌다 남는다고 해도 버리는 일이 규율처럼 자리 잡았다. 묵용감이 백천범과 함께하면서부터 음식의 수가 늘어났지만, 관례는 여전히 지켜지고 있었다.

오랜 시간 지켜온 규율은 그녀의 말에 곧바로 사라졌다. 묵용감이 어찌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까? 그녀는 음식이 남으면 당직을 서는 보초병에게 나눠 주라고 일러 두었다. 물론 보초병들은 무척 기뻐했다. 그들로선 귀족들이 먹는 음식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찐빵과 짠지, 국수 등의 야식과는 천지 차이였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야식을 고대하며 자발적으로 당직을 신청하기까지 했다.

* * *

태자와 황보주아는 아무 말 없이 길을 걸었다. 반월문에 다다르자 황보주아가 걸음을 멈췄다.

“태자 오라버니,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겠습니다.”

태자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아야, 두 사람의 감정이 이리 깊은 줄은 몰랐다. 네게 무리한 일을 맡겼구나.”

황보주아가 쓸쓸한 미소로 답했다.

“아닙니다. 태자 오라버니 말씀대로, 셋째 오라버니는 옛정을 잊지 못하는 분이십니다. 제게 마음이 없으셔도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정은 여전히 간직하시지요. 제가 목숨을 구해 준 일도 있으니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천천히 기회를 엿봐야지 서둘러서는 안 된다. 초왕은 휴전으로 마음을 굳혔더구나. 지금처럼 남북을 따로 통치하고 싶어 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보주아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었다.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제가 가서 물어보겠습니다.”

남북을 따로 통치하다니! 그렇다면 황보 일가의 피맺힌 원한은 어찌 갚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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