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1화
월향은 이장의 눈치가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가뜩이나 담이 작은 탓에 월향은 입술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월규가 아무리 시치미를 뗀다고 해도, 이장은 월향의 표정만 보고 있으니 믿지 않는 티가 역력했다. 그녀가 월규를 힐끔거렸다.
월규는 초왕의 저택 출신이다. 아무리 그래도 체면이 있지, 어찌 한낱 이장에게 겁을 먹을까!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서쪽에서 왔습니다. 못 믿으시겠다니 어쩔 수 없지요. 저도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 장군과 범이는 아주 각별한 사이입니다. 사 장군이 있는 한 그 누구도 저희를 업신여기지 못하겠지요.”
사장풍이 그들의 뒷배가 되리라는 의미다. 장군이라는 칭호가 얼마나 무거운지, 이장이 모를 리가 없다.
이장은 세상 물정에 훤한 사람이었기에 월규의 말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한낱 작은 마을의 이장이 어찌 장군에게 맞설까. 차라리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가 곧장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오해는 말게, 규 아가씨. 어쨌든 우린 한식구가 아닌가. 내가 설마 자네들에게 해가 되는 짓을 할까. 다만 사실을 알고 있어야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대비를 할 게 아닌가?”
월규가 냉랭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 장군이 오셨으니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요.”
이장이 황급히 월향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미 끝난 얘기를 어찌 무를 수 있단 말인가.”
월향이 월규에게 눈을 한번 부릅뜨더니 서둘러 이장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허튼소리입니다. 제 일은 제가 책임질 수 있습니다.”
이장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양보전의 혼사 때문에 얼마나 오랫동안 속앓이를 했던가. 마침내 혼담이 오갔는데 도중에 엎어질 수는 없었다.
한편, 성문을 향해 질주하던 사장풍은 막 열린 성문을 뚫고 내달렸다. 어찌나 빨리 달리던지, 성문을 지키던 보초들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지도 못했다. 아연실색한 보초병들이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
“게 섰거라, 말에서 내려 검문을 받거라!”
아무도 사장풍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와중에, 눈썰미가 좋았던 누군가가 다급히 소리쳤다.
“멈춰! 사 장군님이시다. 급보를 전하러 오셨나 봐!”
사장풍이 엄수의의 목을 가져온 후로 병사들 중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뛰어난 장수인 데다 초왕의 신임까지 받고 있으니 사병들에게는 아득하게 높은 존재였다. 사장풍이라는 말에 보초병들은 말을 멈춰 세우고 더 이상 뒤쫓지 않았다.
한달음에 성으로 왔지만 부윤 관저의 주홍색 대문을 보는 순간, 사장풍은 자신이 너무 충동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서둘러 고삐를 당기고 말을 멈춰 세웠다.
안 그래도 초왕이 그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리 요란스레 성을 찾아왔으니 초왕도 소식을 듣게 될 터였다. 초왕은 여우같이 교활하고 치밀한 자가 아닌가. 초왕이 실마리를 찾도록 행동해서는 안 된다. 그는 더욱더 신중하고, 치밀해져야 했다.
사장풍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월규의 말대로 유무전이 백천범의 죄를 물으려 했다면, 부윤 관저가 아니라 순포 관청으로 데려가는 게 옳다. 그는 감정을 숨기고, 아무도 모르게 백천범을 구해 와야 한다.
그는 일단 죽을 파는 가게를 찾아가 느긋하게 아침을 먹었다. 그리곤 말을 끌고 막 떠오른 햇살 아래 유유히 거리를 거닐었다. 자신을 따라오는 이가 없다는 사실을 두세 번이나 확인한 후, 그가 조심스럽게 순포 관청으로 방향을 틀었다.
* * *
봄날의 밤은 한낮의 꿈처럼 짧았기에,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처소는 바람 한 점 들지 않은 듯 고요했다. 초왕과 초왕비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니 가동과 영구가 반월문을 지키며 모든 소란을 막았다.
그러는 내내 가동은 자꾸만 바보 같은 웃음을 흘렸다. 참다못한 영구가 그를 흘겨보았다.
“아침부터 뭘 잘못 드셨습니까?”
“네가 잘못 먹었겠지.”
가동이 웃으며 영구를 꾸짖었다.
“난 왕야를 대신해 기뻐하는 거야. 왕비 마마께서 돌아오셨으니 이제 녹하의 얼굴도 활짝 피겠지. 그럼 나도 좋은 날이 올 거라고.”
가동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간 녹하는 틈만 나면 황보주아에게 맞서지 않았던가. 초왕은 대부분 넘어가 주었지만 가끔 짜증을 내며 녹하를 혼내곤 했다. 혼이 난 녹하가 그 화를 어디에 풀었겠는가.
가동이 히죽거리더니 영구에게 바짝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영구야, 네가 볼 땐 두 분이 초야를 치르신 것 같아?”
영구가 눈빛으로 그를 힐난했다.
“상전의 일에 어찌 그리 관심이 많으십니까?”
“그냥 물어보는 거지.”
가동이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랬다면 나도 곧 날을 잡게 될 테니까. 녹하도 더는 핑계 댈 게 없거든.”
때마침 녹하가 문 앞에서 고개를 내밀고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먼 거리였지만 가동이 손을 흔들며 그녀에게 환하게 웃었다. 녹하도 기분이 좋았는지 아리따운 미소로 화답했다.
“봤지, 우리 아내 얼굴이 활짝 폈다고.”
가동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 날을 잡고 말겠어.”
그가 영구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너야말로 기홍 아가씨랑 어떻게 돼 가? 입은 맞춰 봤어?”
영구가 묵묵히 허리춤에 맨 칼집을 붙잡았다.
가동이 히죽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알았어. 안 물어볼게, 안 물어보면 되잖아.”
* * *
묵용감은 팔이 저리다 못해 마비될 지경이었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품에 안고 있는 여인이 깨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마음에 기쁨이 만개했다. 이 순간이 꿈은 아닌지, 그녀가 정말 돌아온 게 맞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는 나른한 고양이처럼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키도 컸지만 이목구비도 제법 달라졌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처음 만났을 때의 아이처럼 보였지만,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은 탓에 그녀의 백옥처럼 하얀 턱만 보였다.
한쪽 손은 그의 허리 위에, 다른 한쪽 손은 몸 옆에 내려놓은 채 다리는 쩍 벌리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고상한 자태가 아니지만 그는 그녀의 이 모습을 사랑했다. 마음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부족할 만큼 사랑스러웠다.
끝없이 숨을 불어넣는 괴수가 몸 안에 들어앉은 듯 까닭 없이 환희와 힘이 넘쳐흘렀다. 그는 결국 고개를 숙여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그녀가 칭얼거리더니 몸을 돌아누웠다.
그의 팔이 마침내 해방되었다. 그는 조심스레 팔을 빼 가볍게 털었다.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그녀가 고개를 돌리더니 반쯤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듯 멍한 표정이다.
별안간 두려움이 밀려 왔다. 그는 두려움을 억누르려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천범, 나요.”
백천범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을 깜박이더니, 곧 눈을 감았다. 다시 잠을 청하려는 모양이다. 묵용감은 괜스레 목이 탔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녀를 다시 만난 후로 모든 게 혼란스러웠으니, 다른 걸 생각할 틈이 없었다. 기괴한 꿈을 꾸었다가 깨어난 것만 같았다.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를 대하는 이 태도는 또 무엇이고? 그는 이제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했다. 여인이 몸을 맡기면 평생 상대만 바라본다는 말을 대체 누가 했단 말인가? 그가 보기에 이 말은 입장을 바꾸어야 이치에 맞았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로 그녀를 잃을까 노심초사하고 상대의 눈치를 보는 쪽은 그였다.
한참 뒤, 백천범이 눈을 감은 채 물었다.
“…몇 시나 되었어요?”
묵용감이 창밖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진시쯤 된 것 같소.”
마침내 그녀가 힘겹게 눈을 떴다.
“벌써요?”
몇 번 눈을 깜박이던 그녀는 별안간 깨달은 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큰일이다, 큰일이야! 외박을 했으니 엄청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
묵용감도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정말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이런 식일 줄은 몰랐지만…….
그가 멍하니 앉아 있자 백천범이 급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
“어서 일어나세요.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요. 엥, 왕야… 왜 코피가 나신 거예요? 고개 좀 들어 보세요.”
묵용감의 팔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이 각도는…….
“코피가 왜 이렇게 많이 나지?”
그녀는 서둘러 묵용감 옆에 웅크려 앉더니, 근처에 놓인 수건으로 그의 코를 막았다.
묵용감은 힘겹게 마른침을 삼키고 이불을 끌어와 그녀를 감쌌다. 장막 안이 어둡긴 해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녀의 곡선은 너무나 훤히 눈에 들어왔다. 더한 일도 한 사이였으니 별일 아니었지만, 시각적인 충격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어 그 자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코피뿐만 아니라 몸에 난 구멍이란 구멍에서 다 피를 흘릴 것만 같았다. 천군만마를 이길 순 있어도 이 어린 여인 한 명은 절대 이길 수 없었다. 그 무엇보다 위력이 강한 그녀라는 존재가 늘 그를 놀라게 하고, 충격에 빠트렸다.
그는 그녀를 이불로 감싼 뒤 침대 밖으로 내려왔다. 이런 모습으로 시녀들을 들이기도 난감했으니, 직접 옷을 갖춰 입고 탁자에 놓인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마셨다. 마음을 잠시 가라앉히고 장막 안으로 들어간 그가 따스한 목소리로 물었다.
“천범, 이제 일어날 것이오?”
그때 백천범은 이불 속에 웅크리고 누워 묵묵부답이었다.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터였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그녀는 차마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묵용감이 억지로 이불을 젖혔다. 그녀의 몸이 또다시 이불 밖으로 드러났다. 그녀는 아예 베개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결국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도 부끄럽소? 우린 부부가 아니오.”
백천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체면을 따지자면 내 코피가 더하지 않겠소? 하마터면 피범벅이 되어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
미소를 머금었던 그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천범, 언젠가 나는 그대 손에 죽을지도 모르겠소.”
백천범이 화들짝 놀라 그를 나무랐다.
“아침부터 불길하게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떡해요. 어서 침 뱉고 다시 말씀하세요.”
묵용감은 이미 백천범의 말이라면 죽은 척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얼른 그녀의 말대로 침 뱉는 시늉을 했다.
“그대와 백 살까지 살아야 하니 이제 그런 말은 하지 않겠소.”
“그 정도면 요괴가 되지 않을까요?”
침대 옆에 앉아 그녀를 끌어안은 그가 아이를 달래듯 몸을 천천히 흔들거렸다.
“천범, 이 남편이 그대의 옷시중을 들겠소.”
장난기가 가득한 그의 미소에 그녀가 의심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나쁜 마음을 품고 있으신 것 같은데요.”
묵용감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새하얀 어깨에 힘껏 입을 맞췄다.
“그대에게 나쁜 마음을 품을 일은 평생 없을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