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322)화 (321/1,192)

제322화

백천범은 자신의 몸에 생긴 푸르스름한 흔적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원망스럽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이것 좀 보세요. 힘 조절도 못 하시고, 정말.”

그녀를 놀릴 생각이었지만 자신이 남긴 흔적을 마주하니 괜스레 마음이 들떴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멍을 어루만졌다.

“내가 문질러 주겠소.”

그는 가볍게 그녀의 멍 자국을 쓸어내렸다. 백천범은 가만히 있는데 점점 묵용감의 몸에 열기가 돌았다. 그가 황급히 그녀를 내려놓았다.

“역시 시녀들을 부르는 게 낫겠소.”

이미 코피까지 쏟는 모습을 보였으니, 더는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더한 모습을 보였다간 그의 위엄이 땅속으로 파고들 터였다.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는데 백천범이 그를 불러세웠다.

“왕야, 오수진에 다녀올게요. 언니들이 절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

묵용감이 못마땅한 어조로 답했다.

“사람을 보내면 될 일이 아니오?”

“안 돼요. 사람을 보냈다간 괜히 놀라게 할 거라고요.”

묵용감이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소. 내가 데려다주겠소.”

“왕야께서는 공무로 바쁘시니 저만 다녀오면 돼요.”

별안간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겨우 다시 만났는데, 또 날 뿌리칠 생각이오? 절대 안 되오. 그렇게 둘 수 없소. 앞으로 그대가 가는 곳은 어디든 따라갈 것이오.”

그는 성난 모습으로 방을 나가 버렸다.

백천범은 의아하기만 했다. 애당초 그가 그녀를 내쳤으면서, 대체 누구에게 원망을 늘어놓는단 말인가?

* * *

관청 맞은편 찻집에서 한참 동안 차를 마시던 사장풍은 마침내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재빨리 그에게 달려간 사장풍은 우연히 만난 척 반가워하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사실은 친분이라고 할 것도 없이 얼굴만 아는 사람이었다. 관청 서기인 여동餘同으로, 불이 났던 날 밤 사장풍에게 지시를 받던 사람이었다. 사장풍이 반색을 하며 그에게 인사를 건네니 여동은 자연스레 기분이 좋아져 묻는 족족 대답해 주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성의 치안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장풍이 그에게 슬쩍 운을 떼었다.

“전투를 할 땐 평소보다 혼란스러울 테니 옥사가 죄인들로 가득 찼겠소?”

여동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사실 정반대입니다. 성이 함락된 날 다들 도망치는 바람에 옥사가 텅텅 비어 있었지요. 그 후로 초왕야께서 잘 돌봐 주시니, 다들 편안하게 지내는 터라 못된 짓을 하려는 자들도 없습니다.

게다가 초왕야께서 수성에 머무시는데 누가 감히 법을 어기겠습니까? 죽음을 자초하는 짓이나 다름없지요. 지금은 죄인이 아무도 없어 옥사가 텅텅 비었습니다.”

“아무도 없다?”

깜짝 놀란 사장풍이 물었다.

“근래에도 들어온 이가 없단 말이오?”

“없습니다. 순포들도 성 서쪽의 재건을 도우러 갔을 정도지요. 관청이 텅 빈 상태입니다.”

사장풍은 미간을 찌푸렸다. 백천범을 이곳으로 보낸 게 아니라면, 대체 어디로 보냈단 말인가……. 절로 눈앞이 아찔했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그는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 말을 몰아 급히 달려갔다. 덩그러니 남겨진 유동은 영문을 알 수가 없어 가만히 서 있었다.

관청에서 공무를 보지 않는다면 유무전이 백천범을 데려갈 곳은 부윤 관저밖에 없었다. 태자가 정무를 돌보고 있으니, 그에게 데려갔을 가능성이 크다. 말을 타고 곧장 부윤 관저로 향하며, 그는 백천범이 제발 초왕에게 발견되지 않았기만 바라고 또 바랐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관저에서 나온 한 무리의 말과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성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그들을 살폈다. 개중 유독 눈길을 끄는 마차가 보였다. 마차는 은색 지붕에 황금색 덮개를 씌우고 붉은 장막을 사방에 늘어뜨려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가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압도적으로 컸으니, 한눈에 봐도 초왕이 타는 마차가 분명했다. 마차 주변을 지키듯 말을 몰고 있는 가동과 영구를 보니, 초왕이 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반년 동안 초왕의 곁에 있었던 만큼, 그는 초왕에 대해 제법 많은 것들을 알아내었다. 일단, 초왕은 절대 마차를 타지 않는 사람이다. 더군다나 떠들썩하게 무리를 지어 외출하는 일도 없었다. 평소에는 조용히 다니던 그가 어찌 이리 소란스럽게 길을 나선단 말인가?

그는 찜찜함을 떨쳐 낼 수 없어 몰래 뒤따라가기로 했다.

* * *

넓은 마차 안, 묵용감은 백천범을 품에 안은 채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 내 탓이오. 그렇게 여러 번 그대의 이름을 들었건만, 신경도 쓰지 않았소. 전범, 천범. 그대가 사내아이 분장을 하고 있을 줄이야.”

백천범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제가 생각해 낸 방법이에요. 집에 여인밖에 없으면 혹여 누가 못된 마음을 먹을지도 모르잖아요. 저는 사부님한테서 무술을 배웠으니 남장을 하면 두 언니를 지켜줄 수도 있고요.”

묵용감이 그녀의 손을 펼쳐 손바닥에 생긴 굳은살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상냥한 손길과 달리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희미한 분노가 묻어났다.

“언니라니, 그저 시녀에 불과하오. 왕비를 데리고 도망쳤을 때부터 죽을죄를 지었소. 게다가 그대를 잘 보살피기는커녕 그대가 그 애들을 먹여 살렸으니 목을 열 번 내리쳐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오…….”

백천범이 곧장 자세를 고쳐 앉더니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월규와 월향이 절 얼마나 잘 돌봐 줬는데요. 보세요, 전 키도 컸고 건강해요. 고작 굳은살이 대수예요? 제 살길을 찾아 먹고사는 게 나쁜 일도 아니고.

왕야, 월규는 종일 수를 놓느라 손가락이 전부 상처투성이예요. 눈도 흐릿해지면서 하루도 쉰 적이 없어요. 월향은 간식을 만드느라 손에 물기가 마르지 않았고요. 게다가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청소까지 해 줬다고요.

저는 물고기만 잡은걸요. 물고기를 잡아 오면 둘이서 오밤중까지 깨끗하게 손질하고, 낮이 되면 볕에 말리느라 바빴어요. 다 마르면 전 시장에 팔기만 했고요. 늘 밖에 있어도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개울가에서 물고기를 잡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그리고 희락이도 절 도와줬어요…….”

묵용감이 별안간 미간을 찌푸렸다.

“희락이가 누구요?”

“동네 꼬마예요. 집 맞은편에 사는 앤데 매일 저랑 같이 다니는…….”

“사내아이?”

“네, 꼬마 아이예요.”

그가 손을 힘껏 움켜쥐더니 위협적인 웃음을 흘렸다.

“매일 함께 다녔다? 그대에게 마음이 있는 게 아니오?”

그녀가 서둘러 손을 빼내더니 고개를 휘휘 저었다.

“말도 안 돼요. 희락이는 절 동네 형으로 대한단 말이에요. 제게 마음이 있는 건 정작 사 씨네 아가씨예요. 얼마나 쫓아다니는지, 정말 성가셔서…….”

묵용감이 퉁명스럽게 끼어들었다.

“여인이 그대에게 마음이 있다?”

“왕야, 자꾸 말 좀 끊지 마세요! 제가 사내 분장을 하고 있었으니 반했나 봐요. 실은 앵앵이네 아빠가 나빠요. 절 데릴사위로 데려오려고 계략까지 써서 괴롭…….”

“그대를 데릴사위로 데려오려 했다?”

초왕이 눈을 부릅뜨더니 낮게 고함을 쳤다.

“이런 죽일 놈을 보았나!”

“왕야, 대체 말을 하라는 거예요, 말라는 거예요!”

백천범이 짜증이 난 듯 그를 노려보다 말을 이었다.

“아무튼, 끝까지 들어 보세요. 제가 사 씨네 가게에 수산물을 팔았거든요. 활어로요. 그렇게 싱싱했는데, 하룻밤 사이에 반이 넘게 죽었지 뭐예요? 제가 그런 걸 속일 사람도 아닌데…….

왕야도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시잖아요. 저는 돈을 받았으니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사 씨가 유 장군을 불러와서 저를 겁주잖아요. 그것만 아니었으면 한밤중에 성으로 올 일도 없었는데…….”

묵용감이 그녀의 코끝을 살짝 건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잘된 일이군. 듣자니 사앵앵이라는 아가씨의 공이 크구려. 본왕이 상을 내려야겠소.”

백천범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왕야, 제 말 들으신 거 맞아요? 사 씨가 절 겁주고 괴롭혔다고요.”

“그 일은 그 일이고, 이 일은 이 일이오. 그자가 그리하지 않았다면 그대를 만나지 못했을 게 아니오.”

묵용감이 다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걱정하지 마시오. 벌도 내리고 상도 주겠소. 본왕도 정도를 지키는 사람이오.”

“사실…….”

백천범이 그의 가슴을 가볍게 긁었다.

“사 씨도 딸을 워낙 아껴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 벌은 내리지 않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제게 잘해 줬거든요. 특히 저희 가게에 세 들어 있는 전 씨요. 돈 없이 쌀을 사러 가도 언제나 외상으로…….”

묵용감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그대에게 가게도 있소?”

“그럼요.”

백천범이 어깨를 쭉 펴고 말을 늘어놓았다.

“나름대로 가업이 있었어요. 집도, 가게도 있고, 수입도 있으니 거리를 떠돌며 굶는 일은 없었죠.”

그는 여간 흥미로운지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무슨 돈으로 그리 가업을 이루었소?”

“…헤헤, 별장에서 나올 때 왕야의 청자 편병을 오천 냥에 팔았거든요.”

묵용감이 픽 웃고는 그녀의 손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녀가 대견스러웠다. 그는 줄곧 그녀가 이렇게 지냈으리라 생각했다. 어디에 있든, 환경이 얼마나 열악하든, 그녀라면 항상 꿋꿋하게 맞서 싸우며 잘 지내리라 믿었다.

“또 무슨 일이 있었소? 더 말해 주시오.”

그는 자신이 모르는 그녀의 이야기와 그가 놓쳤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싶었다. 늦었더라도 이렇게나마 그녀가 없던 시간을 조금씩 메우길 원했다. 백천범이 낭랑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자, 그는 더없이 편안한 표정으로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 *

성문을 나선 사장풍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이 요동치는 듯했다. 이 길은 오수진으로 가는 길이었다. 어째서 초왕이 오수진에 간단 말인가? 더군다나 이리 대대적으로 갈 일이 있었던가?

설마……. 그가 마차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대체 저 안에 누가 타고 있을까. 한 명? …아니면 두 명?

몇 가지 생각이 그의 뇌리를 빠르게 스쳤다. 백천범이 마을에 있다는 사실을 초왕이 알았다면 이처럼 떠들썩하게 그녀를 데리러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백천범은 어젯밤 성에 들어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저 마차 안에는…….

그는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사장풍은 조용히 지름길로 방향을 꺾은 후 마을을 향해 질주했다. 그는 오수진의 독군이니, 초왕이 행차하는 만큼 응당 그가 직접 맞이할 의무가 있다. 이런 때일 수록 초왕에게 그의 약점을 잡힐 순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