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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16)화 (315/1,192)

제316화

백천범이 버드나무 아래에 도착했을 때, 묵용감은 막 팔각정을 지나 역참으로 가고 있었다. 이곳에 더 머무를 생각이 사라진 그는 사장풍이 있는 곳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가장 보기 싫은 사람이 지금은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될 줄이야. 마음속에 가득한 그리움을 어찌할 방법이 없으니, 차라리 사장풍이라도 잠시 만나고 싶었다.

초왕 일행이 오지진에 도착하니, 하루 중 가장 더운 때가 되었다. 사장풍은 웃는 얼굴로 한 장군을 맞이했지만, 초왕을 보는 순간 안색이 급변했다. 그 후로 사장풍은 시종일관 굳은 얼굴로 훈련을 진행했다.

유무진은 참관원 자격으로 초왕 일행과 동행했다. 사장풍과 초왕을 번갈아 보던 그는 왠지 사장풍의 기분이 나쁠수록 초왕이 즐거워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사장풍이 아무리 오만한 태도를 보여도 초왕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초왕이 사장풍을 방임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불쾌하게 가라앉았다.

두 마을의 평가 결과, 역시나 사장풍이 맡은 오지진이 근소한 차이로 오수진을 앞섰다. 유무전의 기분은 더욱더 나빠졌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사장풍은 초왕의 신임을 받고 있으니, 아무리 노력해도 그가 따라잡을 수 없었다.

한통도 사장풍이 수상쩍긴 마찬가지였다. 사장풍이 조금 거만할지언정 분수를 모르는 자는 아니었다. 한데 어찌 초왕 앞에서 대놓고 얼굴을 구긴단 말인가?

그러나 사장풍은 얼굴을 구기는 것만으로도 많이 참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오랜 시간을 참고 또 참아내며 계획을 이룰 때가 왔는데, 음흉하게 수를 써서 불쑥 찾아오다니!

설마 이미 다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백천범을 만나고 그를 조롱하러 왔는지도 모른다. 입꼬리를 올린 초왕의 표정은 그의 눈에 비열하기 짝이 없었다.

뒤이어 술자리가 이어졌고, 사장풍은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초왕이 그의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우원 장군은 어째서 홀로 술을 들이켜느냐? 자, 본왕이 한 잔 따라 주마.”

초왕이 직접 술을 따라 주는 것은 실로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지켜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그의 호의를 거부할 수는 없었기에, 사장풍은 초왕이 따라 준 술을 한입에 털어 넣았다. 병사들이 그를 보며 환호를 내질렀다.

술잔을 내려놓고 시선을 올린 그는 초왕의 눈에 담긴 의미심장한 웃음을 마주했다. 그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는 그제야 자신의 착각을 깨달았다. 하마터면 속내를 들킬 뻔했다. 초왕은 정말이지 교활한 인간이었다.

그는 굳은 표정을 풀고 담담한 미소를 머금은 채 초왕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두 사람은 묵묵히 서로를 응시했다. 다른 이들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두 사람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서로를 베어 버릴 듯 살기가 넘실거렸다.

묵용감은 일부러 사장풍에게 자신의 방문을 알리지 말라고 분부했다. 예고도 없이 그를 마주하고 평정심을 잃은 사장풍의 모습에, 초왕의 의심은 더욱더 짙어졌다. 사장풍의 얼굴은 분노와 적의만이 가득했다. 백천범을 빼앗겼다고 주장할 때의 모습과 똑같았다. 설마… 사장풍은 정말 백천범의 행방을 알고 있단 말인가?

* * *

백천범은 최선을 다했지만, 약속한 기일이 되어도 손실을 전부 만회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큰돈을 물어낼 수도 없었던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취선루로 향했다.

가게 종업원이 그녀를 2층 별실로 데려갔다. 별실에는 사성성 외에 다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진홍색 옷을 입은 훤칠한 체격의 사내였는데, 피부는 조금 까무잡잡했고 각진 턱선을 따라 구레나룻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사내의 위풍당당한 전신에서 늠름한 기개가 넘쳐흘렀다.

백천범도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마을 사내들이 훈련을 받을 때 멀찍이서 봤던 사람이다. 다들 그를 좌원 장군이라 부르며 예를 갖췄다.

그녀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올렸다.

“주인 어르신, 장군님. 안녕하십니까?”

더는 예전처럼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았던 사성성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 내게 또 말미를 달라고 할 셈이냐? 전범, 우리 앵앵이만 믿고 욕심을 부리면 안 되지!”

백천범이 이마에 난 땀을 훑으며 웅얼거렸다.

“주인 어르신, 어찌하는 게 좋겠습니까?”

“당연히 돈을 물어내야지!”

“저, 저는 돈이 없는걸요.”

“돈은 없어도 집은 있지 않나? 그 집이라도 내놓거라.”

“저희 삼 남매가 지내는 곳입니다. 집을 팔면 저희는 어디에서 묵는단 말입니까?”

“나는 그저 장사를 할 뿐이다. 이미 손해를 감수하고 봐줄 만큼 봐주었어. 서로 증서도 썼는데 잡아뗄 생각이냐?”

“…….”

“돈을 갚기 싫거든 관아로 가자.”

사성성이 유무전을 가리켰다.

“마침 유 장군님도 계시겠다, 어찌해야 할지 여쭤보자꾸나.”

그는 백천범에게 겁을 주기 위해 일부러 유무전과 대동했다. 그간 공들여 그물을 던지고 기다렸으니, 오늘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걷어 들여야 했다.

유무전은 사성성에게 대가를 받고 연기를 해 주었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위엄 있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빚을 졌으면 갚아야지. 당연한 이치가 아니더냐? 돈을 정 갚지 못하겠다면, 네 가족이 전부 갚을 때까지 네가 옥살이를 하는 수밖에 없다. 다만 옥살이를 하면서 목숨이 끝까지 붙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한 번 옥에 들어간 적이 있었던 백천범은 옥사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절대로 편히 지낼 수 있는 곳이 아니지 않은가!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유무전을 바라보았다. 살려 달라고 청을 드리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유무전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전범, 어찌 이토록 고집을 부렸더냐? 돈을 갚기도 싫고 옥살이도 싫다면 남은 방법이 하나 있지 않더냐? 사 씨가 줄곧 널 데릴사위로 데려오고 싶어 하지 않았느냐. 게다가 사 씨의 규수도 널 마음에 들어 하고 사 씨도 널 신임하니 조상님께 감사해야지. 너만 동의하면 한가족이 되는데, 뭘 그리 고민한단 말이냐?”

이야기가 엉뚱하게 흘러가자, 백천범의 마음 한구석에서 사 씨에 대한 의심이 피어올랐다. 유 장군까지 이렇게 나선다면, 십중팔구 그가 꾸민 짓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속으로 깊은 탄식을 내뱉은 후 고개를 들었다.

“주인 어르신, 절 압박하셔도 소용없어요. 저는 절대 그리하지 않을 거예요.”

“그럼 당장 돈을 갚으래도!”

‘하, 막무가내로 나오시겠다면 이치에 맞는 말로 따지는 수밖에.’

백천범이 그를 힐끗거리며 따지기 시작했다.

“주인 어르신, 인간이라면 응당 양심을 따라야지요. 저는 어르신을 좋게 생각했는데, 왜 자꾸 절 계략에 빠뜨리려 하시는 거예요? 제가 데릴사위로 들어오기 싫다고 해서요? 고작 그뿐이에요? 주인 어르신은 엄청난 부자에, 명망 있는 분인데 이런 일로 체면을 깎으시려는 거예요? 이건 착한 딸을 내세워 못된 짓을 저지르게 하는 거라고요.”

사성성의 얼굴이 대번에 벌겋게 물들었다.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내가 언제 널 계략에 빠뜨렸다는 게야? 너야말로 날 못살게 굴지 않았더냐! 난 널 믿고 거상으로 키워 보려 했건만, 질 낮은 물건만 가져와서 내 장사까지 말아먹으려 들었어!

앵앵이 때문에 참고 넘어갔건만, 도리어 날 모함해? 네 이놈! 착실한 줄 알았더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구나. 우리 앵앵이가 아직 보는 눈이 부족해 널 마음에 들어 한 거지, 앵앵이만 아니면 나도 널 사윗감으로 절대 생각하지도 않았을 게야!”

잔뜩 흥분한 사성성이 물을 마시고 목을 축인 뒤 다시 그녀를 꾸짖었다.

“너처럼 허약한 놈이 무슨 사내라고! 우리 딸은 보는 눈도 없지. 어찌 얼굴만 보고 저런 놈을 골랐을까! 전범, 호의도 모르는 놈한테 더는 시간을 내어줄 수 없다. 마지막으로 똑똑히 답하거라. 돈을 가져오든지, 관아로 가든지. 다만 잘못을 인정하고 공손하게 나오면 앵앵이의 체면을 봐서 지난 잘못은 따지지 않겠다.”

사성성이 열을 내고 있을 때, 유무전은 자리에 앉아 가만히 백천범을 응시했다. 보면 볼수록 여인과 흡사한 외모였다.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좀처럼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턱을 만지작거리며 백천범의 얼굴을 훑던 유무전이 별안간 다리를 내려쳤다. 마침내 떠올릴 수 있었다. 지난번에 배포된 초상화의 여인과 똑 닮아 있었다. 외모는 물론이거니와 분위기도… 비슷했다. 아니, 보면 볼수록 정말 똑같았다. 그는 속으로 바쁘게 계산을 해 보았다.

초상화에 그려진 여인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가동이 그 일을 담당한 걸 보면 초왕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틀림없었다. 여인은 찾지 못했어도 똑 닮은 사내를 데려가면 초왕에게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

마을 훈련 평가에서 사장풍에게 뒤처졌으니, 그는 이를 악물고 노력해야 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온 게 아닌가!

그는 백천범을 뚫어지게 살폈다. 보면 볼수록 예쁘장한 외모였다. 갸름한 얼굴에 커다란 눈과 새하얀 피부, 붉은빛이 선명한 자그마한 입술, 백옥처럼 뽀얀 귓불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들뜰 정도였다. 어쩐지 그리 많은 고관들이 기방 도령을 찾더니만, 지금에서야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초상화의 여인과 닮은 훤칠한 도령을 데려가면 초왕도 기뻐할 게 분명했다. 초왕을 기쁘게 한다면, 그는 큰 공을 세우는 셈이었다. 하, 그 잘난 사장풍도 이제 곧 끝이다!

계산을 마친 유무전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되었다. 돈을 갚지 않았으니 내가 직접 널 관아로 데려가야겠다.”

유무전이 아직 연기를 하는 줄 알았던 사성성이 맞장구를 쳤다.

“장군님 말씀 들었지? 옥살이가 하고 싶거든 계속 고집을 피워 보거라. 과연 옥사에서도 이리 나올 수 있을까? 살인에 방화를 저지르는 도적들이 우글우글한 곳에서, 너처럼 말라비틀어진 놈은 바람 앞의 등불이나 다름없지.

맞기보다 무서운 일이 더 많은 줄도 모르고… 네가 알 턱이 없으니 더는 겁을 줄 수도 없겠구나. 어쨌든 죄인들은 오랫동안 고기 맛을 못 봤을 테니, 너를 보면 토끼를 본 늑대처럼 달려들지도 모르지.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는… 하하, 장담은 하지 않겠다.”

유무전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백천범의 등을 떠밀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가자.”

깜짝 놀란 사성성이 유무전에게 눈짓을 보냈다. 연기가 너무 과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유무전은 사성성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또다시 백천범을 떠밀었다.

“어서 가재도. 설마 본 장군에게 업혀 갈 작정이냐?”

사성성은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는 걸 눈치채고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장군님, 그게… 이제 날도 저물 텐데 식사부터 하시고 다시 얘기해 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안 되오. 중요한 일부터 처리해야 하지 않소.”

유무전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밧줄 같은 건 없소? 잠시 빌려주시오. 묶어서 관아로 보내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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