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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27)화 (326/1,192)

제327화

사장풍에게 굴욕을 선사한 초왕은 한껏 의기양양하게 마을을 떠났다. 백천범을 찾은 데다 연적에게 제대로 갚아 주었으니 한없이 마음이 들떴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를 잊지 않았다. 초왕으로서 할 일이 있지 않은가. 관저로 돌아온 그가 밀서를 들고 태자를 찾아갔다.

태자는 그의 모사인 제갈겸유와 함께 있었다. 그가 들어오자 태자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너라. 셋째에게 기쁜 소식이 있다고 들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묵용감은 전에 없이 활짝 웃으며 태자에게 답례했다.

옆에 있던 제갈겸유도 웃으며 예를 갖추었다.

“가정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하지 않습니까. 왕비께서 돌아오셨으니 군대를 이끌고 북진할 일만 남았습니다. 이 나라는 곧 왕야의 손에 들어오겠지요.”

그 말에 묵용감은 진지한 얼굴로 밀서를 건넸다.

“어젯밤에 받았습니다. 이천행이 피격을 당해 생사가 불분명하다고 합니다.”

태자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가 서둘러 밀서를 읽어내렸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유헌의 짓이더냐?”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묵용감이 의자에 앉아 잠시 말을 골랐다.

“유헌도 가능성이 있지만, 황제 쪽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천행은 강북으로 잠입했으니 황제의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고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왕야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갈겸유가 신중하게 거들었다.

“북은 유헌이 저희에게 오는 걸 원치 않을 테니, 이천행을 해치우고 유헌의 소행으로 꾸몄을지도 모릅니다. 맞서 싸우라는 압박이지요. 그리하면 유헌의 실력과 관계없이 저희의 병력을 줄일 수 있을 테니까요.

다만, 병력이 부족한 저희로서는 병사들이 타격을 입을수록 불리해집니다. 황제가 이 점을 노리고 있을까 심히 걱정입니다.”

“병력은 이미 초왕이 손을 쓰고 있다.”

태자가 초왕을 바라보았다.

“한 달이 지났으니 전투에 투입해도 되지 않겠느냐? 유헌은 그리 강골이라 할 수 없으니 북을 먼저 치는 게 낫겠구나. 사기도 진작시키고 북에 우리의 세력을 과시해야지. 군신이라는 칭호를 쉽게 얻은 게 아니라는 걸 보여 주자꾸나.”

태자의 말에 제갈겸유가 맞장구를 쳤다.

“태자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노부가 보기에는 황제 쪽이든 유헌이 했든 다를 게 없습니다. 왕야, 전쟁을 멈춘 지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이제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초왕은 뭔가를 망설이는 듯했다.

“잠시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우선은 이천행을 찾아야 합니다.”

“셋째야, 그쪽은 이미 늦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더 움직이기 어려워지지 않겠느냐.”

“출전에서 가장 위험한 게 경솔함입니다.”

밀서를 응시하는 묵용감의 눈동자가 깊고 어두운 빛을 띠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둘째 형님.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 * *

그 시각, 누군가는 기뻐했고 누군가는 근심에 잠겨 있었다.

사장풍에게 중매를 거절당했지만, 사성성의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사장풍이 아무리 거절해도 소용없으리라. 예로부터 혼인은 부모의 명과 중매인의 말에 달려 있다고 하지 않던가. 절대 사장풍이 단독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초왕이 어떤 사람인가. 한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다. 이곳 남쪽에서는 초왕이 곧 황제나 다름없었다. 감히 황제가 이어 준 혼사를 거역하다니, 목이 몇 개든 남아나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사장풍이라고 해도 초왕의 뜻을 거스를 수 없음이 분명했다. 그는 연신 쾌재를 불렀고 사장풍을 이미 사위로 맞은 듯 득의양양했다.

동월국은 농업이나 상업을 문무보다 아래로 여기는 풍조가 있었다. 높은 관직을 가진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수하까지도 상인인 사성성을 업신여기곤 했다. 그는 위치를 다지기 위해 힘겹게 번 돈을 거리낌 없이 뇌물로 뿌렸다. 그렇게 버티고 얻어낸 위치였다. 사 장군이 정말 사위가 된다면, 누가 감히 그를 무시하고, 손을 벌릴 수 있을까!

사장풍 덕에 그의 신분이 바뀌는 셈이다. 그리되면 상류 사회에 낄 명분까지 생긴다. 높은 나리들, 명문 집안사람들과 함께 고금을 논하며 지낼 수 있다니!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흡족했다.

신분은 물론이거니와 사장풍이라는 사내 자체만으로도 퍽 만족스러웠다. 어차피 신분이 드러났으니 없던 일이 되었지만, 사앵앵을 맡기기엔 너무 허약해 보이는 전범이 늘 마음에 걸렸었다. 반면 사장풍은 어떤가. 훤칠한 키에 건장한 체격, 부리부리한 눈매며 다부진 입매가 우뚝 선 나무처럼 듬직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즐거운 상상으로 더없이 들떠 있었다. 경사가 생기면 마음이 상쾌한 법이다. 그는 손에 호두 두 알을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건넸다. 어린아이를 마주치면 사탕이라도 사 먹으라며 동전을 쥐여 주었다. 꼭 자신이 아내를 맞이할 때처럼 기쁘기 그지없었다.

기쁨에 젖은 사성성과 달리, 사앵앵은 서리를 맞은 가지처럼 통 기운이 없었다. 이제 전범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사내가 아니라 여인이라는데 어찌하겠는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호되게 혼을 내주고 화라도 풀겠지만, 백천범은 초왕비였다.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목이 날아갈 터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을 다잡는 것뿐이었다. 사장풍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아버지에게는 완벽한 사내일지라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녀는 미소년이 좋았다. 사장풍처럼 지나치게 위엄 있고 엄숙한 사람은 길가의 돌멩이나 다름없이 보였다. 참나, 그런 사장풍에게 면전에서 퇴짜를 맞다니. 그녀도 별로이건만!

더욱 근심에 잠긴 이는 다름아닌 이장이었다. 그는 전씨 삼 남매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줄 알고 양보전과의 혼사를 밀어붙였다. 잘 되어가는 듯하더니만… 별안간 전범은 초왕비가 되고, 두 누이는 초왕비의 시녀가 되어 버렸다. 무엇보다 초왕은 초왕비를 데리고 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초왕은 남쪽 지역의 군주이니, 왕비는 황후나 다름없고, 그녀를 모시는 시녀는 마마로 여겨야 했다. 황후 곁의 마마가 시집을 갈 땐 아무리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 해도 계급 있는 관리를 고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 지체 높은 여인이 이런 시골 마을의 참기름 집 아들에게 시집을 오겠는가? 게다가 멀쩡한 사람도 아니고 바보였다. 초왕이 이 일을 알게 된다면, 멀쩡한 여인을 바보와 혼인시키려 한 죄로 벌을 내릴 수도 있었다.

여동생과 매부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일은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문제는 양보전이다. 양보전은 아무리 말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장에게 양보전은 늘 아픈 손가락처럼 마음이 쓰이는 조카였다. 어릴 땐 그렇게 총명했던 아이가… 열병만 나지 않았어도 저리되지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자신의 변변찮은 아들보다 훨씬 더 신수가 훤한 청년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평소 양보전은 외숙부의 말이라면 곧잘 들었지만, 이번에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내를 찾아야 한다며 온 마을을 허겁지겁 뛰어다녔다. 몇몇 오지랖 넓은 사람들이 월향이 성에 간 사실을 말해 주는 바람에, 그는 곧장 성으로 달려갔다.

소식을 들은 그의 부모는 다급히 그를 찾으러 갔고, 성으로 가는 길목에서 개울가에 앉아 있는 아들을 찾아냈다. 너무 급히 달려가다 개울로 굴러떨어진 듯했다. 돌에 긁혔는지 얼굴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멀거니 앉아 있는 아들의 모습에 부부는 속상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결국 그의 부모는 말을 잘 듣고 있으면 월향이 돌아올 거라는 거짓말로 그를 달랬다.

그 후 양보전은 매일 월향의 빈집을 찾아가 예전처럼 마당을 쓸었다. 이장은 청소할 사람을 구할 생각이었지만 양보전이 그 일을 도맡으니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는 마당을 청소한 뒤엔 방을 정리했다. 그러다 월향의 침대 옆에 앉아 한참 동안 그녀의 어여쁜 미소와 상냥한 목소리를 되새겼다. 방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창문까지 꼼꼼히 잠그고 나면, 그는 대문 밖 계단에 앉아 간절한 눈빛으로 거리를 바라보았다.

언제든 월향이 돌아오면 자신이 제일 먼저 알아볼 수 있도록, 성으로 이어진 거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 어둠이 내려 여인들이 나오지 않을 시각이면, 양보전은 계단에서 일어나 천천히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다들 그를 놀렸지만 시간이 갈수록 안타깝게 여겼다. 평범한 이라도 견디기 버거울 텐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가 이별을 어찌 감내하겠는가. 그저 가여울 따름이었다.

* * *

백천범이 묵용감의 곁으로 돌아와 가장 기뻤던 일 중 하나는 토끼과의 재회였다. 심지어 그녀가 다른 이에게 주었던 토끼까지 데려와 여섯 마리가 함께 있었다.

녹하가 대바구니를 풀밭에 내려놓고 한 마리씩 꺼내 햇볕을 쬐어 주었다.

“왕비 마마께서 잘 모르셔서 그렇지, 토끼가 아니라 토끼 나리예요. 전장에 나가 싸우는 것보다 토끼 시중드는 게 더 고된 일이었다니까요. 잘 먹이고, 재우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햇볕도 쬐어 줘야 했어요.

그뿐이에요? 왕야께서 토끼털 한 가닥이라도 뽑히면 소인에게 죄를 묻겠다고 하셨다니까요. 하늘도 무심하시지……! 토끼가 어떻게 털이 안 빠지겠어요. 소인의 목숨이 아홉 개라 해도 살아남지 못할걸요!”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기홍이 입을 열었다.

“왕야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긴 했지만, 잘 보살핀다며 칭찬만 하셨잖아. 죄를 물으신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뭐.”

“아무렴, 왕야께서 끔찍이 아끼시는 나리들인데 어찌 소홀히 돌보겠어?”

장난스레 말하던 녹하가 슬쩍 백천범을 바라보며 물었다.

“왕비 마마, 그간 왕야를 보고 싶지 않으셨습니까? 왕야께서는 마마를 얼마나 그리워하셨는지 모릅니다. 짬이 나시면 토끼를 막사로 데려오게 하시고, 책상에 올려놓아 맘껏 뛰놀게 하셨지요. 왕야께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시는데, 소인의 코가 다 시큰거렸답니다.”

예전 일로 아직 앙금이 남은 월규가 투덜거렸다.

“왕야께서 자초하신 일입니다. 괜히 왕비 마마를 시골로 보내셔서…….”

백천범이 얼른 묵용감의 편에 섰다.

“그건 왕야 탓이 아니야.”

묵용감은 그녀를 농촌 별장에 보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그날 밤 흉금을 털어놓으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녀도 이제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왕야께서도 난처한 상황이었어. 그러니 옛일은 괜히 들추지 말자. 떨어져 봐야 소중함을 더 잘 안다고, 지금 왕야께서 날 대하시는 걸 봐, 어때?”

백천범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예전보다 훨씬 잘해 주시잖아.”

“맞습니다.”

녹하가 그녀를 놀리듯이 웃었다.

“소인이 보기에는 왕비 마마께서 왕야를 섬기는 게 아니라 왕야께서 마마를 섬기십니다. 가만히 계시다가도 마마만 보시면 웃음꽃을 어찌나 활짝 피우시는지, 조금 모자라 보일 정도라니까요.”

기홍이 눈을 부릅뜨며 녹하를 찰싹 때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영구 무사님이 들으면 또 검을 뽑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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