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323)화 (322/1,192)

제323화

지난번에는 한통 장군과 조용히 방문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큼직하게 ‘초’ 자가 적힌 황금색 의장기가 높이 솟아 펄럭였다.

소식을 접한 이장이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길목에 서서 초왕을 맞이했다. 장막 틈으로 슬쩍 내다보니 거리를 메운 사람들의 까만 머리만 보였다. 백천범은 이런 허례허식을 싫어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황권보다 초왕의 위세가 드높은 게 사실이므로.

저렇게 많은 사람을 보고 있으니 별안간 긴장감이 밀려왔다. 그녀가 치맛자락을 움켜잡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아무리 함께 지냈다지만, 마을 사람들 앞에서 여인의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인지라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묵용감이 그녀를 보더니 슬쩍 웃었다.

“천하에 무서운 게 없는 초왕비가 부끄러워할 때도 있구려.”

발을 걷어 밖을 바라보던 그는 사장풍의 모습이 없기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에서 기다리시오. 나가서 인사만 하고 오겠소.”

마차가 멈추자 병사가 다가와 발을 걷었다. 이곳 백성들에게 초왕은 군주와 마찬가지였다.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었던 사람들은 마차에서 내리는 그의 신발만 겨우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근래에 명성이 자자한 초왕이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하니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바닥에 이마를 붙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만세를 연거푸 외쳤다.

관례대로라면 직책이 가장 높은 사장풍이 그를 맞이해야 하지만, 그가 없으니 이장이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걸어와 두려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초왕께서 행차하시는 줄도 모르고 미처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왕야.”

“다들 일어나거라.”

백천범을 끔찍이 아끼는 만큼, 그녀와 관련된 곳이라면 어디든 마음에 들었다. 이곳에서 반년이나 지낸 데다 사람들도 그녀에게 잘해 줬다고 하니, 그도 자연스레 사람들에게 눈길이 갔다. 겁을 먹긴 했어도, 다들 선량하고 소박하게 보였다.

초왕의 명에 다들 일어나긴 했지만, 아무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람들은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초왕이 천천히 운을 떼었다.

“취선루의 사 씨가 누구인가?”

자신을 찾는 소리에 사성성은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지난번에 초왕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시중을 드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니 이토록 정확히 기억할 리가 없었다.

그날 초왕은 말수도 적었었다. 표정은 담담했지만 그의 옆에 서 있으면 발밑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온몸이 오싹했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식사를 하는 동안 사성성은 등이 땀으로 흥건해질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 초왕의 목소리는 그날보다 아주 온화하게 들렸다. 사성성이 용기를 쥐어짜 고개를 들어보니 역시나 그때와 다른 표정의 초왕이 서 있었다. 침착한 태도와 외모는 똑같아도, 한결 부드러워진 인상이 봄날의 따스한 오후를 연상케 했다. 그가 앞으로 나아가 입을 열었다.

“왕야께 아룁니다. 소인이 취선루의 사성성입니다.”

“그래. 본왕이 취선루에서 모두에게 점심 식사를 대접하려 하니, 가서 준비하도록.”

그의 말에 여기저기서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 사람 전부에게 식사를 대접한다니, 대체 얼마나 많은 상을 차려야 할까……. 초왕의 씀씀이가 큰 건 둘째 치고, 고귀한 왕이 무슨 이유로 백성들에게 식사를 대접한단 말인가? 사람들은 충격과 막막함에 눈만 끔벅였다.

초왕은 놀란 사람들을 천천히 훑어보다 고개를 돌려 이장을 바라보았다.

“사 장군은?”

“그것이…….”

이장이 얼른 허리를 숙이며 웅얼거렸다.

“소인은 잘 모르옵니다.”

초왕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사 장군을 보거든 취선루에 점심을 먹으러 오라고 전하게.”

이장은 연신 대답을 올렸고 초왕은 취선루에서 보자는 말과 함께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가 다시 마차에 올라타 앞으로 향했다. 이장은 그제야 꿈에서 깨어난 듯 허겁지겁 바닥에 엎드려 예를 갖추었다.

백천범은 바깥의 소리를 들었는지, 묵용감이 들어오자마자 대뜸 물었다.

“왕야, 정말 마을 사람들 전부에게 식사를 대접하시려고요?”

“그렇소.”

묵용감은 마치 그녀의 환심을 사려는 듯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저들은 그대에게 잘해 주었다고 하지 않았소? 식사를 대접해 응당 고마움을 표해야지.”

백천범이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며 헤아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한 번에 이리 많은 돈을 쓰시다뇨. 취선루에서 밥을 먹으려면 한두 푼이 드는 게 아니에요.”

“왜, 싫소?”

묵용감이 그녀를 놀리듯 어깨를 으쓱였다.

“싫으면 관두겠소. 말 한마디면 될 일이니.”

“어떻게 그래요. 군자는 일언이 중천금이라 들었어요. 한 번 내뱉은 말은 절대 주워 담을 수 없잖아요. 왕야는 다른 이도 아니고 초왕이시니, 백성들의 신의를 저버리면 안 되죠. 제가 이곳에서 오랜 시간 신세를 졌으니 왕야께서 식사를 대접하시는 게 옳은 것 같아요.”

그녀가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제가 주인장한테 깎아 달라고 해 볼게요.”

그녀가 이토록 진지하게 헤아리고 셈을 하는 걸 보니 제법 가계를 관리하는 느낌이 들었다. 묵용감은 밀려오는 흡족함을 표현하고 싶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고작 이 정도로 따지지 않아도 되오. 앞으로 집안일은 그대가 관리하시오.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사도 좋소.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쓰시오. 내 모든 것이 곧 그대의 것이오.”

백천범은 활짝 웃더니 또다시 열 손가락을 펼쳐 수를 헤아렸다. 문득 그녀가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깐, 왕야! 지금은 전쟁 중이잖아요. 농촌 별장도 집도 북쪽에 있는데 돈이 어디에 있다는 거예요?”

초왕이 곧 박장대소를 터뜨리더니 그녀의 코끝을 장난스레 꼬집었다.

“내가 활로도 따로 준비하지 않았을까 그러오? 집은 북쪽에 있지만 암암리에 다른 지역에도 마련해 두었소. 황제가 나를 경계하니 나도 황제를 경계해야 하오. 딸린 식구가 있으니 만일에 대비해야지. 사내가 어찌 아내를 굶기겠소?”

백천범은 늘 미리 대비하는 게 좋았다. 비로소 마음을 놓은 그녀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다만 전쟁은……. 줄곧 묻어 두었지만, 더는 미룰 수 없었다.

교전이 있을 때마다 그녀는 불안에 떨곤 했다. 매일 저녁 찻집을 찾아가 사내들이 떠드는 소리를 엿들었고, 혹시라도 안 좋은 소식이 있을까 마음을 졸였다. 휴전 소식과 함께 초왕이 수성에서 잘 지내는 걸 알고 나서야 겨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왕야. 전쟁을 계속하실 거예요?”

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 하실 순 없나요?”

그가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내가 걱정되오?”

“네. 전쟁이 났단 말을 들었을 때 왕야가 걱정돼서 죽는 줄 알았어요. 왕야께서 직접 전장에 나가실까 봐 얼마나 마음 졸였는데요. 화살이며 칼이 언제 어디에서 날아들지도 모르는데, 생각만 해도 무서워요.”

“나는 왕이오. 그리 쉽게 전장에 나가지 않소.”

그가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엎질러진 물이니 어쨌든 결말을 지어야 하오. 다만 이 상태도 나쁘진 않은 듯하니, 휴전 상태로 지낼 수도 있소. 그대는 이곳에서 지내고 싶소?”

“그래도 돼요?”

그녀가 그를 끌어안고 품에 얼굴을 비볐다.

“전 이곳이 너무 좋아요. 경치도 좋고, 사람들도 친절한걸요. 그러니 황제 폐하는 북쪽에, 우리는 남쪽에서 지내요. 서로 방해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어때요, 왕야?”

그가 그녀의 머리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그대의 말대로 하겠소.”

* * *

태자는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적이 없었다. 온갖 수모와 치욕을 참고 와신상담하며 큰 계획을 도모했는데, 초왕비의 말 한마디에 가볍게 무너지고 말았다. 휴전, 남북을 나누어 통치하자는 의미였다.

태자는 묵용감 내외가 늦잠을 잘까 싶어 조금 늦게 찾아왔다. 정작 초왕의 처소는 쥐 죽은 듯 적막했다. 보초에게 물어보니 초왕비와 함께 나갔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왕비가 살던 곳을 보기 위함이었다.

태자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어젯밤에 밀서를 받은 게 아니었던가? 중요한 일을 두고 왕비와 함께 금의환향하러 갔다니, 큰일을 한다는 사람이 일의 경중도 구분하지 못한단 말인가?

빈 처소 앞에서 기다릴 수도 없던 터라 태자는 이내 발길을 돌렸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백천범이 초왕에게 시집을 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생각했다. 백여름의 딸이니 초왕의 곁에서 어찌 무사할 수 있을까. 목숨을 잃거나, 내쫓기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초왕과 백여름의 사이를 아는 이라면 그리 생각하는 게 당연할 수밖에.

그러나 상황은 그가 예상치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묵용감은 백천범을 죽이지 않았을뿐더러 내쫓지도 않았다. 오히려 둘은 제법 사이가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묵용감의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속은 형편없이 여린 사람이 아니던가. 함께 지낸 시간이 길어지니 차마 내치지 못하고 있을 테지. 그러나 백여름의 딸이 초왕의 곁에 있으면 언젠가 사달이 날 터였다.

묵용감이 손을 쓰지 못하면 그가 대신하는 게 옳았다. 칠석 밤, 그녀를 암살하려는 무리를 보내 두었다. 백천범을 죽이는 게 첫 번째 목표였고 묵용감의 속내를 떠보는 게 그다음이었다. 결국 첫 번째 목표는 실패했고, 묵용감의 태도도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으면 변하기도 하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그는 더 나서지 않고 임안성에서 흔적을 감춘 뒤 다음 일을 계획했다.

때가 되었을 때, 황보주아는 묵용감 곁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그는 황보주아를 생각해 백천범부터 없애고 싶었지만, 그가 손을 쓰기도 전에 묵용감이 그녀를 저택에서 내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흔적도 없이 멀리 도망쳐 버렸다.

그녀가 사라진 뒤, 그는 묵용감의 마음을 더 알게 되었다. 황보주아를 위해 백천범을 내보낼 만큼 관심이 사그라든 줄 알았건만, 백천범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한 날부터 묵용감은 급격히 말수가 줄었다. 그러다 황제가 백천범을 잡아들였다는 말을 듣자마자 군대를 일으키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묵용감에게 백천범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깨달은 태자는 암암리에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를 찾아낸 사람은 그도 묵용감도 아니었다. 그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직접 돌아오지 않았는가. 태자의 마음에 의심의 싹이 움틀 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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