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0화
그녀와 나누는 사랑은 그런 느낌이었다. 강렬하고, 황홀하고, 오직 앞만을 보며 달려가는 기분. 그 종착점에 헤어나올 수 없는 늪이 있어, 비록 잠겨 죽을지라도 멈출 수 없었다.
간절하게 원하던 일을 이루었지만, 그 달콤함을 누리는 대가로 그는 자제력을 잃었다. 그는 그녀를 이토록 원하게 될 줄은 생각도 해 보지 못했다. 그녀는 마른 입술을 축이는 한 모금의 달콤한 물이었고, 얼어붙은 손발을 따스하게 녹이는 불과 같았다.
그녀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그의 나락에 유일하게 뻗어온 손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싶었다.
그는 숨을 가다듬고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렸다.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지만, 그는 아직도 지치지 않았다. 언제든 그녀의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천범.”
그가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
“내 보배, 천범…….”
그녀가 눈을 감은 채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그의 얼굴에 턱을 붙이고 가녀린 숨을 몰아쉬었다.
“…힘들어요, 왕야.”
“알겠소. 그대는 잠시 쉬시오.”
백천범은 그를 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가 보고 들어 왔던 이야기와 너무나도 동떨어진 일들이 펼쳐지지 않았던가. 이토록 오랜 시간이 흐르다니……. 그녀는 한껏 구겨져 공중에 떠오르고, 다시 인간의 형상을 갖출 수 있게끔 박박 문질러지는 기분이었다.
모든 게 흐릿하기만 했다. 묵용감의 격정은 범람하는 강과 같았다. 그녀는 그 안에서 떠내려가다가 이따금 한없이 가라앉았고, 간신히 빠져나와 가쁜 숨을 몰아쉬기도 했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물 안에서, 그녀는 더없이 가냘프게 표류하고 있었다.
그녀 또한 처음 겪는 일이 아닌가. 묵용감은 자신만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땀범벅이 된 그녀의 살결을 쓰다듬으며 얼굴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괜찮소?”
“…네.”
대답과 달리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몸을 맡긴 채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묵용감이 직접 물을 떠 와 그녀의 몸을 닦아 주었다. 혹여 그녀를 다치게 했을까 뒤늦은 걱정이 밀려 왔다. 등불을 비추어 그녀를 자세히 살피던 그는 자신을 세차게 때려 주고 싶었다. 그가 아무 말 없이 연고를 찾아 그녀에게 발라 주었다.
부끄러움이 밀려온 탓에 백천범은 다리를 오므리며 웅얼거렸다.
“괜찮아요.”
그가 웃으며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빨리 나아야 또 하지 않겠소.”
백천범은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누웠다. 묵용감은 그녀를 따라 침대에 누워 그녀의 등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작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등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한참 후, 목욕을 마친 그가 침의를 입고 그녀를 안은 채 조용히 몸을 뉘었다.
창밖으로 희뿌연 빛이 번지고 있었다. 그는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지만, 정신은 여느 때보다 맑았다. 그는 시선을 내려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짙은 그녀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며 눈꺼풀에 옅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녀도 깨어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마저 아프도록 사랑스러웠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천범, 못 본 사이 예뻐졌소.”
백천범이 코웃음을 쳤다. 이런 상황에서 적절치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황보 아가씨보다 예뻐요?”
순간, 묵용감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황보주아 이야기를 꺼낸 이상, 그녀는 솟구치는 화를 참을 수 없어 그의 손을 힘껏 꼬집었다.
“일어나세요. 그만 가야겠어요.”
묵용감은 황급히 두 손으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녀가 또다시 도망칠까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부모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는 어린아이처럼 간절하게 매달리며 입을 열었다.
“어딜 간단 말이오. 내가 있는 곳이 그대가 있을 곳이잖소.”
“듣기 좋은 말씀을 하시네요, 지금은. 저는 왕야께서 또 언제 절 내치실지 두려운걸요.”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이토록 불안하고, 외롭게 만들었다. 그는 사죄하듯 깊은 입맞춤을 하며 속삭였다.
“맹세하오.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오. 어딜 가든 늘 그대와 함께하겠소, 천범.”
그가 그녀의 귓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미안하오. 전부 내 잘못이오. 내가 어리석었소.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그자들이 그대에게 손대지 못할 줄 알았소. 하지만… 그로 인해 그대가 나를 떠날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소. 내 생각이 너무나 짧았던 탓이오.”
백천범이 몸을 돌아누웠다. 두 눈동자가 어느새 놀라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자들이라뇨, 왕야. 그자들이 누구인데요?”
“지금은 알지 않아도 되오. 그저 내가 은애하는 사람은 황보주아가 아니라 오직 그대라는 걸 알아주시오. 주아는 옛 친구이자 책임을 다해야 하는 사람일 뿐이오. 예전에는 연정이 무엇인지 잘 몰랐소. 그저 서로 미워하지 않고 존중하는 게 연정의 전부라고 생각했소.
그대를 만난 뒤로, 진정한 연정을 알게 되었소. 나와 주아는 허물없이 지낸 소꿉친구일 뿐이오. 주아가 내게 시집을 올 거란 걸 알고 있었으니 그 애를 좋아하려 했던 것이오. …내가 틀렸소. 주아를 향한 마음은 은애가 아니오. 내가 진정 은애하는 사람은… 그대뿐이오. 천범, 이번 생은 오직 그대 한 사람뿐이오. 맹세하오.”
묵용감이 이토록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는 일은 처음이었다. 백천범은 한동안 입술만 달싹이다, 그를 끌어안고 자신의 속마음도 털어놓았다.
“왕야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밤마다 울어서 눈이 퉁퉁 붓곤 했죠. 몇 번이나 대문을 뛰쳐나갔는지 몰라요. 왕야가 너무나도 그리워서, 왕야를… 찾아가려고…….”
“어째서 오지 않은 것이오?”
“절 문전 박대하실까 봐 무서웠어요. 그리고…….”
그녀가 부끄럽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몰래 도망쳤으니 왕야의 얼굴에 먹칠을 한 거잖아요. 쉽게 용서하지 않으실 거라 생각했어요.”
묵용감의 손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다.
“그렇소. 쉽게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긴 하지…….”
백천범이 그의 손을 찰싹 때렸다.
“연고를 발랐잖아요. 손 떼세요.”
* * *
그날은 잠을 설치는 이가 많았다.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 태자와 황보주아,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난 초왕과 왕비, 오수진에서 내내 가슴을 졸이는 월향과 월규까지.
두 시녀는 백천범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지만, 새벽이 되어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유무전 또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불길한 상상만이 피어올라, 두 사람은 어쩔 줄을 몰랐다. 성안으로 가려고 했지만 이장이 그들을 붙잡았다. 성문이 닫혀 있는 지금은 가도 소용없지 않은가. 결국 그들은 아침을 기다리며 방법을 궁리했다.
정작 아침이 되자, 마차를 빌려 성으로 가려던 계획은 시도하지도 못했다. 이미 기간을 채운 탓에 유무전 대신 다른 장군이 마을을 찾아왔다. 짙은 눈매에 기개가 넘치는 얼굴이 유무전보다 한층 위엄을 드러내었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예상치 못했기에 의장은 다소 의아하게 여겼다. 아무리 오지진과 가깝다 한들 지금 도착하려면 날이 밝기도 전에 말을 몰고 쉼 없이 달려와야 했다. 한 달 전, 유 장군이 점심 때쯤 온 것과 달리 사 장군은 너무 일찍 도착했다. 설마 함께 아침을 먹을 생각이었을까?
가뜩이나 전범의 일로 마음이 조급했던 터라, 이장은 사장풍을 홀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월규와 월향은 아무리 기다려도 이장이 오지 않으니 직접 그의 집을 찾았다. 갑옷을 입은 누군가가 대청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여, 두 시녀는 그가 유무전인 줄 알고 한달음에 뛰어갔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니 유무전이 아니라, 기개 넘치는 젊은 장수였다.
사장풍은 한눈에 월규를 알아보았다. 하얗게 질린 그녀의 안색을 마주하자 그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불길한 예감이 심장을 마구 내려치는 듯했다.
“이곳엔 어찌……. 그… 는……?”
월규는 그의 말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평소라면 신분이 들통날까 주저했겠지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이다. 그녀가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제독 나리, 어서 그… 애 좀 구해 주십시오.”
예상대로가 아닌가. 사장풍이 서둘러 그녀를 일으켰다.
“말해 보시오, 어서! 무슨 일이오?”
월향은 사장풍을 처음 봤지만, 월규의 말에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화들짝 놀라 입을 가렸다.
마침 안으로 들어온 이장이 그들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사 장군과 전씨 집안 아가씨들이 아는 사이로 보이지 않는가. 상황을 보니 사 장군에게 전범을 구해 달라고 하는 듯했다.
월규는 서둘러 사장풍에게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이장이 지켜보고 있으니 백천범의 정체가 탄로 나지 않게 모호한 말을 썼지만, 사장풍은 정확히 알아들었다. 그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며 눈가에 짙은 분노가 어렸다.
유무전이 음흉한 구석이 있다지만 이리 중요한 순간에 일을 그르칠 줄이야. 당장 유무전을 찾아 실컷 두들겨 패야만 속이 풀릴 듯했다.
백천범을 수성에 데려가 옥에 가두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가 가서 풀어주면 수습할 수 있으므로. 그러나 그전에 초왕과 마주친다면……? 그간의 노력과 고생이 모두 헛수고가 되고 만다.
“내가 갈 테니 이곳에서 기다리시오.”
사장풍이 월규와 월향에게 나직이 말했다.
“사람이 많으면 들통 나기 쉽소.”
절박하다 못해 넋이 나갈 지경인 월규와 월향은, 백천범을 구해 주면 무엇이든 하겠다며 애원했다. 사장풍은 더는 지체하지 않고 말에 올라 수성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워낙 다급했던 만큼, 세 사람은 이장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듯했다. 사장풍이 떠나자 이장이 작게 헛기침을 해 그의 존재를 일깨웠다.
“사 장군과 아는 사이였나?”
월규가 애써 침착하게 답했다.
“예, 알고 있었습니다.”
“제독 나리라고 하는 걸 보니 사 장군은 구문제독 출신인가 보군.”
“예.”
“서쪽에서 왔다더니, 도성에서 왔는가?”
흠칫 놀란 월규가 황급히 부인했다.
“아닙니다. 사 장군님이 예전 서쪽 지역에 왔을 때,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왔을 때?”
이장의 예리한 눈빛이 월향의 얼굴에 머물렀다.
“전범이 붙잡혔단 말에 자네들보다 사 장군이 초조해하던데, 아주 각별한 사이였나 보군? 내가 알기로 구문제독은 도성을 떠날 수 없네. 설령 서쪽 지역에 갔었다 해도 그리 짧은 시간 만에 각별한 사이가 되었단 말인가?
자네들도 마찬가질세. 서쪽은 고원 지역이라 볕이 강해 대부분 피부가 까맣지. 한데 자네들은 우리보다 하얗지 않은가. 말씨도 마찬가지네. 아무리 감추려 한다지만 내가 못 알아차릴까. 어서 말해 보게. 자네들은 대체 어디에서 온 건가? 사 장군이 들통 난다고 한 말은 무엇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