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313)화 (312/1,192)

제313화

이번에 소집될 사내들의 연령대는 열여섯 이상부터 마흔 살 이하의 청장년층이었다. 이장이 유무전에게 특별히 식사를 대접한 데에는 다른 뜻이 있기도 했다. 유무전이 흡족한 기색을 보기기에, 그는 이때다 싶어 입을 뗐다.

“저희 마을에 막 행차하셨으니 폐를 끼칠 수 없음을 알지만…….”

유무전이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 단, 본 장군은 사욕을 채우려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이 아님을 명심하시오.”

“암요, 여부가 있겠습니다. 절대 그런 일이 아닙니다.”

이장이 황급히 두 손을 맞잡고 예를 갖췄다.

“소인이 감히 그런 일로 장군님께 폐를 끼치겠습니까. 실은, 소인에게 처조카 한 놈이 있는데 올해로 만 열다섯이 되었습니다. 그저 소집 명부를 작성할 때 장군님의 부하들께서 오해하실까 미리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유무전은 이장의 말을 듣고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만 열여섯 살이 되지 않았다면 걱정할 필요 없소. 호적을 조사할 뿐이니 잘못될 일은 없을 것이오.”

사성성이 미소를 지으며 거들었다.

“실은 이장님의 처조카가 소인의 사위인데, 지난달에 꼭 만 열다섯이 되었습니다.”

유무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열다섯인데 벌써 혼인을 하였소?”

“아뇨, 곧 혼사를 치를 예정입니다. 어려서부터 어울리던 죽마고우라 서로 워낙 절친하지요. 올해 혼담이 오갔으니 내년쯤 혼인을 치를 예정입니다. 장군님께서도 축하주 한잔하러 와 주십시오.

담이 워낙 작은 탓에 장병 나리들만 봐도 몸을 벌벌 떠는 놈이지만, 모쪼록 장군님께서 편의를 봐주신다면야 이장님과 소인은 감읍할 따름입니다.”

이장의 청이었다면 그리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사성성까지 거드니 사양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한 달간 자신의 숙식을 위해서라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규정을 어기는 게 아니라면 문제 될 것 없소.”

그가 느긋하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처조카의 이름이 어찌 되오?”

“성은 전 씨고 이름은 범, 외자입니다.”

“전범이라……. 알겠소. 훈련은 오지 않아도 되오. 본 장군이 부하들에게 일러두겠소.”

웃음꽃이 핀 이장과 사성성은 술을 따르고 음식을 덜어 주며 유무전을 정성껏 대접했다.

전씨 남매는 아직 호적부에 등록되지 않았으니 전범이 만 열여섯이 되지 않았음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전쟁 중에는 내력이 의심스러운 사람이 의심을 받기 쉬웠다.

불필요한 일을 막기 위해선 사전에 손을 써야 했다. 유무전을 마을에서 가장 좋은 객잔에 묵게 하고 정성껏 대접하면 쉽게 처리할 수 있다.

배불리 먹은 유무전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를 뜨자 이장과 사성성은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무언의 미소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한 명은 조카를, 한 명은 딸을 위해 목적을 달성했으니.

* * *

“역시 인맥이 있으니 간단하네. 이게 다 월향 언니 덕분이야.”

월규가 차를 우려 월향에게 건넸다.

“언니 덕에 우리 범이가 화를 면하게 되었잖아.”

차를 건네받은 월향이 월규를 흘겨보며 나무랐다.

“범이는 내 동생이기도 하거든?”

“어쨌든 고마워, 월향 누나.”

백천범은 두 손을 맞잡고 월향에게 깊숙이 절을 올리더니 헤헤 웃어 보였다.

“누나가 이장님을 안 찾아갔으면 진짜 큰일 났을 거야.”

세 사람은 농담을 섞어가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양보전이 들어오기에 백천범은 곧장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

“매형!”

양보전은 조건 반사적으로 품에서 동전을 꺼냈다.

지켜만 보고 있을 리 없던 월규도 서둘러 다가왔다.

“형부, 형부…….”

양보전은 천범과 월규의 공세에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거렸다.

“그만, 그만. 오늘은 돈이 얼마 없단 말이야.”

월규와 백천범은 깔깔거리며 웃었고 월향도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양보전의 손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

“바보, 한 번 부를 때마다 돈을 주면 황금이 산처럼 쌓여 있어도 다 빼앗기고 말아요.”

월향은 가볍게 타박하더니 고개를 돌려 백천범과 월규를 꾸짖었다.

“너희도 그래. 그렇게 놀리면 재미있니? 너희가 자꾸 놀리니까 안 그래도 모자란 사람이 더 모자라 보이잖아.”

양보전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더니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보 아니에요. 우리 다 가족이에요. 가족한테 주는 건 제 논에 물 대기예요.”

월규가 깜짝 놀라며 양보전을 바라보았다.

“와! 말솜씨가 청산유수네요, 형부!”

백천범도 놀란 표정이었다.

“대단해요, 매형! 언제 그렇게 어려운 말을 배웠어요?”

양보전은 부끄러운 듯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쭈뼛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난 마당 청소하러 가요.”

세 여인은 배를 잡고 웃었다. 양보전은 정말로 성실한 사람이었다. 매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해진 시간에 맞춰 찾아왔다. 조정 대신들이 조회에 출석하는 것보다 시간을 잘 지킬 정도였다.

도착해서는 늘 집안일을 도왔다. 요령을 피우거나 중간에 돌아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월향이었지만 만나 보기로 한 뒤에는 밥도 차려주고 제법 잘 지내며 가까워졌다.

양보전이 조금 모자란 사람인 건 분명했다. 여느 연인들처럼 사랑을 속삭인다거나 농담을 주고받는 일들은 아예 모르고 있었다. 그는 마치 월향을 자신의 주인처럼 대했다. 그런 그에게 그녀라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했다. 얼핏 보면 머슴이 들어온 걸로 착각할 정도였다. 월향은 그가 가여웠고, 어느새 그를 손길이 필요한 아이처럼 여겼다. 평소에는 온화하게 대했지만, 여러 번 가르쳐 주어도 잘못을 저지르면 눈을 부릅뜨며 엄하게 대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아지니 월규와 백천범도 양보전에게 차츰 살갑게 대해 주었다.

이렇게 군사 훈련이라는 화를 면하긴 했지만, 백천범의 골칫거리는 아직 남아 있었다. 사씨 부녀가 그녀를 노리고 있는데 도무지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사성성은 뚝심이 있어 원하는 일은 뭐든 해내는 성격이었다. 더욱이 누구나 쓸데없는 고집이 하나씩 있는 것처럼, 어려운 일일수록 더욱더 해내려는 의지가 강했다. 피는 못 속인다고, 사앵앵도 그런 성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녀 역시 한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사성성보다 더 고약할 지경이었다.

매번 백천범에게 퇴짜를 맞으니 사앵앵은 점점 더 과감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대낮에도 몇 번씩 백천범의 앞을 막아서서 대답을 강요하기 일쑤였다.

백천범은 그녀에게 붙잡힐 때마다 눈물을 머금고 도망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사앵앵은 발이 느렸기에 비교적 손쉽게 그녀를 따돌릴 수 있었다.

이러다 보니 사앵앵을 마주치는 게 정말 싫어졌다. 그러나 취선루는 마을의 중요한 길목 중앙에 있어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희락과 유유를 방패로 삼았다. 두 아이를 앞장세우고 따라가다가 사앵앵이 나타나면 곧바로 도망치는 식이었다.

하지만 백천범이 잔꾀를 부린다고 해서 당하기만 할 사앵앵이 아니었다. 백천범이 두 아이를 앞잡이로 만든 것처럼 그녀는 가게 점원을 보초로 세웠고, 백천범이 지나가면 신호를 받아 그녀를 습격했다.

또다시 사앵앵에게 붙잡히자 백천범은 하는 수 없이 집에 머무르는 방법을 택했다. 밖에서 피해 갈 방법이 없으니 집에 숨는 방법밖에 없었다. 결국 사앵앵은 기어이 집까지 찾아왔다. 문을 열어 주진 않았지만, 양보전이 들어오는 틈을 타 사앵앵도 들어오고 말았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처음엔 사소한 소란으로 여기고 웃어넘겼다. 남자가 여자를 쫓아다니는 일은 흔했지만, 이런 상황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더구나 부잣집 아가씨가 가난한 집의 아들을 쫓아다니는 일은 더더욱 보기 드물었다.

오죽 간절하면 저런 모습을 보일까. 사람들의 생각은 점점 그렇게 기울어졌다. 다들 사앵앵의 편을 들기 시작했고, 백천범을 만나는 사람마다 그만 사 씨 아가씨의 마음을 받아 주라고 성화를 부렸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큰일이 날지도 몰랐다. 하는 수 없이 월향이 나서서 이장에게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날마다 찾아와 성가시게 하면 서로간에 미움만 더 커지지 않겠는가.

이장은 그녀의 말을 사성성에게 전했고, 사성성은 자신의 딸에게 그 말을 전했다. 사앵앵이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허리에 손을 얹고 사성성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면서요. 아버지께서 알려 주신 방법이잖아요.”

사성성이 멋쩍은 듯 턱을 긁적였다.

“그게 말이다……. 이 아비는 그 방법으로 네 엄마와 혼인을 했거든. 나 때는 효과가 있는 것 같지만 지금은 영 신통찮은 모양이다. 이렇게 날마다 쫓아 다녔다간 역효과가 나겠어. 다른 방법을 한번 생각해 보자꾸나.”

사앵앵이 울상이 되어 말했다.

“그랬다가 제 마음이 식은 줄 알면 어떡해요. 차라리 더 몰아붙이는 게 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곧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여인이에요. 매일 길을 막아서는 게 쉬운 일도 아닌데 범이는 너무 야박하게 굴잖아요. 어쩜 그리 눈 하나 깜짝 안 할 수 있어요? 피, 우리 집 식구가 되면 제가 본때를 보여 주고 말겠어요!”

사성성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압박을 하지 않으면 어림도 없을 테니 내버려 둘 수만은 없고……. 그래도 다른 방법을 쓰는 게 좋겠다. 확실히 걸려들 만한 방법이 떠오를 때까지 일단 기다리자꾸나.”

그가 곧 음흉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땐 도망치고 싶어도 방법이 없을 게다. 이 아비의 손아귀에서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테니까!”

그가 다섯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꼭 전범을 손아귀에 넣는 듯한 동작이었다.

사앵앵은 그의 표정을 보더니 별안간 몸을 덜덜 떨었다.

“아버지, 무얼 하시려고요? 아버지의 사위가 될 사람이에요. 어찌 그런 사람에게…….”

“바보 같긴. 무슨 생각을 하는 게냐. 이 아비가 설마 해를 가하기야 하겠느냐? 전범은 멀쩡한 모습으로 우리 집 데릴사위가 될 거다.”

“대체 어찌하시려고요?”

사성성이 천장을 바라보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나도 아직 생각 중이다.”

사앵앵이 맥이 빠진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결정된 것도 없는데 자신 있게 말씀하신 거예요?”

“오늘은 당분간 그놈을 찾아가지 말라고 말해 주려 한 게야. 이 아비가 좀 더 고민해 볼 테니 결정이 되는 대로 단숨에 해치우자꾸나. 정혼도 건너뛰고 곧장 혼사를 치르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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