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4화
혼사라는 말을 들으니 사앵앵은 조금 부끄러워졌다.
“혼사를 치르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다른 이들이 흉을 볼까 걱정이에요.”
그녀가 이마 언저리에 난 잔머리를 손가락으로 비비 꼬았다.
“…저는 아직 어리잖아요.”
“어리긴, 네가 그놈보다 몇 달 더 빨리 태어나지 않았느냐. 나이가 세 살 더 많은 여인과 혼인하면 평생 걱정이 없다는 말도 못 들어 봤어? 네가 그 애보다 석 달은 먼저 태어났으니 얼추 비슷하지.
그놈은 어찌 이리 복이 많은 게야? 이렇게 예쁜 딸에, 엄청난 가업까지 독차지할 텐데. 다른 이였다면 기를 쓰고 장가를 들 자리를 그놈은 죽어도 싫다고 야단법석이니 원.”
사성성이 골치가 아픈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바보가 따로 없지. 내 보기엔 양 씨 집안 바보보다 더 모자란 것 같구나.”
전범을 흉보는 말에 사앵앵은 곧바로 발끈했다.
“그래도 패기 넘치잖아요. 기둥서방처럼 보이기 싫어서 그러는 거라고요.”
사앵앵은 최선을 다해 전범을 감쌌다. 처음에는 전범의 외모에 반했지만, 이런 일들을 겪고 나니 그가 더욱더 대단한 사람으로 다가왔다. 누가 봐도 사내치고는 허약한 외모였지만, 그녀의 눈에는 누구보다 건장하고 용맹한 데다 냉혹한 사내였다.
* * *
사앵앵이 더는 나타나지 않으니, 백천범은 즐거운 날들을 되찾았다. 그녀는 이장의 말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마을의 실권을 장악한 사람이니 누구라도 그에게 밉보이려 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녀는 즐거운 마음으로 분주히 돌아다녔다. 월규가 수놓은 물건을 배달하기도 하고, 월향이 만든 간식을 팔기도 했다. 틈틈이 미꾸라지를 잡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매일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면 취선루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때마다 사앵앵은 위층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민망해하더니, 나중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백천범은 누구보다 솔직한 성격이었다. 사앵앵과 껄끄러운 일은 있었다지만, 원수를 질 만한 사이도 아니고 오히려 그녀의 시원시원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어쨌든 더는 성가시게 하지 않으니 그녀도 굳이 지난 일을 따질 생각이 없었다.
백천범이 웃는 낯으로 화답하자 사앵앵은 다시 예전처럼 그녀가 잡은 물고기들을 사들였다. 예전의 우정을 되찾은 듯 두 사람은 스스럼없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취선루에 물고기를 팔면 시장에서 팔 때보다 값도 잘 쳐주었고, 사들이는 양도 많았다. 그녀가 잡은 양이 적어서 물건을 더 들여와야 한다고 불만을 토로할 정도였다. 장사할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백천범은 시장보다 조금 더 낮은 가격으로 생선과 새우 등을 대량으로 사들인 후 다시 취선루에 팔았다.
취선루는 그녀가 얼마를 가져오든 전부 사들였다. 그녀가 중간에서 가져가는 돈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워낙 파는 양이 많다 보니 제법 쏠쏠했다. 백천범은 더욱더 적극적으로 물건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간식 장사는 접고 이 일에만 몰두해 돈을 잔뜩 벌고 싶었다.
결국 그녀는 취선루와 계약서를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각종 수산물을 장기간 그녀에게 구입한다는 내용이었다. 계약이 체결된 후 거액의 계약금까지 받았다. 두 눈이 반짝일 만큼 새하얀 은자를 본 그녀는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렇게 큰돈을 만져 본 게 처음은 아니었다. 청자를 팔아 오천 냥을 벌기도 했지만, 성취감이 달랐다. 이번에는 그녀가 스스로 노력해서 번 돈이니 더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녀는 곧장 시장으로 뛰어가 월향과 월규에게 줄 고운 비단을 샀다. 계절이 바뀌었으니 예쁜 옷을 선물하고 싶었다. 가게를 나오는 길에 모퉁이에 놓인 하늘색 무명천이 눈에 들어와 그녀는 고민 끝에 자신의 몫도 한 필 샀다.
옷감 세 필을 짊어지고 가던 그녀는 빗자루와 키, 물통, 커다란 대나무 광주리, 돼지고기 두 근, 소고기 한 근, 병아리 다섯 마리, 각종 채소 등을 잔뜩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월향은 돌아온 백천범을 보자마자 까무러치게 놀랐다.
“이게 다 뭐야?”
백천범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샀어.”
“돈이 어디서 났어?”
“벌었지. 사씨 아저씨가 계약금을 엄청나게 주셨어. 앞으로 석 달간 수산물은 전부 나한테 사겠대. 월향 누나, 우리 곧 부자 되겠어.”
백천범의 말에 월향도 크게 기뻐했고 월규와 함께 물건을 정리했다. 월향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돈이 생겼으니 전 씨한테 외상값부터 갚자.”
백천범이 물건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얼른 갚으려고 했지. 안 그러면 다음부터는 외상 자체가 어려울지도 몰라. 하여튼 전씨 아저씨도 참 좋은 사람이라니까. 아, 유유한테 줄 엿도 샀는데 같이 줘야겠다!”
그녀는 광주리에서 엿을 챙겨 재빨리 가게로 뛰어갔다.
* * *
하루하루가 지나며 날씨는 점점 더워졌다. 월규가 새로 만든 여름옷을 입은 백천범은 고개를 숙이고 옷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강남 지역의 소년들은 이맘때 짧은 웃옷을 입곤 했다. 월규는 그녀에게도 그 옷을 한 벌 만들어 주었다. 단정한 매무새에 매듭을 가지런히 달아 놓으니 제법 깔끔해 보였다.
반년째 사내아이 행세를 하고 있지만 그녀도 여인이다. 나이도 나이인지라 투박한 옷보단 조금이나마 멋을 부리고 싶었다. 그녀는 월규를 조른 끝에 옷자락 끝에 대나무 잎을 수놓을 수 있었다. 옷감과 비슷한 색의 실을 써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은근한 멋이 묻어났다.
새 옷을 입고 기분 좋게 밖으로 향한 그녀는 취선루 앞에 서 있던 사성성과 마주쳤다. 백천범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평소와 달리 불그죽죽했다. 그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그녀에게 노성을 터트렸다.
“전범, 나한테 사기를 친 거야? 어제 들여온 고기들이 오늘 절반이나 죽었어. 내가 분명 사흘에서 닷새는 살 수 있는 활어만 산다고 했지? 계약서에도 똑똑히 써넣었잖아. 하루 만에 죽어 버렸으니 계약서에 적힌 만큼 물어내!”
백천범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말도 안 돼요! 하룻밤 사이에 절반이 죽었다고요?”
“내가 뭐 하러 널 속이겠어?”
사성성은 언짢은 듯 주루 안으로 들어가며 손짓했다.
“못 믿겠으면 네가 직접 보든가.”
백천범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물고기를 기르는 뒤뜰 연못에 배를 뒤집고 죽은 산천어와 잉어, 붕어가 둥둥 떠다녔다. 점원 두 명이 뜰채로 죽은 물고기를 건져 옆에 놓인 나무통에 담고 있었다.
한쪽에 있던 새우와 게도 거의 다 죽어 있었다. 백천범은 어안이 벙벙해져 물고기들을 살피다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어제 가져올 때만 해도 싱싱했는데, 갑자기 죽을 수가 있어요?”
“그거야 네가 잘 알겠지.”
사성성이 코웃음을 치더니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우리 딸이 워낙 성실하다고 해서 계약서까지 썼더니 이리 수작을 부릴 줄이야. 경고하는데, 이 몸이 장사 경력만 수십 년이야. 그동안 안 겪어본 일이 없으니 이 정도 장난질은 바로 알아본다고.”
백천범이 다급히 항변했다.
“저는 정말 결백해요. 제가 어찌 주인 어르신을 속이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일은 계약서대로 꼭 책임질게요.”
“흥. 시원시원하군, 좋아.”
사성성이 하얀 이를 드러내 보였다.
“계약서대로라면 계약금을 전부 돌려주고 은자 백 냥을 배상하면 된다. 그래야 셈이 맞아떨어져.”
백천범은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다.
“어, 얼마라고요?”
그때 사앵앵이 다가와 사성성의 손을 붙잡고 대신 울부짖었다.
“아버지, 범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니에요! 분명 다른 사람한테 속은 거예요. 범이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사앵앵의 말에 감격한 백천범이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부탁했다.
“주인 어르신, 부탁드립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셔요.”
사성성은 한참 동안 난감한 표정을 지은 끝에, 어쩔 수 없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알았다. 앵앵이의 체면을 봐서라도 기회를 한 번 더 주마. 대신,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절대 봐주지 않겠다.”
“예, 예. 물론입니다.”
백천범이 허리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예요. 믿어 주십시오.”
제법 오랜 시간 물고기를 잡아 온 덕분에, 백천범은 전문가만큼은 아니더라도 보는 눈이 있었다. 그녀는 주의 깊게 살피지 않고 물건을 산 자신을 탓했다. 아무래도 장사꾼이 상태가 좋지 않은 생선을 멀쩡한 것처럼 꾸며서 판 듯했다. 앞으론 꼼꼼히 확인해야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어떤 예측은 빗나가곤 한다. 백천범이 매번 꼼꼼히 확인했는데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취선루에 넘길 때만 해도 팔딱거리며 살아 있던 물고기들이 하룻밤 사이에 절반이나 죽어 버렸다.
사성성의 얼굴은 잿더미처럼 칙칙해졌고, 백천범은 울상이 되어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계산대에 있던 관리인이 열심히 주판을 튕기며 그녀가 물어야 할 배상금을 계산했다.
마침내 계산을 끝낸 관리인이 금액을 부르는 순간, 백천범은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집을 팔지 않는 이상 절대 물어낼 수 없는 금액이 그녀의 귓가를 맴돌았다.
* * *
어느새 한 달이 흘렀다. 한 장군은 각 마을의 훈련 성과를 확인할 겸, 직접 돌아볼 채비를 마쳤다. 그가 수성에 있는 초왕에게 보고하자,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 일은 네게 맡겼으니 알아서 하거라. 본왕에게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다.”
한통은 사실 초왕에게 함께 가자고 권하려던 참이었다. 초왕과 오랜 시간 함께한 그는 초왕의 부하인 동시에 친구이기도 했다. 그간 말수가 부쩍 줄어든 초왕은 통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한통은 초왕의 저조한 기분을 잘 알고 있었다. 예전의 초왕은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다. 성질을 부리거나 큰소리로 호통을 치고, 화가 나면 발을 들어 가슴팍을 걷어차기 일쑤였다.
지금은 예전의 제멋대로인 모습과는 달랐다. 성격이 크게 변했다. 그는 아무리 큰일이 생겨도 늘 무덤덤하게 반응했고,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통은 그 안에서 애끓는 감정을 볼 수 있었다. 초왕이 이렇게 애간장을 태우다니, 결국 다 여인 때문이 아닌가.
그는 작년 초왕에게 보고를 올리기 위해 도성으로 돌아왔던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늘 위엄이 넘치던 초왕은 그날 술자리에서 누군가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데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당시 그와 이천행은 화들짝 놀랐다. 누가 감히 초왕의 심기를 건드리는 걸까. 두 사람이 더욱 놀랐던 이유는 별수 없다는 듯한 초왕의 표정이었다. 초왕조차 손쓸 수 없는 이가 있다니! 세상 사람 중에 그리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단 말인가?
두 사람은 나중에서야 그 장본인이 초왕비임을 깨달았다. 심지어 초왕은 그들에게 여인을 대하는 방법을 묻기까지 했다.
초왕비가 도망친 후 초왕은 그들에게 밀서를 보냈다. 왕비를 찾으러 각지를 둘러보라는 명이었다. 하지만 단서도 없이 무턱대고 찾았으니, 좀처럼 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초왕은 차츰 말수가 줄어들었고, 마음의 벽을 쌓아 자신을 그 안에 가두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