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0화
조금 모자랐던 만큼, 그는 거리낌 없이 마음을 솔직하게 내뱉었다. 결국 월향은 얼굴이 빨갛게 물든 채 부엌을 뛰쳐나와 월규에게 말했다.
“내 말은 안 들으니까 네가 그만하라고 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단 말이야.”
월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고, 가슴이 아프셔? 다 큰 사내가 두드러기 좀 난 게 그리 대수라고. 지금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나중에 너만 고생해. 지금부터 습관을 들여놔야 시집을 가서도 호사를 누리지. 저런 일은 남편한테 시키면 얼마나 편해!”
월규는 혀를 차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곧 월규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세상에, 이게 뭐람! 온몸이 죄다 두드러기잖아? 그만하고 얼른 나가요.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 * *
그 후로도 양보전은 매일 월향을 보러 왔다. 그는 집을 나설 땐 늘 옷을 단정하게 갖춰 입고 머리도 가지런하게 빗었다. 도포 자락에는 먼지 하나 없었다. 월향이 몸가짐을 깔끔하게 해야 한다고 했으니 손수건마저 새하얀 색으로 마련했다. 혹시라도 월향이 자신을 지저분하다고 생각하면 안 되었다.
길을 걷는데 누군가 그를 놀렸다.
“어이, 아내 만나러 가냐!”
양보전은 밝은 표정으로 당당하게 외쳤다.
“그래!”
누군가 월향의 외모를 칭찬하면 그는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종종 못된 심보를 가진 이가 말을 걸기도 했다.
“이봐, 보전이. 아내랑 자 봤어?”
그럴 때면 그는 희게 질린 얼굴로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휘둘렀다. 조금 모자라긴 해도, 해선 안 될 말이 뭔지는 그도 잘 알았다.
월향의 집 앞에 다다른 그는 정중하게 대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으니, 그가 목청을 높였다.
“아무도 없어요? 손님 왔어요!”
월향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월규를 내보냈다. 양보전은 월규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그녀를 볼 때마다 늘 고개를 움츠리고 시선을 피했다.
월규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짜증이 솟구쳤다. 어떻게 봐도 정말 바보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
“내가 말했죠? 어깨를 쭉 펴고 당당하게 쳐다보라고. 겁에 질려서 움츠리면 도둑처럼 보여서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요.”
그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치자 양보전은 아예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월규가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손 내려요. 안 그럼 가만 안 있어요!”
“감히 날 때리다니, 내가 누군지 알아?”
위엄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반복해서 말하니 정말 손을 대기 난감했다.
결국 월향이 밖으로 나와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매번 그리 말하면 재미있어요? 누가 알려 준 거예요?”
“우리 엄마가, 누가 괴롭히면 이렇게 말하랬어요. 그럼 날 얕보지 않는다고요.”
월향은 한숨을 내쉬며 그를 의자에 앉혔다.
“앞으로는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아무 힘도 없는 말이에요. 규 동생 말대로, 다른 사람을 만나면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바라봐요. 당신이 누구냐고 물으면 이장이 외숙부라거나 참기름 집 아들이라고 하지 말고, 양보전이라고 말해요. 알겠죠?”
“나는 양보전입니다!”
양보전은 얼른 월향의 말을 따라 자신의 이름을 외치더니, 곧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정말 이렇게 해도 돼요? 그래도 사람들이 나더러 바보라고 하면 어떡해요?”
“어쩔 수 없어요. 다른 사람보다 조금 부족하니까. 하지만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월향이 아이를 가르치듯 설명했다.
“다른 사람보다 부족하다고 해도, 언제나 당당해야 해요. 알겠어요?”
양보전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의젓하게 말했다.
“향이, 내가 마당 청소할게요.”
마당 청소는 양보전이 매일 하는 일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빗자루도 제대로 잡을 줄 몰라 이리저리 허우적대더니, 며칠 쓸어 봤다고 제법 손에 익은 모습이었다. 이런 일들은 전부 월규가 지시했고 월향은 관여하지 않았다.
양씨 집안에서 그를 귀하게 키우긴 했지만, 그에게 좋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월향은 부귀영화를 꿈꾸지 않았다. 적어도 양보전이 조금이나마 더 값지고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길 바랐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헛된 삶을 살게 둘 수는 없었다.
* * *
사앵앵에게 받은 선물이 계속 마음에 걸려, 백천범은 월규에게 주머니에 수를 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주머니를 받은 사앵앵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고, 부끄러운 듯 교태를 부리며 웃었다. 그제야 백천범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숨을 집어삼켰다. 설마 서로 사랑의 증표를 주고받은 셈이 되었단 말인가?
돌려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들썩거리며 머뭇거렸다. 자신이 양보전보다 더 바보스럽다고 느껴졌다.
사앵앵은 그녀가 쑥스러워하는 줄 알았는지, 더욱더 활짝 웃으며 수줍게 물었다.
“나한테 더 할 말 없어?”
백천범도 어느새 얼굴이 붉어졌다.
“그게, 오해는 하지 마. 내가 주머니를 준 건, 네가 나한테 신발을 줬으니까… 그냥 받을 순 없잖아. 그래서… 무슨 뜻인지 알겠어?”
“알아.”
사앵앵은 용기를 내어 그녀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손이 정말 거칠구나. 온통 굳은살투성이야. 그래도…….”
그녀는 끊임없이 교태를 부리며 웃었다.
“정말 말랑말랑하다.”
백천범이 손을 휙 뿌리쳤다. 여인의 손이니 말랑거리는 게 당연했다. 피부는 조금 거칠어졌어도 뼈대까지 사내를 닮을 순 없었다.
그녀는 곧장 주머니를 빼앗고 잽싸게 신발을 벗어 사앵앵의 품에 안겨 주었다.
“돌려줄게. 오늘 처음 신은 거라 밑창만 조금 더러워졌을 거야. 네가 원하면 새 신으로 사다 줄게. 이렇게 하면 우리, 앞으로…….”
그녀는 횡설수설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이런 난감한 상황은 처음이라,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야?”
사앵앵은 어느새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어느 집 여인인데?”
“아니야. 난 어리니까 지금은, 아직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야.”
“누나의 혼사도 정해졌다며? 곧 네 차례가 될 텐데 어리긴 뭐가 어려. 그런 핑계 대지 마!”
사앵앵의 어깨가 가늘게 들썩였다.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백천범은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사앵앵은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고와 백천범을 자주 도와주었지만, 그렇다고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좋아.”
눈물을 글썽이던 사앵앵이 손을 들더니, 별안간 매서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너 오늘 나랑 끝장을 보자!”
백천범은 기겁하며 아무 말도 못 하고 대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오니 양보전이 마당을 청소하고 있었다. 그녀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을 보고 그가 깜짝 놀라 물었다.
“범아, 왜 그래? 귀신이라도 쫓아오는 거야?”
백천범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 무서운 처녀 귀신이 쫓아와요!”
겁을 낼 줄 알았건만, 양보전은 용감하게 빗자루를 들고 대문 밖으로 향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막아 줄게. 범이는 내 처남이야. 내가 지켜야 해.”
이장의 말이 옳았다. 양보전은 조금 모자라도 성실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백천범은 대문을 닫고 그를 다시 마당으로 데려왔다.
“막을 필요 없어요. 귀신은 안에 못 들어오거든요. 문을 잠갔으니 괜찮아요.”
그녀가 방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양보전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범아, 나한테 매형이라고 해 봐.”
안 그래도 사앵앵의 일로 마음이 불편했던 터라, 백천범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양보전은 끈질기게 매달렸다.
“매형이라고 한 번만 불러 주면 좋은 걸 줄게.”
그에게 좋은 물건이 있다 한들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백천범이 그를 피하자 양보전이 집요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가 왼쪽으로 돌아가면 왼쪽을 막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오른쪽을 막아섰다. 백천범은 결국 얼굴을 구긴 채 대충 내뱉었다.
“매형.”
양보전은 그 한마디에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얼른 동전 한 닢을 꺼냈다.
“매형이 주는 거야.”
그가 쥐여 준 동전을 바라보며 백천범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곧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게 좋은 거라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돈이 좋긴 했다. 돈이 좋은 게 아니라면 세상에서 좋다고 불릴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지금 보니 그리 모자라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방으로 들어온 백천범은 방금 있었던 일을 월규에게 말해 주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웃다가, 문득 장난기가 발동한 월규가 눈을 찡긋거렸다.
“잘 봐.”
마당으로 뛰어나간 월규가 양보전을 불렀다.
“형부.”
양보전은 잠시 의아해하더니 금세 눈이 감길 듯 활짝 웃으며 동전을 쥐여 주었다.
백천범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고 자신도 곁으로 다가갔다. 두 사람은 그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형부와 매형을 불러 댔다.
내내 활짝 웃던 양보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제 돈이 없는데, 나중에 부른 건 내일 줄게.”
* * *
천운이 오면 무슨 수를 써도 막을 수 없는 법이다. 그는 제 계획만 아니었으면 벌써 한 장군을 꽉 끌어안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의 제안은 너무나 훌륭했고, 또 시기적절했다. 마침 백천범을 찾으러 나갈 기회가 없어 고민하고 있었는데 한 장군이 그의 앞에 길을 깔아 주었으니.
초왕의 군대는 누구보다 용맹하고 초왕도 병력 배치에 뛰어난 안목이 있었지만, 병력의 부족은 여전히 골칫거리였다. 병력을 보강하기 위해 장군들은 저마다 머리를 쥐어짜며 고심에 휩싸였다. 그중 한통 장군은 성에 불이 났을 때, 지원을 나온 백성들과 함께 진화에 성공하며 단결의 힘을 몸소 깨달았다.
그는 근처 마을의 청년들을 모아 훈련을 시키면 예비 병력이 되리라 생각했다. 훈련 외의 시간에는 본업을 하다 상황이 긴박할 때 소집하면 제법 쓸 만한 병력이 될 터였다. 급하게 임시 병력을 소집할 때보다는 더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게 분명했다.
한 장군이 이렇게 견해를 밝히자마자, 초왕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네 생각이더냐, 아니면 사장풍의 생각이더냐?”
한 장군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 말장의 생각입니다. 사장풍이 제법이긴 해도 아직 경험이 부족한데 어찌 이런 방법을 생각해 내겠습니까? 그래도 열의가 높은 놈이니 이 일도 맡기면 어떨까 싶습니다.”
초왕은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볼 만하군. 네가 제안했으니 네가 맡아서 진행하거라. 효과가 있다면 다른 지역에서도 시행하게끔 전달해도 좋다.”
한 장군은 명을 받고 밖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