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2화
사앵앵의 아버지는 사성성史晟誠이라는 사내로, 수성에도 가게가 있어 두 곳을 오가느라 마을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백천범도 거의 본 적이 없었기에 사성성을 엄한 성격에 무뚝뚝하고 잘 웃지 않는 사람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딸을 끔찍이 아껴 체면이 깎이는 것도 개의치 않고 직접 혼담을 넣으러 온 것이었다.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처음에는 사성성도 내키지 않아 했지만, 방에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하는 딸의 고집을 못 이기고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타지에서 온 멀쑥한 청년 전범이 두 누이와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자식이 사앵앵뿐이니, 데릴사위를 찾아야 했다. 그렇다고 아무나 사위로 들일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큰 가업은 아무나 이어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우선은 사위의 가족들이 사씨 집안 재산을 노리지 못하도록, 식구가 없는 사람이 좋았다. 그다음으로는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이여야 했다. 장사를 잘 이끌어서 사씨 집안의 가업을 발전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조건이 있었다. 사위로 들어올 자는 사앵앵과 사씨 집안에 진심을 바쳐야 했다. 혹여라도 가업을 독차지하고 다른 여인을 아내로 들이는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
사앵앵이 열다섯 살이 된 해부터 그는 암암리에 데릴사위로 들여올 신랑감을 찾았지만, 마땅한 사내가 없었다. 그로서도 고민이 커지던 와중에 사앵앵이 마음에 드는 사내를 고른 것도 모자라 반드시 그자에게 시집을 가야겠다며 떼를 쓰지 않겠는가.
백천범을 위아래로 훑어보니 조금도 성에 차지 않았다. 큰일을 맡기엔 몸이 너무 허약해 보였다. 외모는 그래도 제법 멀끔했고, 세세히 보니 여인보다 더 예쁜 구석이 있었다. 관상학에서는 사내가 여인을 닮으면 복이 많은 팔자라고 했다.
그러나 목소리마저 여인와 흡사했다. 목소리까지 닮았다면, 불길한 징조였다. 동월국에는 사내가 여인의 목소리를 내면 부인의 팔자가 사나워진다는 속설이 있었으므로.
앵앵은 오직 외모만 보고 전범에게 반했으리라. 이런 사내와는 절대 연을 맺게 둘 수 없었다. 아버지로서 반드시 막아야 했다.
그렇다고 혼담을 안 꺼내자니 딸의 고집을 꺾을 방법이 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형식적인 몇 마디를 던졌다. 백천범 역시 혼담을 승낙할 리 만무했기에 두 사람은 의미 없는 몇 마디를 주고받았고, 혼담도 흐지부지되었다.
물론 사앵앵은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체면이 깎이면서까지 혼담을 넣어도 전범이 거절했으니, 그녀도 더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종일 한숨만 내쉬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며칠 만에 얼굴이 핼쑥해져 버렸다. 딸이 걱정되었던 사성성은 수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오수진에 남아 그녀를 계속 돌보고 있었다.
어느 날, 하릴없이 시장을 거닐던 그는 미꾸라지를 파는 전범을 발견했다.
마른 체격이어도 장사하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활짝 웃으며 큰소리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데, 낭랑한 목소리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여인의 목소리처럼 들려도 그리 어색하진 않았다. 그는 멀찍이 서서 전범을 지켜보았다. 홀로 하는 장사였지만 그의 호객 행위에 곧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전범이 재빨리 미꾸라지로 가득한 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여러 장사꾼이 있었지만 그의 손님이 가장 많았고 장사도 가장 잘되었다. 사성성이 눈여겨본 점은, 다른 장사꾼들이 그를 시기하기는커녕, 전범이 바빠 보이자 팔을 걷어붙이고 그를 도와준다는 사실이었다.
사성성도 수십 년 동안 장사를 해 온 덕분에 사람 보는 눈이 남달랐다. 다른 건 몰라도, 전범은 제법 영리한 사람이었다.
한 할머니가 손자를 데리고 미꾸라지를 사니 전범이 그들에게 간식을 건네주었다. 그들은 간식이 맛있다며 칭찬 일색이었다. 전범은 내일 몇 개 더 줄 테니 일찌감치 찾아오라고 했다.
미꾸라지를 들고 간식을 먹던 손자와 할머니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한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돌아갔다. 보아하니 내일 간식을 사러 오겠다고 하는 듯했다.
그는 전범을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는 아직 어려도 머리가 제법 영리하니, 잘만 가르치면 크게 될 재목이었다.
유심히 살펴본 끝에, 그는 전범에게 좋은 인상을 느꼈다. 목소리쯤은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듯하니 몇 년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될 터였다.
전범은 마음에 들었지만 그에게는 위로 두 명의 누이가 있다. 큰누이는 양씨 집안 바보 아들과 혼사가 예정되었다고 들었다. 두 집안 모두 이 동네의 대부호인 데다 바보 아들의 외숙부가 이장이니 혼사를 치르면 비빌 언덕이 생기는 셈이다. 어쨌든 사돈으로 이어지게 된다면 그에게 나쁠 건 하나도 없었다.
누이들이야 시집을 가면 친정에 손을 벌릴 일도 많지 않을 터. 이렇게 보니 전범은 식구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길을 걸으며 하나씩 계산하던 사성성은 마침내 전범이 좋은 신랑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마냥 철없는 딸인 줄만 알았더니 그보다 더 좋은 신랑감을 고를 줄이야, 아주 제법이 아닌가. 그는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우며 집으로 향했다. 그가 마음을 정했으니, 이 일은 결판이 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앵앵은 아버지가 자신보다 더 전범을 신경 쓰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전범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전범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버지가 전범에게 반한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사실 가능성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녀의 눈에는 멋있기로 소문난 공자들보다도 전범이 더욱더 잘생겼으므로.
생각할수록 더 그럴싸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사내를 훔쳐 가려는 아버지의 행동이 파렴치하고 창피할 따름이었다. 어쩐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재혼하지 않더라니. 그녀는 이제껏 아버지가 어머니를 잊지 못하는 거라 믿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여인이 아니라 사내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남몰래 괴로워했다. 화도 나고 창피했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가여웠다. 동월국에서 사내가 사내를 좋아하면 축복받는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는 딸의 사내를 빼앗으려는 행위가 너무나 염치없게 느껴졌다. 사성성을 향한 그녀의 눈빛도 점점 더 원망으로 물들어 갔다.
그녀의 원망이 숨길 수 없을 만큼 커지자 사성성도 자연스레 딸의 변화를 눈치챘다. 사앵앵이 매번 원망에 가득 찬 눈으로 쏘아보니, 그는 결국 딸에게 호통을 쳤다.
“어찌 그런 눈으로 아비를 보느냐? 네가 날 원망한다는 거 안다. 혼담이 성사되지 않았으니 원망스러울 만도 하지. 하지만 당사자가 싫다는데 나란들 어찌하겠느냐?”
사앵앵이 여전히 원망에 찬 시선을 보내며 코웃음을 쳤다.
“범이가 거절한 거 맞아요? 아버지가 사위로 삼기 싫은 게 아니고요?”
애지중지 키운 딸이 울며 난리 칠 수는 있어도, 이렇게 독을 품고 아버지를 대하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사성성이 버럭 화를 냈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난 네 아비라고!”
폭발 직전이었던 사앵앵도 소리를 지르며 맞섰다.
“네, 저도 아버지 딸이에요. 세상에 이런 아버지가 어디 있어요? 딸의 사내를 빼앗다니, 그런 뻔뻔한 아버지가 어디 있냐고요. 제가 다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들겠어요!”
탁자를 나르던 점원 두 명이 그녀의 외침에 손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탁자가 바닥에 떨어졌지만 두 점원은 탁자를 뒤로하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주인장의 엄청난 비밀을 들어 버렸으니 입을 막고자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못 들은 척 자리를 피하고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편이 나았다.
사성성은 입을 떡 벌리고 서서 딸을 바라보았다. 딸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그는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결국 그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물었다.
“뭐라고 했느냐, 내가, 이 아비가 네 사내를 빼앗았다고?”
오랫동안 가슴에 담고 앓기만 했던 말을 꺼내니, 사앵앵은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녀가 눈시울을 붉히면서도 냉랭하게 웃었다.
“왜요, 차마 인정은 못 하시겠어요?”
분노가 치민 사성성은 얼굴이 아예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부들부들 떨었지만, 어쩐 일인지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그러다 사성성이 가슴을 움켜쥐더니 천천히 의자에 주저앉았다. 파랗던 얼굴이 어느덧 하얗게 질려 쌕쌕거리는 숨만 내뱉었다.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기에, 사앵앵은 겁에 질렸다. 그녀가 천천히 다가와 입을 열었다.
“아, 아버지. 괜찮으세요?”
사성성은 심호흡을 몇 차례 내뱉으며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았다. 어느 정도 혈색이 돌아오자 그가 딸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어느 날 죽거든 너 때문에 화가 치밀어 죽은 줄 알거라.”
두 사람이 냉정을 되찾으니 오해는 쉽게 풀어졌다. 그가 일의 전말을 털어놓자 부녀는 화기애애한 모습을 되찾았다. 이제 의견이 일치했으니, 남은 일은 하나뿐이다. 어떻게 해서든 전범을 사 씨 집안의 데릴사위로 데려와야 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머리를 맞댔지만 마땅한 수를 떠올리지 못했다. 부녀가 고민에 잠겨 있는데, 관리인이 문을 두드렸다.
“주인어른, 이장님이 관리 나리를 모시고 식사를 하러 오셨습니다. 인사라도 하시겠습니까?”
높은 손님이 오면 주인이 마땅히 찾아가 인사를 해야 하는 법이었다. 그는 일단 사앵앵을 남겨 두고 관리인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 * *
이장은 한 장군이 오수진으로 파견을 보낸 독군을 데려왔다. 유무전劉茂全이라는 사내로, 사장풍보다는 한 계급 높은 좌원佐元 장군이었다. 군대 계급을 잘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장군이라는 말에 그저 대단한 사람으로 여겼고, 이장도 예를 갖추며 극진히 대했다.
장군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자리였으니 자연스럽게 취선루에서 가장 값비싼 음식을 주문했다. 각종 산해진미가 한 상 가득 차려지자 향긋한 냄새가 기분 좋게 코끝을 간질였다. 유무전은 반년 가까이 행군을 하며 전쟁을 치렀기에 이토록 호화로운 밥상과 좋은 술을 본 게 언제였는지 까마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화색을 보이며 두 눈을 반짝였고, 젓가락을 들기도 전에 칭찬을 늘어놓았다.
이장이 뿌듯한 웃음을 보였다.
“장군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니 참 다행입니다. 장군님께서 세 끼 모두 이곳에서 드실 수 있게 준비해 두겠습니다. 괜찮으신지요?”
유무전이 별안간 얼굴을 굳혔다.
“초왕께서는 군대를 엄히 다스리시오. 장군의 숙식은 군의 규정을 따라야 하오. 본 장군이 규율을 어기게 할 셈이오?”
“장군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고생도 마다치 않고 먼 길을 오셨는데 어찌 돈을 쓰십니까? 숙식은 저희가 책임질 테니 부디 장군님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건 안 될 일이오.”
유무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군의 규율은 아주 엄정하오. 본 장군이 관례를 깰 수는 없소.”
옆에 있던 사성성이 얼른 끼어들었다.
“물론입니다. 장군님의 청렴한 명성을 어찌 감히 더럽히겠습니까. 그렇다면 장군님이 지켜야 할 규율에 맞춰 드리는 건 어떠신지요? 주루의 모양새는 따지지 마십시오. 어쨌든 작은 마을이라 성안에 있는 주루와는 견줄 수도 없지요.
장군님의 규율대로 고기와 채소 요리를 섞어 일곱 개 정도의 찬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곧 위층의 별실을 정리하라 분부할 테니, 부디 그곳에서 묵으십시오. 쓰시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정리해 두겠습니다. 어떠십니까?”
유무전이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해 준다면 참 좋을 듯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