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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29)화 (328/1,192)

제329화

호리호리하면서도 탄탄한 자태가 돋보이는 그는 밤하늘을 거두는 햇살보다 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든든하고 멋있게만 보였다.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백천범은 난처한 미소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 뒤 그에게 향했다.

묵용감은 줄곧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윽하고, 따스하고, 애정이 가득 담긴 눈빛이 백천범에게 향했다. 그녀가 발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에 그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새끼 새처럼 그의 품에 와락 안겨 들었다.

황보주아의 얼굴에 희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녀를 힐끔거리던 녹하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기홍의 옷소매를 끌어당기며 눈짓을 보냈다.

묵용감은 백천범을 힘껏 끌어안아 따스한 체온을 느낀 후 천천히 힘을 풀었다.

“덥소?”

백천범의 이마에 맺힌 땀을 발견한 순간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어찌 이리 땀을 흘리는 것이오? 부채질을 해 주는 자도 없었소?”

“에이, 아직 유월도 되지 않았는걸요.”

백천범이 태연하게 웃었다.

“부채질을 했다가 감기에 걸리면 어떡해요?”

묵용감이 자신의 옷소매로 그녀의 이마를 닦아 주었다. 그가 나무 아래의 황보주아를 힐끔 바라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주아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소?”

“네. 언니가 이제 절 싫어하지 않는 것 같아요. 먼저 와서 말을 걸어 주었어요.”

그녀의 밝은 대답에, 묵용감은 어렵게 입술을 떼었다.

“…그럼, 그대는 여전히 주아가 싫소?”

백천범이 솔직하게 마음을 드러내었다.

“왕야께서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고 계신 게 아니라면, 저도 싫지 않아요!”

묵용감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가 그녀를 품에 안고 방 안으로 향했다.

백천범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왕야, 안에는 무슨 일로 들어가시는 거예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그렇소.”

한껏 진지한 그의 옆모습에, 그녀는 의심 없이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정작 그는 곧장 침대로 향해 그녀를 뉘었다.

“와, 왕야, 대낮에 무슨 짓이에요……! 아이참, 왕야, 손 좀… 치워 보세요. 간지럽단 말이에요……. 아니… 아…….”

한번 맛 들이면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일이 있다더니, 그도 이제 알고 말았다.

그는 줄곧 병사 배치도를 들여다보았지만 온 신경이 나무 아래에 앉은 그녀에게 쏠려 있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너무나 또렷하게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결국 그는 손을 놓고 창문 밖의 그녀만 바라보았다. 풀밭에 앉아 햇빛을 받으며 활짝 웃는 백천범. 그 누구보다 눈부시고 아름다운, 그의 아내.

알 수 없는 갈망이 솟구쳤다. 그녀가 조금만 더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그에게 다가오길 바랐다. 그가 그녀의 곁에서 온전해질 수 있는 것처럼, 그녀도 그의 곁에서 온전해지는 기분을 알기를 원했다.

막상 그녀가 다가오니 꿈틀거리는 마음이 나가게 해달라며 아우성을 쳤다. 그녀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그를 휘감았다.

황제와 백 귀비의 방탕한 소식을 접했을 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 또한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거늘, 어찌 쉽게 마음이 홀린단 말인가? 그러나 이제 그는 알았다. 마음은 아무런 이유 없이도 누군가에게 끌리고, 동하고, 통제를 벗어나는 법이었다.

* * *

규율대로라면 초왕비가 돌아왔으니 초왕이 태자와 황보주아에게 술상을 대접해야 했다. 하지만 묵용감은 무슨 생각인지 태자와 황보주아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백천범이 돌아온 지 이틀이나 지났지만 태자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사실 태자는 초왕비가 무척 궁금했다. 초왕과 왕비의 일은 그도 익히 들었지만, 묵용감이 소문처럼 여인을 따뜻하게 대해 주는 모습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백천범도 기홍과 녹하에게 태자의 이야기를 듣긴 했다. 조용하고 온화한 성격에 기품 있는 사람이라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다만 그녀에겐 자신의 지아비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사람이었으니 다른 사내가 얼마나 번듯하든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그래도 묵용연은 초왕의 형이자 태자이니, 도리에 맞게 그녀가 먼저 찾아가 인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는 묵용감의 서재에서 좋은 찻잎을 찾은 후, 월향과 월규를 데리고 옆 정원으로 향했다.

태자는 규정을 정리한 문서를 수정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는 낌새가 보였지만 그는 눈짓조차 주지 않았다. 그때 낭랑한 목소리가 맑게 울렸다.

“둘째 아주버님을 뵈옵니다.”

태자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갸름한 얼굴에 커다란 눈, 새까맣게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 아리따운 미소를 머금고 예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일으키려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그가 가까이 가기도 전에 백천범이 무릎을 펴더니 웃으며 사과했다.

“제가 이 자세로 오래 버티지 못해서… 송구합니다.”

“…하하, 괜찮습니다. 한식구인데 남처럼 대할 필요 없습니다. 앞으로는 그리 예를 갖추지 마세요.”

백천범이 찻잎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아주버님께 찻잎을 좀 가져왔습니다.”

그녀가 부끄럽다는 듯 웃으며 덧붙였다.

“실은 무슨 차인지 잘 모릅니다. 왕야의 서재에서 가져온 것이라서요. 그래도 왕야께서 드시는 찻잎이니 아주 좋은 차일 거예요. 한번 드셔 보시어요.”

찻잎을 받아 든 태자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찻잎은 며칠 전 그가 묵용감에게 선물한 게 아닌가. 자신이 준 선물을 초왕비에게 돌려받다니.

그는 그저 따스한 말투로 고마움을 표하며 기분을 감췄다.

“이렇게 예를 차리다니요, 제수씨.”

“아닙니다. 왕야는 찻잎이 많으니 부담스러워하지 마시어요. 다 드시면 또 가져다드릴게요.”

“…….”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니 왠지 자신이 얹혀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백천범은 태연하게 고개를 내밀고 책상을 훑었다.

“아주버님, 책을 읽고 계셨습니까?”

“규정문 초안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규정문이 뭐예요?”

“…일종의 제약입니다.”

“누구를 제약하나요?”

“모든 이를 제약합니다.”

“저도요?”

백천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왜 사람을 제약해야 하는 거예요? 자유롭게 내버려 두면 좋잖아요. 저는 제약이 싫어요. 왕야께서도 절 자유롭게 내버려 두시는걸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어느새 나타난 묵용감이 그녀의 손을 상냥히 붙잡았다.

“한참이나 찾았소. 이곳엔 무슨 일이오?”

“아주버님께 찻잎을 드리러 왔어요.”

묵용감은 태자가 들고 있는 찻잎을 보더니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시선을 마주한 두 형제는 조금은 멋쩍은 미소를 교환했다.

“왕야,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어요?”

백천범이 묵용감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니오. 둘째 형님을 찾아왔소.”

“그럼 이야기 나누세요. 저는 먼저 가볼게요.”

“알겠소. 먼저 가 있으시오. 금방 따라가겠소.”

그러나 백천범은 눈을 동그랗게 뜰 뿐이었다.

“놓아주세요.”

묵용감이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오?”

“왕야께서 손을 잡고 계시니 어떻게 가겠어요?”

“아… 아.”

그녀의 손을 놓는 순간 묵용감은 미묘한 공허함을 느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그는 미동도 없이 서서 지켜보았다. 손을 놓았을 뿐이지만, 그녀를 영영 잃을 듯한 이 기분이 끔찍이도 싫었다.

갑작스레 그녀가 보고 싶어 안채로 향했는데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 시녀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곧장 그녀를 찾아 사방을 헤맸다.

정신없이 걷다 다른 시녀에게 왕비가 태자를 찾아갔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서둘러 태자를 찾아온 그는 그녀의 손부터 붙든 것이었다. 초조함이 거짓말처럼 녹아내렸다. 그제야 그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태자가 웃음소리가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믿기지 않는구나. 셋째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 걸 보게 될 줄이야.”

묵용감은 추태를 부렸다는 생각에 조금 멋쩍은 표정을 보였다.

“저도 믿기지 않습니다. 어찌 저 여인을 만났을까요. 하필 백여름의 딸을…….”

“본래 인연은 설명하기 어려운 게 아니더냐.”

태자가 묵용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평생 홀로 지내는 이도 있다. 누구의 딸이든 이리 맺어졌으니, 아껴 주거라.”

“명심하고 있습니다.”

묵용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왕비와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소망을 내보인 묵용감은 잠시 망설였다. 입술을 떼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형님, 더 이상의 전쟁은 무리입니다.”

태자의 눈동자에 당황한 빛이 스쳤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느냐?”

“휴전한 뒤로 백성들의 삶이 편안해지지 않았습니까. 하여, 이렇게 지내는 게 더 나은 선택이라 생각했습니다. 강남은 북쪽보다 식량도 풍족합니다. 형님께서 남쪽의 군주로 지내시면서 큰형님과 나란히 나라를 돌보심이 어떻습니까?

형님께서 돌보시든 큰형님께서 돌보시든 동월국이 우리 묵용씨 가문의 천하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열을 가려야 한단 말입니까?”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묵용감의 뜻은 강고하기 그지없었다.

“큰형님은 전쟁을 좋아하는 분이 아닙니다. 근면 성실하게 일하면서 태평성세만 바라셨습니다. 둘째 형님께서는 큰형님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형님께서 남쪽을 통치하시면 백성들도 평안히 지낼 수 있습니다.

형님과 큰형님이 양쪽에서 나라를 다스리면 동월국은 부국강병을 이룰 테고, 백성들도 전쟁을 두려워하는 일 없이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태자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일단은 묵용감의 말을 듣는 있는 듯했다.

“남북을 나누어 통치하고, 난강을 무역항으로 삼아 상인들이 난강에서 통관을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난강을 통해 남쪽의 쌀과 찻잎, 비단 등을 북쪽으로 보내고, 북쪽의 약재, 콩, 담뱃잎을 남쪽으로 들여올 수 있습니다.

대내적으로는 두 군주가 통치하지만 대외적으로는 한 나라인 형태입니다. 형님이 보시기엔 어떠십니까?”

태자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묵용감을 물끄러미 보았다. 한참 후에야 그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걸렸다.

“이미 결정을 내렸구나. 상의가 아니라 통지를 하러 온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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