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1화
한 장군이 나가자 곧 태자가 들어오더니 장난스럽게 물었다.
“우리 초왕야께서는 무슨 일로 이리 바쁘시답니까?”
초왕이 미소를 띠며 올려다보았다.
“형님이야말로 공사다망하시지요. 아침부터 밤까지 고생이 많으십니다. 자질구레한 일은 아랫사람들에게 맡기십시오. 그러다 몸 상하시겠습니다.”
태자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동궁에서 하던 일에 비하면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성을 다스리는 일과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엄연히 다르지 않더냐.”
태자는 늘 분명하게 뜻을 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사리에 밝으니, 작은 실마리만으로도 서로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초왕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문다고 생각하십니까?”
태자가 대답 대신 화제를 돌렸다.
“난강 쪽 일은 어찌 되어가느냐?”
“난강 이북은 황제의 땅이니 암암리에 진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천행을 보내두었습니다. 아직 유헌劉軒을 만나진 못했겠지요.”
“자신이 있는 게냐?”
“이천행이 하기 나름입니다.”
“유헌에 대해서는 나도 조금 들었다. 불량한 이들과는 거리를 두는 온화한 성격에 누군가와 결탁하지도, 가깝게 지내지도 않는다지. 세상일에 무관심해 보이는 사람일 수록 그 속내를 알기 힘든 경우가 많다. 조심스럽고 신중한 성격이니 결정을 내리기 어렵겠지. 바로 투항하지 않고 시간을 끈다면 우리에게 득이 되지 않겠구나.”
묵용감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공격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태자는 옅은 웃음을 보이며 답했다.
“우리의 병력으로 유헌을 치는 일은 그리 문제 되지 않는다. 시간이 길어질 수록 황제의 군대에 시간을 벌어주는 셈이 아니냐. 난강 이북에서의 전쟁은 별 볼 일 없는 일이다. 위수에서의 전쟁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니, 잊지 말거라.”
“전쟁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엄수의의 사례가 있으니, 유헌도 똑같은 짓을 저지를까 우려됩니다. 수성도 재건 중이고 병력 또한 부족한 실정입니다. 방금 한통이 제법 괜찮은 방안을 내놓아서 그리 하라고 지시해 두었습니다. 당분간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태자가 그를 빤히 응시했다.
“…이곳에 남아 있으려는 다른 이유가 있느냐?”
초왕이 웃으며 되물었다.
“어찌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아니다. 그저 한번 물어보았다.”
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볼일이 있어 이만 가 봐야겠다. 조만간 술이나 한잔하자.”
초왕은 선선히 대답하고 그를 문 앞까지 배웅했다.
태자가 질문한 이유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을 멈추는 것은 예전의 그로서는 절대 염두에 두지 않을 일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승세를 몰아 적군을 추격하고, 단번에 임안성까지 쳐들어갔을 터였다.
그러니 태자의 생각이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았다. 진즉에 이곳을 떠나는 게 옳았다. 행군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일은 머뭇거리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불확실함과 변수, 돌발 상황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떠나는 게 옳았다. 몇몇 부하들도 이 일로 그를 찾아왔지만, 그는 결정을 유보하고 있었다.
사장풍의 속내를 분명히 알고도 싶어서인지도, 어쩌면 자그마한 기대를 품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다른 성과는 달리 이곳에 무언가 있다는 생각이 그를 주저하게 했다. 그녀가 이곳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자꾸만 이 성이 마음에 걸리고, 자꾸만 확인하고 싶었다. 까닭 없는 이 마음을, 그조차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 * *
방으로 돌아온 태자는 이소로를 불러들였다.
“요즘 가동과는 어찌 지내고 있느냐?”
하얀 피부를 가진 이소로가 공손히 답했다.
“워낙 유쾌한 성격이라 잘 지내고 있습니다.”
태자는 무표정한 표정을 유지하며 나지막이 물었다.
“왕비는 정말 못 찾은 게 확실하더냐?”
“예. 가동이 그리 말하였습니다. 왕비는 이곳에 없는 게 틀림없다고 합니다.”
태자가 손가락에 낀 옥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한데도 어찌 이곳을 떠나지 않는단 말이냐?”
이소로가 답할 수 없는 물음인 만큼, 그는 침묵을 내놓았다.
“그만 가 보거라.”
태자가 손을 휘저으며 덧붙였다.
“가동을 예의 주시하거라. 무슨 일이 있거든 곧장 나에게 보고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이소로는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태자가 또다시 그를 불러 세웠다.
“왕석王石 쪽은 별다른 소식이 없더냐? 초왕이 아직 유헌을 만나지 못했다고 하니 방법을 생각해 보라고 해야겠다.”
이소로가 조금 헷갈리는지, 말끝을 흐렸다.
“전하의 말씀은…….”
“내가 원하는 건 속전속결이다. 방법은 그에게 생각해 두라고 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이소로는 인사를 올린 뒤 곧장 밖으로 향했다.
태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듯했다. 새로운 지역 설계도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지만,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설계도를 한쪽에 던져놓은 그가 방을 나섰다.
강남의 건축물은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안개비에 가려 흐릿해진 누각의 자태가 운치를 더했다. 뒷짐을 진 채 복도를 따라 걷던 태자는 천천히 뒤뜰로 향해 반월문에 들어섰다.
그곳에 정교하게 지어진 누각 한 채가 있었다. 원래는 강남 여인들이 자수를 놓거나 쉴 때 쓰는 방이었지만, 지금은 황보주아가 묵고 있었다.
마침 누각을 내려오던 시녀가 태자를 발견하고 급히 예를 갖췄다.
“전하.”
황보주아 곁을 지키던 두 시녀는 태자의 사람으로, 은옥銀玉과 채봉彩鳳이라 불렸다. 그녀들은 삼 년 동안 황보주아의 시중을 들었다. 황보주아가 초왕의 저택에 들어가면서 떨어져 지냈지만, 이번에 다시 그녀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묵용감이 이미 많은 걸 알고 있기에, 두 시녀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주아는?”
“안에 계십니다.”
태자는 손을 내젓고 곧장 누각을 올랐다. 좁다란 나무 계단을 밟으니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안에 있던 시녀가 소리를 들었는지 발을 걷어 올리고 나와 인사를 올렸다.
그는 이번에도 살짝 손을 내저었다. 주렴 너머로 황보주아의 모습이 보였다.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들어오길 기다리는 듯했다.
그가 옅은 미소를 띠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아야, 요즘은 어찌 지냈느냐?”
“잘 지내고 있습니다. 태자 오라버니야말로 아침부터 밤까지 바쁘시니 얼굴을 뵙기가 힘듭니다.”
황보주아가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태자가 웃으며 물었다.
“무슨 일로 날 찾았더냐?”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저 오라버니가 보고 싶었지요.”
황보주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매일 누각에 틀어박혀 지내니 너무 답답합니다.”
“밖을 좀 돌아다니지 않고?”
“녹하가 늘 제게 맞서니까요. 싸우면 셋째 오라버니께서 난처하실 테니, 싸우지 않으려고 아예 누각에만 있습니다.”
태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한낱 시녀가 어찌 네게 맞서려 하느냐.”
그가 곧 표정을 바꾸더니 준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초왕 곁에서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초왕이 이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느냐?”
황보주아는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지켰다. 그녀가 묵용감을 마지막으로 찾아갔던 날은 성 밖 막사에서 지낼 때였다. 그녀를 좋아했었지만, 지금은 백천범을 은애한다는 말을 들었던 바로 그날.
당시 큰 충격을 받은 그녀는 지금까지도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지금은 묵용감을 찾아갈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날 있었던 일을 마음속에 고이 숨겨 두었다. 그 일을 알 리 없는 태자가 자꾸만 물어오니 참으로 대답하기 난감했다.
태자는 한참이나 묵묵부답인 그녀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가서 얼굴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고 오너라.”
* * *
사장풍은 이 감격스러운 마음을 어떻게 감출지 고심하고 있었다.
기뻐하는 마음을 조금도 내비쳐선 안 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를 감시하고 있다는 건 진작 알아차리고 있었다. 한 장군만 봐도 뻔했다. 그와 초왕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듯, 한번은 그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초왕야와 대체 무슨 사이더냐?”
“상관과 부하 관계일 뿐입니다.”
한 장군은 한참이나 그를 응시하다 코웃음을 쳤다.
“재미없긴, 나한테까지 비밀로 한단 말이지.”
사장풍은 군대에 합류한 날부터 한 장군 휘하에서 일해 왔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제법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스스럼없는 성격이라 마음을 숨기는 법이 없는 한통이 저런 질문을 던지는 걸 보니, 초왕과 사전에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게 틀림없었다.
처음엔 사장풍도 고분고분한 태도만 보이려 했다. 지역 군사 업무를 도맡는 독군督軍을 제안받았을 때도 따를 생각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의 성격과는 맞지 않았다. 그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어찌 작은 시골의 잡군들을 훈련시키며 시간을 허비한단 말인가? 결국 그는 한통에게 일부러 투정을 부렸다.
한통은 오히려 즐거워하며 말했다.
“네놈이 싫어할 줄 알았다. 그리 싫다고 하니 본장本將이 특권을 하나 주마. 어느 마을로 가고 싶은지 직접 고르거라. 어떠냐?”
그녀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십여 개의 마을 중 그의 눈에는 오수진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입만 열면 꿈에 그리던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사장풍이 고개를 든 순간, 한통이 평소와 달리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장풍은 곧바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말장은 장군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결국 한통은 제비뽑기를 내세웠다. 정말 천운이 따라주는지 그가 뽑은 곳은 오수진의 옆 마을이었다. 규율대로라면 한 달에 한 번씩 지역을 순회할 수 있으니, 한 달만 기다리면 백천범을 만날 수 있었다.
온갖 기대와 흥분이 사장풍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그녀와 어떻게 만날지, 만나서 무엇을 말할지 생각하는 일만으로도 밤을 꼬박 지새우고 말았다. 눈 밑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 그를 본 한통이 박장대소하며 밤새 못된 짓을 한 거라고 떠들어 댔다.
* * *
백천범은 시름에 빠져 있었다. 그날 사앵앵에게 모진 말을 들었어도 별로 마음이 쓰이지 않았다. 귀엽고 여린 여인이 아무리 화를 낸들, 그녀를 어찌할 순 없었으므로.
백천범의 걱정은 다른 데 있었다. 사앵앵의 고집을 꺾지 못한 그녀의 아버지가 혼담을 넣으러 백천범을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놀란 이는 백천범뿐만이 아니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져 쑥덕거렸다. 동월국에선 남자 쪽에서 혼담을 넣는 게 관행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여자 쪽에서 먼저 혼담을 넣다니, 마을 사람들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대체 어느 집 규수가 먼저 혼담을 꺼낸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