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5화
더는 예전처럼 제멋대로 굴지 않고, 어딘가 텅 비어 버린 듯한 그의 모습에 지켜보는 사람들도 쓸쓸함과 괴로움을 느꼈다.
“왕야, 강남은 풍경이 좋기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초여름에 들어섰으니 여행을 떠나기에도 좋은 날씨입니다. 성에만 틀어박혀 계시지 말고 이 아름다운 경치도 봐 주십시오. 기분 전환도 할 겸 말장과 함께 다녀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초왕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서 보는 풍경도 나쁘지 않다. 밖을 나가지 않아도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데 굳이 멀리 나갈 필요가 있느냐? 성가시구나.”
초왕의 시큰둥한 반응에 한통이 곧바로 반박했다.
“그게 어찌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한통은 그를 데리고 나가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관저에 있는 건 전부 인공적으로 심어 놓은 것입니다. 교외의 풍경과는 견줄 게 못 되지요. 청산녹수 사이를 거니는 것과 인공적인 풍경을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가서 경치도 구경하시고 훈련 상태도 점검해 보시지요. 사장풍 그놈이 자기가 거느리는 졸병들이 가장 뛰어나다고 장담을 하니, 말장이 가서 좀 보고자 합니다.”
사장풍의 얘기가 나오자 마침내 초왕의 마음이 흔들렸다.
“사장풍은 지금 어느 마을에 있느냐?”
“오지진烏池鎭에 있습니다. 두 번째 마을이지요. 우선은 첫 번째 마을인 오수진에 가려 합니다. 듣자 하니 오수진에 있는 취선루의 음식이 훌륭하다던데, 점심은 그곳에서 드시는 게 어떠십니까? 식사를 마친 뒤에 오지진으로 갈 계획입니다. 도합 십여 개의 마을이니 며칠이면 다 돌아볼 수 있습니다.”
초왕이 그를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본왕이 매일 널 따라다니며 경치나 감상하라는 말이냐?”
“왕야, 경치나 감상하다니요, 엄연히 훈련 점검차 방문입니다!”
한통이 두꺼운 손을 휘휘 저었다.
“우선 오늘은 말장과 함께 가셨다가 흥이 나지 않으시거든 돌아오시는 건 어떠십니까?”
잠시 고민하던 초왕이 마침내 승낙했다.
“좋다. 아름다운 풍경을 저버릴 수는 없지. 본왕도 가겠다.”
한 장군은 매우 기뻐하며 오수진에 있는 유무전에게 전갈을 보냈다. 첫 성과를 선보이는 자리였으니 체면이 깎여선 안 될 일이었으니.
오수진의 백성들에게는 좌원 장군도 까마득히 높은 산이었다. 그런데 초왕을 모시다니, 아마 전설 속의 신이 내려온 듯 진귀한 존재로 느껴질 터였다. 난강 이남 지역의 백성들에겐 초왕이 곧 천자이자 그들의 왕이었으므로.
다만 전쟁 중인 만큼 초왕의 행방은 극비 사항으로 취급되었다. 그를 영접할 몇몇 이들을 제외하면, 그의 방문을 아는 이는 없었다.
전갈을 받은 유무전은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한 장군이 자신을 첫 주자로 내세운 만큼 초왕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찍고 싶었다. 그동안 그는 불쾌한 감정을 홀로 삭이고 있었다. 파면당한 구문제독이 갑자기 참사로 합류한 데다, 어깨에 날개라도 단 듯 승승장구하지 않았던가.
그자가 엄수의의 머리를 가져온 일로 우원 장군까지 올랐으니 자신과 거의 대등한 지위에 오른 셈이다. 고작 반년간 세운 공으로 몇 년간 쌓은 자신의 전적을 따라잡았으니 그는 자연히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사장풍은 가동이라는 인맥도 있었고 두뇌도 명석했다. 생김새도 준수한 데다 다소 오만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생각이 여기에 닿자, 유무전은 묘한 의구심이 들었다.
초왕과 눈만 마주쳐도 다들 두려움에 벌벌 떠는데 사장풍은 어찌 감히 초왕 앞에서 우쭐댄단 말인가? 게다가 초왕은 그의 무례를 보고도 못 본 체했다. 설마… 초왕은 사소한 것에 구애받지 않는 대담한 성격을 선호하는 걸까? 온갖 생각이 들었지만, 유무전은 초왕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다행히 유무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훈련을 지켜본 초왕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임무를 완수한 후에는 먹고 마시는 자리가 이어졌다. 세 사람은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었다.
유무전은 초왕을 존경하는 동시에 그를 두려워했다. 초왕은 가장 높은 상관이기에 평소에 그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드물었다. 사장풍의 행동을 되짚으며 깨달음을 얻은 유무전은 용기를 내어 초왕과 친분을 쌓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취선루는 긴장에 휩싸였다. 일찌감치 청소를 마친 직원들이 위층의 가장 큰 별실에서 초왕을 맞이했고, 사성성이 직접 시중을 들며 음식을 소개해 주었다. 비단으로 만든 화려한 옷을 갖춰 입은 그는 땀이 어찌나 쏟아지는지, 괴로울 만큼 몸이 끈적거렸다.
옷소매로 연신 땀을 닦아내던 그는 얼굴이 환한 미소를 유지하느라 두 볼에 경련까지 일으키고 있었다. 웃고 있을지언정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유무전은 사성성의 모습이 영 못마땅했다. 그래도 온갖 일을 다 겪어 봤을 장사꾼이 어찌 이토록 겁에 질려 있을까? 그도 초왕이 두렵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초왕의 앞에 나서고 싶었다. 사장풍도 할 수 있는 일을 그라고 못 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는 일부러 사성성을 놀리며 웃음을 보였다.
“주인장, 사위는 언제 데려오기로 한 것이오? 처음엔 날 속이지 않았소. 죽마고우라서 사이가 좋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껏 거절할 리 있겠소? 전범 그놈이 패기가 보통이 아니오. 이렇게 큰 가업을 보고도 꿈적도 하지 않다니.”
사성성은 초왕 앞에서 전범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곧 활짝 웃으며 말했다.
“못난 제 딸이 소란을 피운 탓에 유 장군님께 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
한통은 소문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유무전이 일부러 이야기를 꺼냈음을 알아차린 한통이 내막을 물었고, 유무전은 사앵앵이 전범을 쫓아다닌 일을 상세히 들려 주었다.
끝내 한 장군이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사성성을 보았다.
“정말 좋은 딸을 두지 않았소. 전범이라는 놈은 복에 겨운 줄도 모르는군.”
내내 아무 말도 없던 초왕이 별안간 고개를 들었다.
“전범?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이름인데.”
한통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시골에 사는 사내아이 이름을 어찌 들으셨겠습니까?”
초왕은 그 이름을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기억을 되짚었지만, 도무지 그 이름을 들은 장소가 떠오르지 않아 결국 그만두었다. 이리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대수롭지 않은 사람일 터였다. 중요치도 않은 사람에 굳이 골몰할 필요는 없었다.
취선루는 오수진에서도 제법 높은 건물이다 보니, 별실 창문 너머로 마음이 확 트이는 풍경이 드넓게 펼쳐졌다. 역시 한통의 말처럼 성과는 다른 경치였다.
강줄기를 둘러싸고 생겨난 마을답게 수없이 많은 개울이 마을 곳곳으로 뻗어 있었다. 좁다란 물길에는 자그마한 아치로 다리를 놓았고 다리 옆에는 까만 덮개를 씌운 작은 배가 묶여 있었다.
몇몇 아낙들이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며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따사로운 햇볕을 받은 얼굴에 웃음이 깃들자 더욱더 즐거워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호수의 수면에는 새로 자라난 푸른 연잎이 두둥실 떠다녔다. 층층이 일렁이는 초록 물결이 그의 마음에도 잔잔한 파도를 일으키는 듯했다.
풍경에 취한 초왕이 몸을 일으켰다. 직접 밖을 둘러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부하들도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그가 손을 내저었다.
“아무도 따르지 말거라. 잠시 홀로 거닐고 오겠다.”
가동은 그가 말한 ‘아무도’에 자신은 포함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가동이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곧바로 영구에게 붙들렸다. 영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처럼 기분 좋은 초왕의 모습을 얼마 만에 보는 건데, 그 누구도 방해해서는 안 되었다.
청석판이 넓게 깔린 거리가 마을의 풍족함을 알려 주었다. 초왕은 행인 한 명 없는 조용한 거리를 천천히 거닐었다. 부하들은 위층에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초여름의 햇빛을 받은 그의 뒷모습이, 유독 쓸쓸해 보였다.
처음에는 영구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던 가동도 초왕의 뒷모습을 보고 난 후 이유를 깨닫고 침묵을 지켰다.
초왕은 개울가 쪽으로 방향을 꺾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개울은 바닥이 훤히 비칠 정도로 깨끗해서 떼 지어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백천범이 항아리에 기르던 송사리가 떠올랐다. 그녀는 혹시라도 송사리가 사라질까 봐 밤을 지새울 기세로 항아리를 지키곤 했다. 그가 들여다보자 물고기들은 빠르게 흩어져 개울 곳곳으로 숨어 버렸다.
그가 탄식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그쪽의 물은 조금 혼탁했고 둑에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다. 이끼 틈에서 얼굴을 내민 들꽃이 불어오는 바람에 가벼이 살랑거렸다. 어두운 물속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듯 수면에 잔잔한 물결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아치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천범은 희미한 그림자가 수면 위로 스치는 모습을 보았다. 다시 허리를 곧게 편 그녀는 땀을 훔치고 광주리를 물속에서 건져 올리며 활짝 웃었다. 그녀가 직접 잡은 미꾸라지라면, 절대 문제가 생기지 않을 터였다.
사앵앵의 부탁으로, 사성성은 백천범에게 며칠간 시일을 주었다. 돈을 배상하든지 손해를 메우라는 게 그의 조건이었다. 더는 다른 사람에게 물건을 떼올 수 없던 백천범은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물고기를 잡아 손해를 메우려 했다.
발걸음이 내키는 대로 다리를 건너던 묵용감이 오른쪽 둑으로 꺾어 돌았다. 커다란 버드나무 아래에서 낚시를 하던 까무잡잡한 사내가 낚싯대를 들어 올리니 물고기 한 마리가 튀어 올랐다. 파닥거리는 물고기는 사방에 맑은 물방울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가 낚싯대에서 물고기를 빼내더니 옆에 있는 통에 던져넣었다. 그때,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목청을 높였다.
“주팔朱八이 형, 이건 범이 형 물고기잖아. 왜 형 통에 넣고 그래? 뻔뻔하게.”
주팔이라 불린 사내가 멋쩍은 듯 말했다.
“이게 어딜 봐서 전범이 물고기라는 거야?”
“시치미 떼지 마. 내가 다 봤으니까. 이 낚싯대에서 잡은 거잖아.”
어린아이가 색이 더 진한 낚싯대를 작은 손으로 가리켰다.
“이건 범이 형 낚싯대잖아. 그것도 나랑 같이 만든 거야. 범이 형이 나더러 잘 지키고 있으랬어.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 물고기를 훔치는 사람이 있었네!”
“훔치긴 뭘 훔쳐?”
주팔이 벌컥 성을 내며 말했다.
“그러는 너는? 잘 지키라고 했으면 잘 지키고 있어야지, 어디 갔었는데? 물고기가 미끼만 먹고 가 버리는 줄도 모르면서! 좋은 마음으로 도와주려 했더니 내 탓을 해? 훔치긴 뭘 훔쳐? 전범이더러 직접 와서 얘기하라고 해.”
어린아이는 얼굴부터 귀까지 온통 새빨개져서 소리쳤다.
“그래도 형 통에 넣으면 안 되지!”
묵용감은 멀리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또 전범이었다. 어째서 저 이름이 자꾸 들려온단 말인가? 또, 대체 그는 어디에서 저 이름을 처음 들었단 말인가?
잠시 후, 분쟁이 일단락된 듯 어린아이가 말했다.
“가서 범이 형 불러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주팔이 재촉하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래, 얼른 불러와. 오늘 제법 많이 잡았으니까.”
어린아이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서둘러 뛰어갔다.
묵용감은 문득 불이 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그때다! 전범이라는 이름을 그때 듣지 않았던가. 처음에는 천범으로 들어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성이 전, 이름이 범이었다. 아무래도 그때 그자인 모양이었다.
물고기를 많이 잡았다는 희락의 말에 신이 난 백천범이 광주리를 짊어지고 나섰다.
“가서 봐야겠다. 얼른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