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7화
“…그만하는 게 좋겠습니다. 역시 쉽지 않은 놈인지라 제, 제가 며칠 더 말미를 주겠습니다.”
유무전이 정색을 하더니 눈을 부릅떴다.
“사 주인장, 본 장군을 우롱하려는 것이오? 본 장군이 이 일을 알게 된 이상, 제대로 처리해야 하오. 어서, 밧줄을 가져오시오.”
사성성은 유무전의 속셈을 헤아릴 수 없었지만, 그를 거역할 수도 없던 터라 점원에게 밧줄을 가져오라고 분부했다. 그는 아직도 유무전이 다소 거칠게 겁을 주는 거라고 믿었다.
점원이 밧줄을 가져오자, 유무전은 재빨리 백천범을 묶더니 그대로 들쳐 안고 계단을 내려갔다. 이내 그녀를 말에 실은 그가 유유히 떠나 버렸다. 사성성은 문 앞에 서서 아연실색했다. 유무전이 정말로 백천범을 데려가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 * *
백천범은 어떻게든 도망쳐야 했다. 온갖 방법을 떠올려 발악했지만 무관인 유무전은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살려 달라며 한껏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누군가 그 소리를 듣고 월향과 월규에게 전해 줄지도 모른다. 그녀가 쉬지 않고 소리치니, 짜증이 난 유무전은 그녀의 뺨을 내리친 뒤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손이 어찌나 매운지, 백천범은 눈앞이 아찔했다. 그래도 관아로 갈 수는 없었다. 그녀의 호적을 조사하다 보면 신분이 들통 날 게 분명하지 않은가. 손은 묶여 있던 터라, 백천범은 발로 그를 힘껏 걷어찼다.
이렇게 버르장머리 없는 놈은 처음이었다. 유무전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호되게 야단쳤다. 이번에는 발도 묶어 버렸다. 댓잎 밥처럼 온몸이 꽁꽁 묶인 그녀는 말 위에 놓여 유무전이 이끄는 대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유무전은 완전한 확신은 들지 않았다. 이 일은 확률이 낮은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초왕이 남색을 한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었지만, 전범이 초상화의 여인을 닮았다는 것만 믿고 데려가는 것이었다. 만약 이 아이가 초왕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충심을 보이기는커녕 정말 끝장이 아닌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수록 그의 심장이 심하게 요동쳤고, 말을 모는 속도도 느려졌다. 결국 유무전은 얼마 가지 않아 멈춰 서서 망설임에 빠졌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며 어느새 저만치에 있는 오수진 마을에 하나둘 등불이 켜졌다. 조금씩 환한 불빛으로 물들어가는 마을 앞에서 그는 감회가 새로웠다. 오수진에서 지낼 수 있는 날이 어느새 끝나 가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특히 취선루의 음식이 아쉬웠다. 다른 곳에서 그리 좋은 대접을 받을 수나 있을까.
오수진은 수성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다. 이렇게 좋은 마을이 곧 사장풍의 손에 들어갈 터였다. 생각이 여기에 닿으니 그는 목에 떡이라도 걸린 듯 답답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사장풍과 달리, 그는 곧 수성에서 가장 먼 곳으로 떠나지 않는가.
성과 먼 마을일수록 더 가난한 법이다. 거기에 둘의 상황까지 비교되니 유무전은 이를 악물었다. 간 큰 놈은 배불러 죽고, 간이 작은 놈은 굶어 죽는다지 않는가. 그는 마침내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결정을 내리고 뒤를 바라본 그가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 위에 있던 전범이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느새 날이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찾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손발을 모두 묶어 두었으니 멀리 도망치진 못했을 터.
주위를 살펴도 도망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절로 간담이 서늘해진 그가 고개를 길게 빼고 개울가를 들여다보았다. 하, 역시나 거뭇한 물체가 개울 안에 엎어져 있었다. 전범이 아니면 대체 누구겠는가.
그가 조소를 머금었다. 정말 요란하게 야단법석을 떠는 놈이다. 유무전은 개울가로 내려가 전범을 끌어올렸다. 마음 같아서는 얼굴을 때려 주고 싶었지만, 상처라도 나서 초왕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싶어 발로만 걷어찼다.
“감히 어딜 도망가려는 게냐? 걱정 말거라. 도착하면 좋은 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백천범은 얼굴부터 발끝까지 물에 젖어 있었다. 발로 차였지만 그녀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소리를 지를수록 더욱더 호되게 맞는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녀는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다시 도망칠 기회를 엿보기로 마음먹었다.
유무전은 백천범을 말 위에 싣고 빠르게 달려갔다. 한참이나 머리를 굴린 끝에, 마침내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전범을 수성으로 데려가 몰래 초왕의 침소에 데려다 놓고, 그는 바깥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면 된다.
만약 초왕이 진노하면 곧장 도망쳐서 자신의 짓이 아니라고 잡아뗄 생각이었다. 반대로 초왕이 마음에 들어 한다면, 얼굴을 내밀고 상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 * *
묵용감은 책상 앞에 앉아 줄곧 사장풍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안색이 어두워졌으니, 그가 오는 걸 꺼리는 게 분명했다. 그 마을에 그가 보면 안 되는 게 있단 말인가?
별안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사장풍이 정말 그에게 보이기 싫은 게 있다면… 그녀밖에 없었다.
묵용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청을 높였다.
“말을 준비하라!”
가동이 황급히 들어와 물었다.
“왕야, 늦은 시간에 어딜 가시려 하십니까?”
“오지진에 가겠다. 말을 준비하라 이르거라. 오늘은 그곳에서 묵어야겠다.”
가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초왕이 다른 곳에서 묵는다면 준비할 게 많았다. 적당한 거처를 골라 정리도 해야 했고, 호위 부대도 다시 짜야 하니 금방 준비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가동이 완곡하게 초왕을 타일렀다.
“왕야,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오지진에서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텐데요.”
“다른 건 준비할 필요 없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거라. 난 역참에서 묵을 테니.”
역참은 많은 사람이 오가는 만큼 어수선하고 시끌벅적했다. 어찌 그런 곳에서 초왕을 묵게 한단 말인가?
가동은 다시 그를 말리려고 했지만, 초왕의 매서운 시선 앞에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결국 가동은 아무 대꾸도 못 하고 조용히 물러나, 기홍과 녹하에게 초왕의 짐을 챙겨 달라고 부탁했다.
* * *
좌원 장군인 유무전은 역시 몸놀림이 남달랐다. 백천범을 들어 올려 옆구리에 낀 그가 어둠을 헤치고 부윤 관저로 들어갔다. 회의를 하러 자주 왔던 만큼 이곳의 지리는 훤히 꿰고 있었다.
다만 초왕과 태자가 묵고 있는 곳이라 경비가 삼엄했다. 그는 담벼락을 따라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쉽게 지나가기 어려울 거란 생각에 단단히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그에게 엄청난 운이 따라 주었다. 호위병 두 명을 피해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초왕의 침소 앞은 먹물을 부어놓은 듯 어두웠다. 안에서 불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아무도 없는 듯했다. 하늘이 그를 돕는다는 생각에 유무전이 크게 기뻐했다. 더듬거리며 안으로 들어간 그는 침대 위에 백천범을 내려놓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숨어 있을 자리를 찾은 그가 서둘러 기척을 지우고 상황을 주시했다.
감쪽같이 초왕의 침대 위에 데려다 놨으니, 이제는 하늘의 뜻만 기다리면 되었다.
보드라운 이불 위에 던져진 백천범은 희미한 녹나무 향을 맡았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묵용감의 품에서 잠이 들 때마다, 이렇게 옅은 녹나무 향이 나지 않았던가. 그의 품은 정말 따뜻하고, 편안했다.
커다란 손을 그녀의 허리 위에 올려놓을 때면 난로처럼 따뜻한 기운이 그녀의 몸 안에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살며시 어루만지면 간지러워 키득거리곤 했다…….
그만, 옛 추억은 그만 놓아주어야 했다.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저릿해지며 살이 베이는 듯 고통스러웠다. 이제 그는 그녀의 사내가 아니었다. 지금 그의 품에 있는 여인은 그와 어린 시절을 함께한 약혼녀이자, 늘 그리워하던 황보주아일 테니.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쓰린 기억을 간신히 삼켰다. 지금은 이 상황부터 파악하고 움직여야 했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안전한 곳은 절대 아닐 터. 어둠에 눈이 적응하자 그녀는 아주 커다란 침대에 누워 있음을 알아차렸다. 침대 맡에 폭신한 베개와 이불 등 깨끗한 침구가 정돈되어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침구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최대한 조용히 무릎을 들어 이불을 젖혔다. 그 안에 몸을 숨기고 있을 생각이었다.
* * *
묵용감이 관아를 나서려 했지만, 급히 달려온 영구가 앞을 막아섰다. 강북 지역의 밀서가 도착했다는 뜻이다.
가동이 서둘러 등불을 켜더니 묵용감에게 비춰 주었다. 밀서를 읽던 묵용감의 얼굴이 살짝 냉랭해지더니, 이내 어두운 하늘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별안간 고삐를 돌렸다.
“다시 돌아간다!”
이제 막 관저를 나온 모든 이들이 되돌아가야 했다.
방 안에 불이 켜졌고, 묵용감은 책상 앞에 앉아 밀서를 펼쳤다. 그리곤 영구에게 태자를 모셔오라 분부를 내렸다.
명을 받은 영구가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묵용감이 그를 불러 세웠다.
“되었다. 내가 다녀오마.”
영구는 옆으로 물러나 그에게 예를 갖추었다. 도포 자락을 흩날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묵용감이 방을 나서려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몸을 돌린 그가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장막이 드리운 침대를 겨누었다.
곧 날카로운 검이 소리 없이 장막을 베어 냈다. 묵용감은 빠르게 침대 옆에 다가섰다. 그가 검 끝을 침대 위에 있는 이의 목에 겨누었다.
“누구냐!”
백천범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더없이 까만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자, 주변은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평소에는 누구보다 침착하던 영구도 침대 위에 있는 이를 알아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다 금세 정신을 차린 영구가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얼굴을 본 묵용감의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가 날이 새하얀 검을 몇 차례 휘둘러 밧줄을 잘라내었다. 칼날이 꼭 허공에서 기쁨의 춤을 추는 듯했다.
그는 백천범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의 입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백천범은 그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다 먼저 입술을 움직였다.
“…왕야.”
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