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8화
그의 마음도 머리도 텅 비어 버린 듯했다. 그는 이제 막 세상에 던져진 사람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동안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그녀가 어찌 갑자기 그의 침대에 나타났단 말인가? 그녀를 처음 만난 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하늘이 드디어 그를 가엽게 여긴 것일까?
유무전에게서 도망치려 발악했던 백천범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게다가 개울에 빠졌으니 꾀죄죄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가 천천히 자신을 살피다 부끄러운 듯 목소리를 낮췄다.
“우선… 옷을 좀 갈아입어야겠어요.”
묵용감은 그제야 악몽에서 깨어난 듯, 정신을 차렸다. 그가 서둘러 기홍과 녹하를 불렀다.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온 두 시녀는 침대 위에 있는 백천범을 보고 곧바로 눈물을 떨구었다. 그러나 초왕의 앞에서 격한 감정을 드러낼 수 없으니, 그녀들은 서둘러 얼굴을 닦고 백천범과 목욕간으로 향했다.
한편, 묵용감은 바보처럼 목욕간 앞에서 쭈뼛거렸다. 아까는 머리가 텅 비더니, 지금은 생각이 넘쳐나 혼란스러웠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한동안 서성거리던 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짙은 어둠이 깔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에서 깊은 숨이 흘러나왔다. 그가 마침내 결심한 듯 목욕간으로 들어섰다. 그가 기홍과 녹하에게 손을 내저었다. 밖으로 나가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직접 도포를 벗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기홍과 녹하가 허겁지겁 목욕간을 뛰쳐나왔다.
백천범은 덜컥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감싸 안고 통에 깊숙이 몸을 담갔다. 그를 힐끔거리던 그녀가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열었다.
“와, 왕야, 무얼 하시려고요?”
그는 묵묵히 도포를 의자에 걸쳐둔 뒤, 그녀의 뒤에 앉아 수건으로 등을 닦아 주었다. 너무나도 당혹스럽고 부끄러워,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숨을 쉬기조차 버거워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흔들리는 수면만 바라보았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마치 그녀가 부스러지기라도 할까, 더없이 조심스러운 접촉이었다. 그녀는 온몸에 이는 전율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목을 조르는 듯한 고요함을, 백천범 역시 깨트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별안간 그녀의 어깨에 따뜻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물방울이 떨어진 자리가 불에 덴 듯 뜨겁고 아려왔다. 그녀가 몸을 돌린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이 한없이 크게 뜨였다.
“와, 왕야!”
그는 물에 젖은 그녀를 품에 안았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어깨를 힘껏 물었다. 맹수가 먹이에 송곳니를 박아넣듯이 힘껏 물어 버린 탓에 여린 피부에 핏물이 스며나왔다.
“…어째서 도망친 것이오? 어째서 찾아오지 않았소? 내가 수성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리도 가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왜 날 찾지 않은 것이오?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시오? 매일 그대를 생각했소. 매일을! 그대가 너무 그리워서… 미쳐 버리는 줄 알았소!”
그의 모습은 상처를 입은 짐승 같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포효하며 그간 쌓였던 고통을 여과 없이 쏟아내었다.
백천범은 목구멍에 불덩이가 끓는 듯했다. 삼킬 수도, 내뱉을 수도 없었다. 그녀가 천천히 물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마침내 그의 목을 힘껏 끌어안고, 목에 걸린 불덩이를 토해낸 그녀가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길을 잃어 너무 먼 곳까지 와 버린 어린아이처럼, 애처롭고 서러운 울음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왕야께서… 이젠 절 원하지 않는 줄 알았어요. 이제 제가 필요 없는 줄 알았어요…….”
“내가 어찌 그대를 원치 않는단 말이오. 그대를 이렇게나 은애하는데. 매일 그대만을 생각하며, 사무치게 그리워했는데, 내가 어찌…….”
그가 고개를 숙이고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어느덧 목이 메어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다시는 날 떠나지 마시오. 제발… 천범. 더는 견딜 수가 없소…….”
그는 하고픈 말을 입맞춤으로 대신했다. 부드럽지만 강한 입맞춤이 쉴 틈 없이 이어졌다.
고통스러웠지만 너무나도 달콤했다. 오랜 시간 참아왔던 고통이 한 번에 쏟아져 나오자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 또한 먼 곳까지 가 버린 어린아이를 찾아낸 듯,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목 놓아 우는 소리가 바깥까지 흘러나왔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두 시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어린 왕비가 우는 모습이야 여러 번 보았지만, 초왕이 저리 목 놓아 울다니…….
감히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두 시녀는 울음소리가 그친 후에야 용기를 내어 들어갔다. 목욕간 안에서 두 사람이 부둥켜안은 채 서로의 눈물을 닦아 주고 있었다.
녹하는 바짝 마른 입술을 핥고는 용기를 쥐어짜서 입을 열었다.
“왕야, 소인들이 하겠습니다. 물이 다 식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초왕은 짧게 대답하더니 백천범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밖으로 향했다.
대청으로 돌아온 그는 소매로 얼굴을 깨끗이 닦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잠긴 목소리도 몇 번 가다듬은 그가 목청을 높였다.
“누가 데려왔느냐?”
입이 무거웠던 영구는 방에서 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니, 다른 이들은 백천범이 돌아온 사실을 모른다. 다들 초왕의 호령에 의아해하던 찰나, 누군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왕야, 말장이 데려왔습니다.”
유무전은 초왕의 목소리에 담긴 기쁨을 알아차렸다. 자신이 시도한 도박이 마침내 성공했다는 생각에, 그는 서둘러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나 초왕의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입꼬리를 올려 옅은 미소를 지은 그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했다. 본왕이 좋은 상을 내리마.”
좋은 상이라는 말에 유무전은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지만,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입을 열었다.
“말장은 상을 받고자 데려온 게 아닙니다. 그저 왕야에 대한 말장의 충성을 보여 드리고자…….”
별안간 초왕이 그의 말을 잘랐다.
“손발도 네가 묶었더냐?”
초왕이 죄를 물을까 두려워진 유무전이 멋쩍은 표정으로 해명했다.
“방법이 없었습니다. 오는 내내 도망치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단번에 안색이 굳어진 초왕이 준엄하게 호통을 쳤다.
“엎드리거라!”
유무전은 곧장 바닥에 엎드려 몸을 숙였다.
초왕이 허리춤에서 채찍을 꺼내 들고 허공에 휘둘렀다.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유무전에게 더없는 공포를 안겨주었다. 유무전은 황급히 목청을 높여 용서를 구했다.
“왕야, 살려 주십시오. 왕야, 살려 주십시오! 왕야……!”
초왕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연신 손을 휘둘렀다.
짝!
짜악! 짝!
유무전의 등에 채찍이 닿자마자 곧바로 살갗이 찢겨 나갔다.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제 곧 죽을 거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뜻밖에도 세 번의 채찍질 만에 초왕이 손을 멈췄다. 그리곤 옆에 있던 병사에게 유무전을 일으키라고 분부했다. 어느새 초왕의 표정이 다시 온화한 빛을 띠고 있었다.
“본왕이 상을 내린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 채찍이 네게 주는 상이다.”
유무전은 부축을 받은 채 멍하니 초왕을 바라보았다. 이게 병 주고 약 주기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곧 이보다 좋은 상은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초왕이 상금을 내렸다면 언젠가 다 써 버렸을 것이다. 직위를 올려주지 않는 건 아직 그의 능력이 부족해서다. 쉽게 직위를 올려 주었다가 아랫사람들의 인정을 얻지 못하면 시답잖은 말이 나올 게 뻔했다.
게다가… 사내를 바쳐 승진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비웃음을 살 게 분명했다. 무관과 문관은 달랐다. 남들의 시답잖은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 채찍은 너무나도 특별한 상이 아닌가. 초왕이 늘 지니고 있던 물건이다. 코뿔소 가죽으로 만든 채찍의 손잡이에는 희미한 무늬가 새겨졌고, 굵기는 끝으로 갈수록 가느다랬다. 몸에 지니기 편할 만큼 작았지만, 전부 펼치면 다섯 자나 되는 길이다.
초왕의 채찍질은 가히 신의 경지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는 초왕이 채찍만으로 적병을 공중으로 내던지는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 초왕이 채찍을 한 번 더 휘두르자, 적병은 손 한번 써 보지 못하고 앞으로 끌려왔다.
그런 진귀한 물건을 상으로 받다니……! 이 얼마나 체면이 서는 일인가! 이 채찍만 지니고 있으면 다른 대장군들도 그를 쉽게 대할 수 없다!
유무전은 전범을 때린 게 후회스러웠다. 그의 구세주인 줄도 모르고 손을 대다니……. 앞으로 자주 볼 사이인 만큼 사과를 하고 좋은 사이를 유지해야 했다. 그래야 초왕도 그를 더욱 중요한 인재로 여길 터였다.
그는 아픔을 참고 서둘러 채찍을 받아들었다. 절을 하며 인사를 올리려 했지만, 등에 난 상처 때문에 움직일 때마다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초왕은 손을 내저어 절을 물리고는 하인에게 좋은 연고를 발라 주라고 분부했다.
* * *
묵용감이 방에 들어왔을 때, 백천범은 반쯤 마른 머리를 늘어뜨리고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는 게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옅은 분홍빛으로 물든 그녀의 얼굴에서 부끄러움이 묻어났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떨어져 있던 반년 동안 그녀는 무척 달라져 있었다. 이제는 그의 기억 속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급한 대로 기홍의 옷을 입었어도 크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얇은 옷감이 그녀의 몸 위에 드리워지니 제법 아름다운 소녀의 자태가 선연했다.
밋밋했던 이목구비는 어느새 묵으로 그려 놓은 듯 선명하게 자리 잡았다. 검은 눈썹과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 짙은 눈망울이 그녀의 큰 눈을 돋보이게 했다.
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이렇게 자라나는 동안, 그 모습을 눈에 담지 못한 게 몹시도 아쉬웠다. 눈앞에 있는 백천범의 자태는 조금 낯설었지만,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익숙하고 친근한 마음이 피어올랐다. 그래, 어떻게 변했든 그녀는 언제나 그의 어린 왕비였고, 그의 갈증이자 유일한 빛인 아내였다.
열여섯이 된 여인에게 아이처럼 보송보송한 느낌은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자라나 마침내 피어난 꽃처럼 화사한 모습으로 그의 앞에 있었다.
묵용감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벽을 타고 가물거리는 등불 빛이 유난히 평온하고 고요했다. 신발 밑창과 바닥이 스치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깊고도 팽팽한 적막이 흘렀다.
그녀의 시야에 사슴 가죽으로 만든 장화가 들어오더니, 이내 그리운 숨결이 다가왔다. 또다시 불덩이를 삼킨 듯한 기분에, 그녀가 황급히 일어났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다가오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의 요대를 풀어냈다.
양쪽으로 벌어진 비단옷이 어깨 위에서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졌고, 하얀 연꽃을 수놓은 윗옷이 훤히 드러났다. 그의 눈빛은 그녀의 새하얀 어깨에 머물러 있었지만, 손은 멈추지 않고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며 얇은 끈을 끌렀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어찌 의미를 모를까. 그러나 그는 그녀의 팔을 붙잡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나 자랐는지 좀 봐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