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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28)화 (327/1,192)

제328화

“아이고, 기홍 언니. 날 위해 하는 말이에요? 아니면 영구 무사님의 충심을 자랑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고 보니, 어제 영구가 처소 뒤로 데려가던데… 둘이 몰래 무슨 얘기한 거야?”

기홍의 얼굴에 붉은 꽃이 만개했다. 그녀가 녹하의 입을 막으며 성난 표정을 보였다.

“한 번만 더 허튼소리 하면 입을 꿰매 버릴 거야!”

녹하가 몸을 틀며 옆으로 도망치더니 깔깔 웃기 시작했다.

“이거 봐, 부끄러우니까 괜히 성이나 내고. 분명 입을 맞췄을 거야.”

이건 또 무슨 재미난 소식이란 말인가? 신이 난 백천범이 손뼉을 치며 부추겼다.

“어서 말해 봐요, 어서요. 둘이 어쩌다 그런 사이가 된 거예요?”

기홍은 황급히 치맛자락을 붙잡고 녹하를 뒤쫓았다. 녹하는 웃으며 나무를 붙잡고 빙글빙글 돌았다.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는 푸른 풀밭 위에서, 백천범은 두 손으로 땅을 짚고 감격에 젖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돌아왔다. 이젠 정말 그가 곁에 있다. 정처 없이 표류하던 작은 배가 드디어 바람을 피할 부두에 들어선 듯했다. 이제는 비바람도, 쓸쓸한 표류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한편 기홍은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끝까지 녹하를 뒤쫓았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속도를 늦추지 못한 그녀가 그대로 몸을 부딪치고 말았다. 이내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만 하십시오. 땀이 나지 않았습니까.”

햇살이 환한 대낮에 그의 품에 안겼으니, 기홍은 부끄러워 어찌할 줄 몰랐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백천범 쪽을 봤더니, 다들 미묘한 웃음을 머금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몸을 세우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영구의 탄탄한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여느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전보다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누가 물어보면 알려 주면 그만 아닙니까? 어차피 다들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녀가 머뭇거리더니 모기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뭘 안다는 거예요?”

“서로 좋아한다는 것 말입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기홍이 성을 내듯 눈을 치켜떴다.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거예요?”

“아닙니까?”

영구는 누구보다 타인의 속내를 잘 알아차렸지만, 막상 자신의 일은 바보처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법밖에 몰랐다.

“그게…….”

그녀가 팔을 빼내려 꼼지락거렸다. 영구는 여전히 그녀에게 올곧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말해 보십시오.”

자신을 잡고 있는 손이 기분 나쁘지 않으니 더욱더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빨개진 얼굴로 영구를 올려다보았다.

“맞아요. 서, 서로 좋아하는 사이.”

그제야 그녀를 놓아준 영구가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녹하 아가씨가 괴롭히거든 왕비 마마께 말씀하십시오. 왕비 마마께서 도와주실 겁니다.”

그가 이런 것까지 신경 쓰다니. 더더욱 부끄러워진 그녀는 짤막한 대답만 남기고 황급히 몸을 돌려세웠다.

두 사람의 달콤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절로 부러움이 밀려 왔다. 녹하는 백천범처럼 무릎을 끌어안고 턱을 괸 채 서글픈 목소리를 흘렸다.

“어휴, 비교를 안 할 수가 없네. 저런 모습을 보다가 내 처지를 생각하면 참…….”

월규가 그녀를 바라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언니는 임자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웬 한숨이세요?”

녹하는 여전히 서글픈 목소리로 답했다.

“저쪽은 정이 넘치는데 나는 만나기만 하면 닭이랑 개가 만난 꼴처럼 난장판이잖아. 어휴, 비교하려고 해도 비교가 안 돼.”

다들 박장대소를 터뜨렸지만, 월향은 옅은 미소만 지으며 토끼의 털만 쓰다듬었다. 그녀는 돌아온 이후로 묘하게 기운이 없는 듯했다.

왜 갑자기 양보전이 떠올랐을까. 월향도 이유를 몰랐다. 혼사는 마을에 제대로 정착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이제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으니 아무도 혼사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녀도 더 이상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양보전의 헤실헤실 웃는 모습이 떠오르면, 그녀는 알 수 없는 허전함에 사로잡혔다. 지나간 모든 일은 흔적을 남긴다지만, 양보전이 만든 흔적은 다소 짙게 남은 듯했다.

그녀는 먼 곳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지나면 양보전도, 함께 보낸 시간도 기억 속으로 사라지리라.

즐겁게 웃음꽃을 피우던 중, 녹하가 별안간 목소리를 낮췄다.

“황보주아입니다.”

돌아온 후 아직 그녀를 마주한 적이 없었다. 다만 이야기는 녹하에게서 수도 없이 들었다.

녹하가 기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왕비 마마의 토끼까지 욕심을 냈다니깐요. 제가 안 줬더니 왕야께 고자질까지 했어요. 물론 퇴짜를 맞긴 했지만, 정말 낯짝도 두껍지 않습니까! 아, 그래도 그날 이후로는 왠지 거만하게 굴지 않더라고요. 후원 누각에서만 지내더니 오늘은 웬일로 나왔네요.”

백천범은 저 멀리서 흔들리는 황보주아의 인영을 가만히 응시했다. 한 벌로 된 붉은 치마가 타오르는 불을 연상케 했다. 틀어 올린 머리에 진주 장신구를 꽂고 있었는데, 걸을 때마다 진주알이 가볍게 흔들리며 이마에 작은 반짝임을 더했다. 땅에 끌릴 만큼 긴 치마는 단아한 걸음걸이에 맞춰 가볍게 살랑였다.

백천범은 그녀의 기품이 부러웠다. 황보주아는 여전히 단정하고 우아했다. 반면 자신은 반년이나 남장을 하고 다닌 탓에 걸음걸이가 우악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새삼 예전 같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묵용감은 백천범에게 황보주아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명확하게 알려 주었다. 황보주아는 그의 옛 친구이자 책임을 다해야 하는 사람에 불과했다.

백천범도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죄신의 딸인 그녀가 기댈 곳이 어디 있을까. 묵용감은 그저 옛정과 목숨을 구해 준 일의 보답으로 그녀를 거두었다. 그 사실을 아는 만큼, 백천범은 그녀를 적대할 생각도, 다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멀리서 걸어오는 그녀를 향해, 백천범이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황보주아는 아리따운 자태로 백천범에게 천천히 예를 갖췄다.

“왕비께서 돌아오셨다는 말에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백천범은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사람이다. 황보주아가 먼저 숙이고 들어오니, 그녀도 서둘러 예를 갖췄다.

“저도 언니께 인사드립니다.”

예를 갖추고 난 뒤, 두 사람은 허리를 세우고 상대방을 유심히 살폈다.

백천범의 눈에 담긴 황보주아는 예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외모가 아니라, 그녀를 감싼 분위기가 달랐다. 예전에는 차갑고 도도하여 거리감이 느껴졌다면, 지금은 차분한 느낌이 강했다. 얼굴에 웃음기도 거의 없었다. 세월이 그녀의 모난 곳을 깎아 버린 듯 어딘가 기운이 없는 느낌마저 들었다.

한편 황보주아는 다소 놀란 눈빛으로 백천범을 살폈다. 눈앞에 서 있는 백천범은 너무나도 변해 버렸다. 키도 훌쩍 큰 데다 얼굴도 만개한 꽃송이처럼 부드러운 선을 그리고 있었다. 한층 성숙해진 모습이었지만, 활짝 웃을 때마다 여전히 싱그럽고 생기가 넘치는 기운이 느껴졌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백천범은 예전보다 훨씬 아름다워졌고, 그녀보다 빼어났다. 볼품없고 가소로웠던 예전의 계집이 지금은 허물을 벗기라도 한 듯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해 나타났다.

그녀는 까닭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흘러가는 세월이 무서웠다. 백천범의 눈부신 시간은 이제 시작되었는데, 그녀의 시간은 복수만을 위해 전부 소모해 버린 듯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두려움과 허무함을 함께 느꼈다.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간 셋째 오라버니께서 왕비 마마를 걱정하시느라 말씀도 거의 하시지 않았답니다.”

그녀는 한마디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려는 듯했다. 백천범은 예전의 감정은 잊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며 앉기를 권했다. 살면서 바닥에 앉아 본 적 없던 황보주아는 잠시 망설였다.

백천범은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고 월규에게 작은 걸상을 가져오라고 분부했다.

그러나 황보주아가 그녀의 명을 거두었다.

“번거롭게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잠시 서 있다 돌아가겠습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앉아서 이야기 좀 나누어요.”

마침 월규가 걸상을 가져왔다. 황보주아는 걸상에, 왕비는 바닥에 앉아선 안 되니 그녀는 기어코 걸상 두 개를 들고 왔다.

황보주아가 오기 전까진 신분의 경계 없이 즐겁게 웃으며 떠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오자마자 시녀들은 곧바로 왕비를 극진히 모시며 공손한 모습을 유지했다.

“언니,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네. 셋째 오라버니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왕비께서는요? 바깥 생활은 즐거우셨습니까?”

“그럼요.”

백천범이 얼른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성 밖 오수진이라는 마을에서 지냈는데 그곳의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나중에 시간이 나면 함께 가시지 않겠어요?”

“좋습니다.”

황보주아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마을에서는 무얼 하며 지내셨습니까?”

“장사를 했어요. 월규는 수를 놓고, 월향이는 간식을 만들었죠. 저는 발품을 팔아 장사를 했고요.”

“장사도 할 줄 아십니까?”

황보주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사내대장부도 돈이 없으면 꼼짝 못 한다잖아요. 아무 일도 안 하고 배를 곯을 수는 없죠. 사실 무척 재미있었어요. 사람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고요.”

“사내도 있었습니까?”

“밖에서 일하는 사람은 사내가 대부분이니까요. 그런 이들이 집안을 일으키는 법이죠.”

백천범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더니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탕탕 쳤다.

“물론, 저 같은 사람이요.”

황보주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빼어난 곡선에 시선을 두었다.

“…….”

저런 가슴을 가진 사내도 있단 말인가?

백천범을 일깨우려는 듯, 월규가 뒤에서 헛기침을 했다. 자유롭게 이야기를 할 때도 늘 신분을 잊지 말아야 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황보주아가 눈앞에 있으니, 경계를 늦출 순 없었다.

정작 백천범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언니, 토끼를 갖고 싶다고 하셨지요? 한 마리 골라 보세요.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황보주아가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왕비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셋째 오라버니께 말씀드렸습니다. 오라버니께서는 그간 여섯 마리가 함께 지냈는데 무리에서 떨어뜨리면 잘 지낼 수 없을 거라고 하셨지요. 그러니 함께 지낼 수 있도록 두는 게 좋겠습니다.”

솔직하면서도 이해심 깊은 말을 듣고 있자니, 백천범은 그녀에게 더욱더 호감을 느꼈다.

“언니 말이 맞아요. 일단 함께 지내게 두고, 새끼를 낳으면 두 마리 드릴게요.”

황보주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해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녹하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 왕야께서 부르십니다.”

백천범이 묵용감의 처소 쪽을 바라보니 마침 그가 문 앞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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