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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19)화 (318/1,192)

제319화

이글거리는 그의 시선이 그녀의 가슴에 그대로 머물렀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점점 얼굴을 붉혔다. 어찌나 부끄러운지, 목부터 가슴까지 분홍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거리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실망하실 거예요. 왕야께서 원하시는 수박만큼은 절대 아니거든요.”

그가 살짝 당황한 어조로 말했다.

“이렇게 자랐는데 어찌 다들 그대를 사내라 여겼단 말이오?”

“평소에는 천을 두르고 다녔으니까요.”

그가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왠지 아쉬움이 묻어나는 음색이었다.

“그리하지 않았다면 좀 더 커졌을 것이오.”

그녀는 부끄러운 동시에 성이 나 볼멘소리를 내었다.

“아직도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거예요?”

“아니.”

그가 고개를 숙이더니 깊게 난 골에 얼굴을 파묻었다. 오직 그만이 믿고 있는 신에게, 경건한 절을 올리듯이. 그가 조금은 젖어든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 좋소. …더할 나위 없이 좋소.”

그는 더 기다릴 수 없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녀를 잃어버리지 않게, 두 번 다시 그녀가 떠나지 않게, 서로에게 낙인을 찍고 싶었다. 그녀가 그의 여인이 되고, 그가 그녀의 사내가 되어 언제나 서로를 바라보길 원했다.

아득한 밤, 그가 품 안에 그녀를 감싸 안았다. 흐릿한 눈빛이 서로를 어지럽게 휘감아 단단히 얽혀들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부드러운 침대에 몸을 맡겼다.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무섭소?”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어딘가 굳은 의지마저 느껴지는 얼굴에서, 조그마한 입술이 달싹였다.

“아뇨.”

그가 깊고 잔잔한 못처럼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프면 말해야 하오.”

“아픈 건 무섭지 않아요.”

그녀가 그의 목을 감싸 안고 가볍게 끌어당겼다. 이 순간, 그녀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끌어당기는 순간, 그는 벅찬 감격에 젖어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그의 마음에 지금을 꼭 좋은 추억으로 만들겠다는 다짐이 자리 잡았다. 난생처음인 만큼 그도 긴장되었지만 차마 내색할 수 없었다. 남자답게 결연하고 듬직한 모습을 보여 줘야 그녀도 그를 온전히 의지하지 않겠는가.

단단한 그의 팔뚝이 아름다운 곡선을 따라 위로 올라가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열 손가락을 교차해 꽉 움켜쥐었다. 얽혀든 손가락이 다시는 풀리지 않을 듯 서로를 감싸안았다. 곧 그의 몸이 조금씩,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줄곧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살폈다.

“아프오?”

“아뇨.”

그녀가 어여쁜 미소를 보였다. 사실은… 너무 아팠다! 그러나 이 통증을 견뎌야 비로소 그를 받아들일 수 있음을,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이미 정신이 혼미해진 그는 그녀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어지러운 숨결을 내뱉으며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천범, 나의, 나만의 천범…….”

예전의 그녀가 이런 말을 들었다면 분명 웃음을 터뜨렸겠지만, 지금은 눈물이 차올랐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초왕이, 그녀를 안고 이토록 애타게 부를 줄이야. 차마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에게서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그와 멀어져 있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이렇게나 자신을 억눌러 왔고, 이렇게나 그녀와 하나가 되길 원했는데…….

그의 이마에 땀이 흥건하게 맺혔고 그녀도 열기를 감출 수 없었다. 그는 그녀와 한시도 떨어지기 싫은 듯 멈추지 않고 오직 그녀만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흐릿한 시선에 서로를 붙든 채, 서로의 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봄빛이 완연한 방 안과 달리, 방 밖은 매혹적인 밤빛이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었다. 가동과 영구는 영원불변한 조각상처럼 조용히 복도를 지키며 서 있었다.

웬일로 말이 없는 가동이 조금 의아해, 영구가 그를 힐끔거렸다. 가동이 짧은 탄식을 내뱉더니 울먹이며 말했다.

“왕야와 왕비께서도 정말 쉽지가 않다.”

영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래, 정말 쉽지 않은 인연이었다. 그래도 엄청난 인연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찾을 땐 나타나지도 않더니…….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듯 방에서 나타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때, 키가 큰 사내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영구는 곧장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췄다.

“태자 전하.”

태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들어가려 했다. 영구가 황급히 그의 앞을 막아섰다.

“태자 전하, 지금은 왕야께서 손님을 만나기 어려운 상황이십니다.”

처음으로 받는 제지였다. 태자가 다소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손님이라는 말이더냐?”

영구는 여전히 손을 올리고 그를 가로막은 채였다.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의젓한 대처였다.

“태자 전하, 돌아가 계시면 소인이 잠시 뒤 왕야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태자는 성난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웃음을 터뜨렸다.

“네 주인께서 손님을 만나고 있는 모양이군?”

“예.”

“대체 얼마나 높은 분이시길래…….”

옆에 있던 가동이 결국 입을 열었다.

“태자 전하, 이해해 주십시오. 왕비 마마께서 돌아오셔서 잠시 말씀을 나누고 계십니다.”

왕비라는 말에 태자는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를 드리웠다.

“왕비가 돌아왔다니, 정말 잘되었구나. 그렇다면 부부가 함께 있을 시간을 주어야지. 내일 다시 찾아오면 될 일이다.”

가동이 허리를 숙이고 그를 배웅했다.

“태자 전하, 조심히 가십시오.”

태자는 곧장 후원으로 향했다. 누각에 걸린 등불을 바라보며 잠시 주저하던 그가 결국 위층으로 향했다.

황보주아는 이렇게 늦은 시간에 그가 찾아오자 의아한 듯 맞이했다.

“태자 오라버니,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찌… 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입니까?”

태자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괜스레 마음이 조여들었다.

“태자 오라버니, 어찌 그리 빤히 바라보십니까?”

“내게 숨기는 게 있지 않느냐?”

“없습니다. 태자 오라버니께 숨길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초왕과 너… 더는 예전 같지 않은 사이더냐?”

황보주아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셋째 오라버니께서 무언가 말씀하셨습니까?”

“왕비가 돌아왔다. 알고 있느냐?”

“예?”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황보주아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더니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왕비가, 어찌… 돌아왔답니까?”

태자가 그녀를 깊은 눈으로 응시했다.

“주아야, 네 피맺힌 원한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지금 초왕이 북진을 하지 않는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우리의 계획을 이루고 네 원수를 베겠느냐!”

황보주아가 갑작스레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며 절규했다.

“대체 어찌하라는 것입니까? 셋째 오라버니 마음에서 제 자리는 사라진 지 오래란 말입니다…….”

* * *

유무전이 백천범을 수성으로 데려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월향과 월규는 혼이 나간 듯했다. 그녀들은 이장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고 도와 달라며 울며불며 매달렸다.

그 시각, 사앵앵은 아버지를 추궁하며 바락바락 악을 쓰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짓을 하실 수 있어요? 유무전이란 인간은 뭐 하는 사람이고요? 어떻게 범이를 데려가게 두실 수 있어요? 어서 돌려내요, 내 신랑 돌려내라고요……!”

사성성도 골치가 아팠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유무전이 원망스러우면서도 딸이 아랫것들 앞에서 아비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게 퍽 서운했다. 그는 서둘러 자리를 뜨며 사앵앵을 을러댔다.

“너 같은 딸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온종일 아비 뒤를 쫓아다니며 대들고 억지를 부리다니, 벼락이라도 맞고 싶은 게야!”

사앵앵이 가슴을 들썩이며 말했다.

“억지를 부린다뇨? 전 이치를 따지는 거예요! 정말 옥살이를 하기 전에 데려와요. 그렇게 마른 애가 고문이라도 받으면 견딜 수 있겠어요?”

사성성은 벽에 기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알겠으니 제발 조용히 좀 하거라. 안 그래도 방법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마침 이장이 월향과 월규를 데리고 들어왔다. 두 시녀는 사씨 부녀를 보자마자 원망하는 마음이 들끓었다. 특히 월규는 눈을 치켜뜨고 이를 악물며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범이가 털끝만큼이라도 다쳤다간 내가 취선루를 다 부숴 버릴 테니 그리 아세요!”

이장이 서둘러 월규를 다독였다.

“그만하게, 그만하게. 성을 낼 게 아니라 어찌 데려올지 의논부터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찌 구하긴요, 당연히 돈을 주고 데려와야지요.”

사앵앵이 강단 있게 말했다.

“유 장군을 그동안 지켜보니까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겠어요. 돈 때문인 게 뻔하죠.”

그녀가 사성성을 향해 눈을 부릅뜨더니 힐난을 이어 갔다.

“아버지가 돈을 너무 적게 줘서 유 씨가 골탕 먹이는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냐!”

사성성이야말로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한 달이나 공짜로 먹여 주고 재워 줬으니 그런 것쯤은 도와줄 수 있는 일이지. 그래도 혹시나 싶어 은자도 건넸거늘, 은자를 받고도 이리 나올 줄 누가 알았겠느냐?”

입술만 잘근거리던 월향이 문득 입을 열었다.

“혹시, 돈이 아니라 다른 일 때문이면 어떡해?”

“다른 일이 뭐가 있겠어요?”

사앵앵이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호적부에 등록이 안 되긴 했지만, 그게 뭐 대수라고요. 호적부를 잃어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설마 그런 일로 잡아들이겠어요?”

월규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를 어찌 설명한단 말인가. 누구라도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되면 사달이 날 게 분명했다.

“…우선은 유무전이 범이를 어디로 데려갔는지부터 알아야 해요. 얼른 찾아보는 게 좋겠어요.”

“아가씨 말이 옳아.”

이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마차를 타고 성안으로 들어가 수소문하는 게 좋겠네.”

사앵앵이 사나운 눈빛으로 사성성을 흘겨보았다.

“유 씨는 오늘 안 돌아와요? 오는 길에 복면을 씌우고 흠씬 두들겨 팬 다음에 범이를 어떻게 했는지 물어봐야 이 화가 풀리겠어요.”

사성성은 유무전에게 굽신거리고, 은전까지 건넨 대가가 이 상황이라는 걸 차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자꾸만 헛된 희망을 품으려 애썼다.

“그래도 기다리는 편이 좋겠네. 유 장군이 전범을 겁주려고 연기를 하는지도 모르잖는가. 전범이 마음을 진정시키면 다시 데려올 수도 있지.”

그의 말에 다들 작게나마 희망의 싹이 움텄다. 정말 겁만 주고 다시 데려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믿는 편이, 차라리 덜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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