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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24)화 (323/1,192)

제324화

묵용감은 백여름이 백천범을 버리다시피 했으니, 자신이 돌봐 줄 뿐이라고 했다. 그가 보기에는 틀린 말이었다. 이 세상에 믿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만, 단 하나. 혈육의 정만큼은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게 아니던가.

백여름, 그 교활한 놈은 황제와 초왕의 곁에 자신의 딸들을 보냈다. 가장 권력이 막강한 두 사람을 사위로 만들고 그 사악한 야심을 만천하에 드러낸 셈이다.

그는 묵용감이 군대를 일으키면 단숨에 임안성까지 몰아붙이리라 예상했다. 지금 같은 상황은 고려해 본 적도 없었다. 어찌 승산이 높은 전쟁을 도중에 중단할 생각을 할까, 난강을 사이에 두고 황제는 감히 남하하지 못하고 초왕은 이곳에 머무르려고만 하니, 그의 대업은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점점 무거워지는 생각이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결국 발걸음을 멈춘 태자는 저 멀리 나무 아래에 서 있는 황보주아를 발견했다. 마침 그녀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자가 그녀에게 다가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드디어 누각을 나올 마음이 들더냐?”

황보주아는 웃기는커녕 그에게 되물었다.

“태자 오라버니, 셋째 오라버니의 처소에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만나셨습니까?”

태자가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둘 다 처소에 없더구나.”

“어디에 간 것입니까?”

황보주아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어젯밤에 돌아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또 어디를 갔단 말입니까?”

그가 잠시 망설였지만, 곧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비가 살던 곳을 보러 갔다는구나.”

“그래요?”

황보주아가 뜻밖에도 옅은 미소를 지었다.

“셋째 오라버니가 이곳에 남으려 하셨던 이유가 있었군요. 결국 그 백씨 집안 계집을 찾아내고 말았네요.”

태자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초왕비가 돌아왔으니 이제 어찌할 계획이냐?”

황보주아가 옅은 한숨을 뱉어내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공식적으로는 부부인데 제가 어찌하겠습니까?”

“주아야, 우리의 계획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황보주아가 별안간 눈을 치켜떴다.

“태자 오라버니는 계획밖에 모르십니까? 제 생각은 조금도 없으십니까? 애당초 태자 오라버니 때문에 셋째 오라버니와…….”

“주아야.”

태자가 별안간 매섭게 말을 끊었다. 준수한 그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네게 강요하지 않았거늘, 이제는 내 탓을 할 생각이더냐.”

황보주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입술을 들썩이며 몇 차례 웅얼거렸지만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은 태자가 안색을 펴고 온화한 어투로 말했다.

“주아야, 네 마음은 나도 안다. 아직 대업을 이루지 못했으니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가 저 자리에 오르는 날, 네가 원하는 걸 반드시 이뤄 주겠다.”

황보주아가 다시 시선을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간절함만이 선명했다.

“태자 오라버니, 송구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뜻을 이루지도 못했는데 더 힘쓰지는 못할망정 태자 오라버니를 번거롭게 했습니다.”

“네가 번거로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태자가 그녀의 손을 잡고 따뜻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기운 내거라, 주아야. 위수만 치면 곧 임안성이 아니더냐. 우리의 대업을 이룰 날이 머지않았다. 그날이 오면, 반드시 황보 가문의 누명을 벗기고 복권시키겠다. 네 아버지는 호국경護國卿으로, 네 어머니는 특품 고명 부인으로 추서하고 너를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이 되게 해 주마.”

황보주아는 가만히 태자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피부에 가늘고 긴 손가락, 숨을 내쉴 때마저 존귀함이 넘쳐흐른다. 그녀는 줄곧 그가 신기하고도 의아했다. 어찌 이리도 고귀한 자태를 지닌 이가 있을까.

같은 황자여도 대황자는 지극히 평범했다. 삼황자는 과할 정도로 위엄이 넘쳤고, 육황자는 모든 걸 하찮게 대했다.

그녀에게는 태자만이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태생적인 존귀함과 보는 이가 절로 고개를 숙이게 하는 고귀함이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에 매료되었다. 신앙을 가진다면, 이런 형태가 아닐까. 신앙을 바쳐야 한다면, 그가 마땅하지 않을까.

이런 사내야말로 필히 천하를 발아래 두고 군림해야 한다. 그가 세상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이 세상이 잘못 돌아가는 게 틀림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태자의 스승이었다. 늘 최선을 다해 미래의 군왕을 보좌했던 아버지처럼, 그녀도 온 힘을 다해 그의 앞날을 도와야 했다. 그녀는 신과 다름없는 그를 줄곧 우러러보았다. 부친이 완수하지 못한 대업이 그녀의 어깨에 놓였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기꺼이 이 일을 감당했고 큰 보람을 느꼈으니.

그녀가 조심스레 손을 빼내고 결연한 눈빛으로 태자를 바라보았다.

“태자 오라버니, 걱정하지 마시어요. 제가 주저앉는 일은 결단코 없을 거예요. 대업도 아직 이루지 않았고 휴전까지 했는데 초왕비마저 돌아오다니요. 태자 오라버니께서 근심하실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제가 마음을 다잡고 태자 오라버니께 힘을 실어 드리겠습니다.”

“초왕비가 돌아왔으니 네 자리가 더 위태로워진 걸 잘 안다.”

태자가 여전히 온화하게 말했다.

“초왕은 옛정을 잊지 않는 사람이다. 비록 너를 향한 마음이 없다 해도 네가 목숨을 구해 준 일을 잊을 리가 없다. 백천범은 단순한 성격이라 하였으니, 그런 사람과 맞서는 것쯤은 네게 어렵지 않을 테지.

다만, 어찌 되었든 백여름의 딸이다. 초왕을 제 편으로 만들었으니, 나름대로 용한 구석이 있다는 뜻이겠지. 내가 늘 네 뒤에서 돕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이제 돌아왔으니 섣부르게 손을 써서는 안 된다. 한동안은 지켜보다가 정 걸림돌이 되거든… 그땐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황보주아의 손이 흠칫 떨렸다.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 * *

초왕의 의장대는 웅장한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월향과 월규는 비에 젖은 새처럼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공포로 부릅뜬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듯했다.

곧이어 대문을 두드리며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은, 가동의 목소리였다

두 사람은 더욱더 겁에 질렸다. 일급 호위 무사에게 민가의 대문은 종잇장이나 다름없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힘없이 덜걱거렸고, 곧 수많은 병사가 마당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병사들이 두 줄 대열을 이루고 늘어서자, 그 사이로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월향과 월규는 곧바로 바닥에 주저앉아 땅에 이마를 박았다. 입술까지 파르르 떨리는 바람에 차마 용서를 구하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감히 주인을 데리고 도망치다니, 죽어 마땅하다!”

감히 울먹일 엄두도 나지 않아, 두 시녀는 고개를 숙인 채 가까스로 대답했다.

“왕야께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그들도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있다 한들, 각오를 했다 한들 죽음 앞에서 어찌 의연할 수 있을까. 초왕에게 잡혔으니 목숨이 달아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때 가벼운 발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맑고 익숙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왕야, 어쩜 이러실 수 있으세요? 겁주지 않기로 하셨잖아요.”

초왕 앞에 나선 백천범이 서둘러 월향과 월규를 일으켰다.

“무서워하지 마. 왕야께서 장난을 치시는 거야.”

월향과 월규는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흐릿해진 시야에 백천범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덧 사내 분장에 익숙해졌던 두 시녀가 흠칫 놀랐다. 그녀가 입은 옷은 귀한 옷감을 쓴 여인의 옷이었다. 두 시녀는 비로소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린 두 시녀가 백천범을 부둥켜안고 작게 흐느꼈다.

“죽음을 면해 주었는데도 감히 눈물을 보이는 게냐!”

월향과 월규는 서둘러 눈물을 닦아내고 초왕에게 공손히 절을 올렸다.

“소인들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소인들은…….”

“‏되었다. 그만 일어나거라.”

초왕이 담담히 말했다.

“너희가 비록 내게는 불충했어도 왕비에게는 충심을 다했음을 잘 안다. 그 점을 고려하여 더는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짐을 싸거라. 취선루에서 점심을 들고 함께 성으로 가려 한다.”

막상 떠나려니 아쉬웠지만, 월규와 월향은 분부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초왕에게 발각된 이상, 모든 걸 예전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왕비가 초왕의 곁으로 돌아가면 그녀의 시녀인 자신들도 따르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두 시녀는 초왕의 분부대로 방에서 짐을 쌌다.

초왕은 뒷짐을 지고 마당을 둘러보았다. 강남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그마한 집이었다. 바닥에는 푸른 돌이 깔렸고, 나뭇가지를 엮은 울타리가 반듯하게 세워져 있었다. 한쪽에는 다양한 꽃을 심어 아기자기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정원을 한 바퀴 둘러본 그가 방 안으로 향했다. 아내가 반년이나 산 곳이니 직접 둘러봐야 마음이 놓일 듯했다.

백천범과 두 시녀는 백천범의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문 앞에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월향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 왔다.

“왕비 마마, 이건 두고 가시지요. 전부 사내아이의 옷이 아닙니까? 앞으로는 입을 일도 없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월규가 거드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제 왕비 마마로 사셔야지요. 이런 것들을 어디에 쓰신단 말입니까?”

“가지고 있으면 다 쓸 데가 있을 거야…….”

“쓸 데가 있긴.”

묵용감은 불쑥 방으로 들어가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또 도망칠 생각이오?”

초왕이 들어오자 두 시녀는 곧장 방을 나섰다. 초왕이 왕비를 끔찍이 챙기는 만큼, 그녀들은 예전처럼 자리를 비켜 주었다.

백천범은 헤헤 웃으며 들고 있던 옷을 펼쳐 보였다.

“월규가 만들어 줬어요. 몇 번 입지도 않았는데 버리기 아깝잖아요.”

초왕은 그녀가 입었던 옷을 보자 마음이 술렁였다. 저 옷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그녀가 또 떠날 것만 같았다. 그녀는 반년 동안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 어떤 마음을 부둥켜안고 견뎠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깊게 고민하는 법이 없는 그녀가 어찌 그의 마음을 헤아릴까. 그녀를 잃은 후, 그는 한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어떨 땐 내장이 비틀리는 듯한 고통에 한나절이나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리 오시오.”

그가 천천히 두 팔을 벌렸다.

초왕과 사랑을 나누고 난 뒤로 백천범은 가벼운 접촉에도 부끄러움을 느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살포시 안겼다. 백천범은 그의 요대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부끄러움을 삭였다.

“부디 약속해 주시오.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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