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6화
백천범은 서둘러 사앵앵을 일으키려 했지만 묵용감이 경고하듯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다.
백천범은 어리둥절한 채 손을 거두었다. 사앵앵은 여인이건만, 여인과도 닿지 말란 말인가?
미묘한 분위기 속에 다들 자리에 앉았다. 뒤늦게 온 이장과 사성성은 전범이 초왕비라는 사실을 듣고 대경실색했다.
초왕비가 가출을 한 일도 놀라운데 남장을 하고 두 시녀와 마을에 정착했다니! 소문이라면 절대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소설이라고 해도 허무맹랑하다 여길 테지만, 그 소설의 주인공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초왕은 내내 온화하고 기쁜 표정이었다. 보는 사람이 다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한편, 사성성은 용기를 내어 백천범에게 죄를 고했다.
“소인이 그간 왕비 마마를 몰라뵙고 큰 죄를 범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왕비 마마!”
백천범은 다른 이들을 속였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한 참이었다. 사성성이 먼저 얘기를 꺼냈으니, 그녀도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제가 먼저 잘못을 저지른 거예요. 여러분께 사죄하는 의미로 한잔하겠습니다.”
술잔을 입에 대려는 순간 묵용감이 그녀의 손을 붙잡더니 그대로 자신의 입에 술을 털어 넣었다.
“본왕과 작은 오해가 생겨 왕비가 여기로 왔으니, 본왕의 책임이다. 왕비가 이곳에서 그대들의 보살핌을 받았으니, 본왕이 고마움을 표하는 마음에 먼저 한 잔 들이켰다.”
초왕이 감사를 표하다니, 이러한 영광이 어디 있을까. 다들 기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화답했다.
“어찌 그런 말씀을… 왕비 마마께서 와주신 것만으로도 저희 오수진의 영광입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거나하게 술을 들이켠 초왕의 얼굴에 붉은빛이 스몄다. 마을 사람들에게서 백천범이 어떻게 지냈는지 들으니, 그의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는 술을 마시면서도 틈틈이 백천범에게 음식을 덜어 주었다. 때때로 사장풍과 사앵앵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모두 신이 나 있었지만, 사장풍과 사앵앵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술도 마시고 음식도 먹고, 초왕이 경배사를 할 땐 다른 이들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기도 했지만, 두 사람의 혼이 쏙 빠져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장군인 사장풍에게는 아무도 눈치를 주지 않았지만, 사앵앵은 달랐다. 사성성은 시종일관 어두운 안색을 보이는 딸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누군가 그녀가 평생에 걸쳐 모은 돈을 훔쳐갔다고 여길 법한 표정이었다.
물론 그녀의 괴로움을 그도 모르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내가 까닭 없이 여인으로 변한 것도 모자라 무려 초왕비였으니 어찌 태연할까. 누구라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평소라면 그도 내버려 두었겠지만 지금은 초왕의 앞이었다. 사앵앵의 표정만 보면 자신의 연인을 데려갔다며 초왕을 원망하는 꼴이었다.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될 일이다.
그가 몇 차례 눈치를 주었지만 사앵앵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식탁이 작았다면 밑에서 발이라도 찼겠지만 너무 큰 식탁이라 닿지도 않았다.
어느 정도 술기운이 올랐을 즈음, 초왕이 그에게 물었다.
“주인장, 저 아이가 주인장의 딸인가?”
“예, 예.”
사성성이 돌연 몸을 일으켰다. 이마를 타고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정말이지, 걱정한 일은 꼭 닥쳐오고 만다. 그의 딸은 아직도 반성하는 기미가 없었다. 한 끼 식사로 사씨 가문이 멸문되는 일만큼은 막아야 하는데…….
결국 그는 소매로 이마를 닦은 뒤, 굽실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소, 소인의 딸이 아직 어린 데다 주, 주루에서 자란 탓에 규, 규수다운 고상함은 없습니다. 그러니 부,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왕야.”
어찌나 긴장되는지, 그는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은 그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말을 마쳤다.
다행히 초왕은 여전히 기분이 좋은 듯했다. 그가 호방한 손짓으로 그에게 편히 하라는 뜻을 전했다.
“긴장하지 말고 앉거라. 왕비가 이곳에서 오래 머물렀으니, 그대들은 왕비의 친정 식구나 다름없지. 본왕 앞에서 그리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
백천범이 활짝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여러분은 모두 제 친정 식구들이에요. 앞으로도 여러분을 보러 자주 올 거예요.”
초왕이 웃으며 그녀의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녀를 품에 안은 듯한 자세가 두 사람을 더없이 사이좋은 모습으로 만들어 주었다.
“본왕이 왕비를 데리고 들를 테니 왕비가 머물던 거처는 남겨 두거라. 생각날 때마다 둘러보겠다.”
“암요,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이장이 서둘러 대답했다.
“소인이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왕비 마마께서 언제 돌아오시더라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방을 보실 수 있게끔 준비해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장님.”
백천범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왕야께 수고비를 드리라고 할게요.”
그녀의 말투는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인처럼 자유분방했다. 다들 놀란 눈으로 초왕을 힐끔거렸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애정이 가득한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그러다 초왕이 불쑥 화제를 돌렸다.
“주인장, 딸아이는 몇 살인가?”
“왕야께 아룁니다. 올해 열여섯입니다.”
“정혼자는 있고?”
“그것이…….”
사성성은 난처한 표정으로 웃었다. 초왕비를 데릴사위로 들이려던 일을 초왕도 알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알고 있다면 그에게 죄를 물을 게 분명했다.
“아직 없습니다.”
“그러한가. 하면 본왕이 중매를 서도 되겠느냐?”
“아이고, 초왕야께서 저희 딸의 중매를 서주신다면 이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성성이 벌떡 일어나 초왕에게 절을 올렸다.
“소인, 왕야의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놀랄 법도 하건만, 사앵앵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옆에 앉은 사장풍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자 한 사람은 미소를, 한 사람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미소를 지은 이는 기세등등했고, 당황한 자는 흠칫 몸을 떨었다. 사장풍이 황급히 일어나 초왕에게 두 손을 맞잡고 예를 갖췄다.
“왕야, 소인은 급한 업무가 생각나 이만…….”
초왕은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태연히 대꾸했다.
“휴전 중에 급한 업무가 어디 있더냐? 앉아서 더 먹거라.”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자리인지라 사장풍은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초왕의 느긋하고 온화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주인장, 내가 이어 주려는 자는 외모도 뛰어나고 젊은 나이에 장군이 된 사내다.”
그가 손가락으로 사장풍을 가리켰다.
“바로 저기 사 장군이지. 주인장이 보기엔 어떠한가?”
백천범은 묵용감이 중매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터였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좋은 제안이 아닌가. 사앵앵과 사장풍은 제법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듣기엔 놀라운 제안이었다. 사 씨가 돈이 많긴 해도 작은 마을의 유지일 뿐이다. 그런 집안에서 어찌 장군을 사위로 맞아들일 수 있을까. 초왕이 주선하지 않았더라면 올려다보지도 못할 나무 그 자체였다.
사성성은 어쩔 줄 모르며 초왕에게 무릎을 꿇고 감사 인사를 올렸다.
창백했던 사앵앵의 얼굴에도 옅게나마 혈색이 돌았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가 백천범을 바라보더니, 곧 사장풍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장풍의 얼굴은 잿빛이다 못해 거센 동요를 일으키는 듯했다. 그가 탁자 아래에서 두 손을 꽉 움켜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더 큰 일을 망치는 법이다. 더구나 초왕이 그의 약점을 노리고 있으니, 그도 분수를 지켜야 했다.
그러나 폭포가 거꾸로 오를 수는 없듯이, 한번 터져나온 감정은 아무리 노력해도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결국 탁자를 내리치며 일어났다.
“소인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초왕의 뒤를 지키던 영구가 곧장 검을 뽑아 겨누었다.
“무엄하다!”
가동은 사장풍에게 끊임없이 눈빛을 보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초왕의 체면에 도전하면, 영구는 정말 검을 휘두르고도 남을 사람이다.
사람들은 어느새 겁에 질려 초왕의 눈치를 살폈다.
정작 초왕은 화를 내기는커녕 재밌다는 듯 활짝 웃고 있었다.
“사 장군, 무엇이 불만이더냐? 한번 말해 보거라. 사씨 집안 문벌이 낮아서? 아니면 사씨 아가씨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
사장풍은 거친 숨을 내쉬며 이를 악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초왕이 빙그레 웃더니 그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본왕이 보기에 사씨 아가씨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짝이다. 얼굴도 단아하고, 어린 나이에 벌써 이리 큰 주루를 관리하지 않느냐? 네가 밖에서 공을 세울 때 아가씨는 가업을 돌볼 수 있으니, 얼마나 완벽한 조합이냐. 게다가 너처럼 거친 성격을 가진 자는 옆에서 관리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평범한 여인들은 널 감당할 수 없을 테지만 사씨 아가씨는 다르지. 주루도 관리하는데 너도 잘 보듬어 주지 않겠느냐. 넌 그 성질을 좀 죽여야 한다. 앞으로는 허황한 꿈을 접고 착실하게 살거라.”
초왕의 말처럼, 사성성은 사장풍이 매우 흡족했다. 짙은 눈매와 부리부리한 눈, 위풍당당한 기개를 가진 그는 사씨 가문의 부족한 점을 넘치도록 메워 주는 사내였다. 후에 외손자가 태어난다면 부모의 좋은 점을 빼닮아 문무에 능하고 장사 수완도 뛰어난 걸출한 인물일 터였다. 상상만으로도 넘치는 행복함에 입을 다물기 어려웠다.
그는 미래의 사위에게 넉살 좋게 말했다.
“사 장군님, 저희 딸의 어느 부분이 마땅치 않으십니까? 말씀만 해 주시면 고쳐보겠습니다.”
사장풍은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발을 구르더니 밖으로 향했다.
영구가 막아서려 했지만, 가동이 그를 붙들었다. 사장풍은 그 틈을 타 문을 빠져나갔다. 사장풍의 행동은 누가 봐도 무례하지 짝이 없었다. 다들 당황하여 초왕의 안색을 살폈다. 이상하게도 초왕은 만족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그가 사장풍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그리 가 버리면 어찌하겠단 뜻이냐? 서로 의논을 하면 될 일을……. 본왕의 선심을 저버리지 말거라!”
영역 다툼에서 이긴 맹수처럼 그의 말투는 기세등등하기 그지없었다.
백천범이 볼을 부풀리더니 그의 팔을 살짝 꼬집었다.
“왕야. 됐어요, 그만 하세요.”
사람들은 사 장군이 어찌 초왕의 뜻을 거역하는지 영문을 몰랐다. 게다가 허황된 꿈을 접으라니…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감히 높으신 분들의 일을 물을 수는 없으니 사람들은 그저 지켜만 보았다.
그 와중에 초왕비가 초왕의 팔을 꼬집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겁하며 초왕을 힐끔거렸다. 누구보다 존귀한 초왕에게 왕비가 이리 무엄하게 대하다니! 분명 체면을 구기는 일이었건만, 초왕은 사람 좋게 웃고만 있었다.
초왕을 향한 사람들의 눈빛이 조금씩 바뀌었다. 소문의 그 군신은 사실 그리 무섭기만 한 존재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