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325)화 (324/1,192)

제325화

그녀가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왕야께서 절 내보내셨으면서, 또 제 탓을 하시는군요.”

“…다 내 잘못이오. 내가 미안하오.”

그가 그녀를 꽉 끌어안고 애달프게 말했다.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오. 맹세하오. 그럴 일은 절대 없소. 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내가 제명에 죽지 못할 것이오.”

그가 맹세하듯 그녀에게 말했다. 불길한 소리를 자꾸 들으니,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질책했다.

“그런 말씀은 왜 하시는 거예요. 다 지난 일인걸요.”

“…알겠소. 더는 언급하지 않겠소. 이젠 그대와의 앞날만 생각하겠소.”

그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무슨 일이 있든 언제나 그대와 함께 있을 것이오.”

백천범이 코를 한 번 훌쩍거렸다.

“왕야께서 절 보내실 때 얼마나 괴로우셨는지, 이젠 다 알아요. 그러니 이제는 제게 솔직히 말씀해 주셔야 해요. 그래야 오해하는 일이 없을 거예요. 알겠죠?”

“알겠소. 내 약속하겠소.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소. 뭐든지 그대에게 알려 주겠소.”

결연하게 말하던 그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럼… 그대도 내게 뭐든 다 말해 줄 것이오?”

“그럼요. 전 왕야께 속이는 게 없는걸요.”

“사장풍은 언제 만난 것이오?”

“예?”

백천범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알고 계셨어요?”

묵용감이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묻지 않았으면 영영 말해 주지 않을 생각이었소?”

백천범이 멋쩍게 웃어 보였다.

“사 제독님 얘기를 꺼내면 왕야께서 기분이 안 좋아지실 테니까요…….”

“그대가 말해 주었다면 화가 나지 않았을 것이오. 말을 해 주지 않아 오히려 화가 나오.”

어쩐지 서운해하는 투에, 백천범은 사장풍을 만난 경위를 털어놓았다.

“…수성에 불이 난 날, 지원을 나갔거든요. 그때 사 제독님 구역에 배정되어서… 그래서 마주친 거예요…….”

묵용감은 한참이 지나도 대꾸가 없었다. 그날 밤에 만났다……. 그녀가 그렇게 가까이에 있었는데, 심지어 그녀의 이름도 들었는데 그는 만나지 못하고 사장풍은 그녀를 만났다.

역시나 사장풍의 태도가 달라진 건 백천범을 만난 이후였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대장군이 될 거라더니……. 결국 다 그녀를 가지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지만 사장풍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안 될 일은 안 되는 거였다. 그가 무슨 수를 썼든, 무슨 생각을 했든 백천범은 묵용감의 곁으로 돌아왔으니.

“정말로 별말 안 했어요……. 제가 비밀을 지켜 달라고 부탁했거든요. 사 제독님도 알겠다고 약속한 게 다예요. 약속만 하고 바로 돌아왔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만나지 마시오. 별로 질이 좋은 사람은 아니오.”

“왜요?”

백천범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보였다.

“사 제독님이 엄수의의 목을 가져와서 수성 사람들한테 복수를 해 줬다던데요? 다들 제독님을 영웅이라고 불러요.”

“그대가 어디에 있는지 알면서도 내게 알려 주지 않았소. 그자가 무슨 생각이었겠소?”

묵용감이 차갑게 코웃음을 치더니 욕지거리를 뱉었다.

“음흉한 놈 같으니라고!”

“사 제독님도 군자잖아요. 어쨌든 저와 약속했으니 왕야께 말씀드릴 수 없었겠죠…….”

묵용감이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 그자의 편을 드는 것이오?”

그가 성을 내자 백천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벽에 걸린 새총을 보자기에 담았다. 뒤이어 베개 아래 넣어 둔 표창과 침대 밑에 있던 작은 단지를 꺼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묵용감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는 서둘러 화를 억누르고 넉살 좋게 다가갔다.

“예전에 쓰던 것과 다른 칼인 듯한데, 누가 만들어 준 것이오?”

백천범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묵용감은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덜컥 겁이 났다. 그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천범, 말 좀 해 보시오. 내가 그대에게 뭘 잘못한 것이오? 부디 말해 보시오.”

백천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월규와 월향이가 왕야께서 화를 내시거든 화를 더 돋우지 말라고 했어요. 힘들게 다시 만났는데 상관도 없는 사람 때문에 감정 상할 필요는 없잖아요.”

상관도 없는 사람이라……. 그렇다, 그녀에게 사장풍은 상관도 없는 사람이다. 언짢고 불안했던 기분이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그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가져가야 할 게 있거든 다 가져가시오. 전부 내가 들겠소.”

* * *

마을로 돌아온 사장풍은 묵용감을 맞이하러 가려다 생각을 바꾸었다. 그를 엄습하던 불길한 예감이 점점 사실이 되는 듯했다. 만약 백천범이 마차에서 내린다면 그는… 그는 영영 부서진 마음을 되돌릴 수 없을 터였다. 결국 그는 방향을 틀어 처소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장이 직접 처소로 찾아왔다. 이장은 초왕이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식사 대접을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특별히 사 장군을 불렀으니 반드시 가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줄곧 이장의 안색을 살폈지만 공손한 표정 외에 다른 감정은 읽을 수 없었다.

그가 이장을 슬쩍 떠보려 물었다.

“초왕야만 오셨소?”

이장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또 누가 와야 한다는 의미입니까?”

사장풍이 손을 가벼이 내저었다.

“그저 해 본 말이오.”

이장이 떠난 뒤, 사장풍은 잠시 바람을 쐬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장은 백천범을 알고 있으니 그녀가 초왕과 함께 왔다면 지금도 놀라고 있을 터였다. 설마… 백천범은 오지 않은 걸까. 백천범이 오지 않았다면 초왕 혼자서 왜 이곳을 찾았단 말인가? 마을 사람들에게는 무슨 이유로 식사를 대접하고? 정답을 찾을 수 없는 추측만 그의 머릿속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초왕이 친히 이장을 보내 그를 불렀으니, 아무리 그를 모해하는 자리라 해도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한참이나 꾸물거리던 그는 더는 지체할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발걸음을 옮겼다.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취선루에서 흘러나오는 떠들썩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로 가득 찬 취선루의 내부는 온통 새까만 점이 가득 찍힌 듯했다.

한편 이장은 사장풍이 보이지 않으니 초조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모두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사장풍만 오지 않았다. 난생처음 초왕이 분부한 일을 처리하는 만큼, 조금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됐다. 사장풍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야말로 큰 실책이 아닌가.

사람을 시켜 사장풍을 데려오려는데, 멀리서 느긋하게 걸어오는 그가 보였다.

이장은 재빨리 그에게 손짓했다.

“사 장군님, 드디어 오셨군요. 어서 드시지요. 위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사장풍이 위를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초왕야도 오셨소?”

“사 장군님이 오시면 소인이 모시러 가려고 했습니다.”

이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왕야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사장풍도 그리해야 하는 것쯤은 잘 알았다. 아랫사람들이 다 모인 뒤에 초왕을 모셔야지, 윗사람인 초왕이 그를 기다리다니,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위층으로 올라가자 점원이 그를 별실로 안내했다. 별실에 놓인 커다란 원형 식탁 옆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가 들어오자 여인이 부끄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안녕하십니까, 장군님.”

사장풍은 그녀를 모를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담담히 고개만 끄덕인 후 의자에 앉았다.

여인은 개의치 않는지 재빨리 차를 따라주었다.

“장군님, 차 좀 드시어요.”

사장풍은 조금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보았다. 화려한 옷차림으로 보아 대부호의 규수인 듯한데 차를 따르는 솜씨가 여간 능숙한 게 아니었다.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저는 장군님을 알지만 장군님은 절 모르시지요. 취선루는 저희 아버지의 가게입니다. 아버지께서 성에 계시는 날이 많아, 이곳의 일은 제가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사장풍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취선루의 영애셨군요.”

취선루의 금지옥엽으로 자란 사앵앵은 규방의 여인들과 달리 호탕한 성격이었다. 그녀도 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영애라니요, 어찌 그런 대우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제 이름은 사앵앵입니다. 장군님만 괜찮으시다면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스스럼없는 그녀의 성격은 백천범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호감을 느낀 그는 허물없이 몇 마디 주고받았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백천범이 성으로 잡혀간 이유가 떠올랐다.

백천범은 이 집의 데릴사위 자리를 거부하다 유무전에게 끌려가지 않았던가. 백천범을 쫓아다닌 이가 눈 앞의 여인이었다니! 역시 거리낌 없는 성격에 그와도 죽이 잘 맞는 걸 보면,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점도 이해는 되었다.

어찌 보면 연적이지만, 그는 사앵앵이 그리 싫지 않았다. 조금 우습기도, 걱정이 되기도 했다. 백천범이 여인인 걸 알면 사앵앵은 어떤 기분일까?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가운데 있는 남녀를 극진히 모시고 있었다. 위엄이 넘쳐흐르는 사내는 늠름한 자태를 자랑했고, 여인은 가히 절세 미녀라 할 만큼 청초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사장풍과 사앵앵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일어났다. 두 사람의 시선은 하나같이 백천범의 얼굴에 멈춰 있었다.

사장풍이 백천범과 마주쳤을 땐 밤이었던 데다 불을 끄느라 꾀죄죄한 행색에 남장까지 하고 있어 키 외에 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여인의 옷을 입고 곱게 단장을 하니 그의 숨이 멎을 듯했다. 오랫동안 먼지에 덮였던 옥이 드디어 제 빛깔을 찬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답고 청순한 모습에 두 사람은 말을 잃을 만큼 놀랐다.

사앵앵은 그녀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어딘가 익숙했지만 어디에서 봤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런데도 보면 볼수록 기분이 이상했다. 익숙해도 너무 익숙한 얼굴이 아닌가. 자신이 대체 왜 저 여인을 익숙하게 느끼는 걸까.

의문에 답을 던지듯, 불쑥 떠오른 생각에 사앵앵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저 여인은 전범의 쌍둥이 누이인가……? 아니면… 설마, 전범?

그녀의 얼굴에 점차 핏기가 사라져 갔다. 사앵앵은 입술만 달싹거릴 뿐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 준엄하게 호통쳤다.

“감히 겁도 없이, 왕야와 왕비를 뵙고도 무릎을 꿇지 않느냐!”

두 사람은 멍하니 무릎을 꿇었다. 한 명의 얼굴은 잿빛으로 물들었고 한 명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잔뜩 경직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왕야와…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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