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9화
“지난번에 못 마셨으니까 오늘은 꼭 마셔야 돼. 맞다, 너한테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같은 고향 사람이야. 말하는 걸 듣자마자 알겠더라. 지난번에 물어봤더니 역시나 우리 옆 마을에 살았다더라고. 지금은 태자 전하 곁에서 일한대.”
별 감흥 없이 듣고 있던 사장풍은 태자와 함께 일한다는 대목에서 눈을 빛냈다.
“그래? 이웃 마을에 살았다고? 이름이 뭔데?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잖아.”
“이소로李小魯라는 애야. 나이는 우리보다 어려.”
“아는 사람이었네. 우리 마을에 왕대해王大海 아저씨라고 있었잖아. 그 집 며느리가 그 애 누나야.”
“어, 맞아! 그 애야.”
가동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가자, 가자. 소로도 불러서 셋이 한잔하자.”
사장풍도 자연스레 가동을 따라나섰다.
“태자 전하 옆에서 일한다며.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거야?”
“오늘 태자 전하께서 성 북쪽 지역에 가셨는데 소로는 남아 있는 모양이더라. 지금쯤 당직실에서 빈둥거리고 있을 거야.”
사장풍이 발길을 재촉했다.
“그럼 뭘 꾸물거려. 얼른 가자.”
태자가 공무를 보는 곳은 옆 뜰에 있었다. 가동은 날마다 관청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길을 훤히 꿰고 있었다. 입구를 지키던 병사가 가동을 보더니 활짝 웃었다.
“소로를 찾아왔구나!”
“어, 같이 술 좀 마시려고.”
병사가 장난스레 눈을 흘겼다.
“왜 우리랑은 안 가고. 소로만 형제고 우린 아니라는 거야?”
가동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미안, 그래도 오늘은 안 돼. 고향 친구끼리 모이는 거거든. 다음에 내가 한 잔 꼭 살게.”
병사가 가동의 옆에 있는 사장풍을 훑어보았다.
“창주 사람이야? 고향 친구 엄청 많네.”
“나랑 같은 동네에서 자란 죽마고우야.”
가동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사장풍이라고, 들어 봤지? 엄수의의 머리를 가져온 사람이 바로 내 친구라고.”
“와, 인사가 늦었습니다!”
문을 지키던 병사 두 명이 서둘러 예를 갖췄다.
“우원 장군이셨군요.”
안 그래도 시답잖은 수다에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던 사장풍이다. 가동의 소개까지 더해지자 그를 힘껏 걷어차고 싶은 마음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래도 예를 갖추는 사람에게 실례를 범할 수는 없는 법.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미소를 지은 뒤 대충 몇 마디 나누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소로는 역시나 당직실에 있었다. 그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특히나 사장풍이 세운 공로를 언급하며 제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동향 사람으로서 자랑스러운 일이니 기뻐할 만했다. 그는 사장풍을 붙들고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사장풍은 인내심을 발휘하여 답하면서도 눈으로는 줄곧 책상 위를 훑었다.
공교롭게도 그토록 원했던 명부가 책상 오른쪽 모서리에 놓여 있었다. 당장이라도 명부를 낚아채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그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의 시선이 표지에 적힌 글자를 빠르게 훑었다.
「오수진烏水鎭」
순간, 그의 머리에 벼락이 내리친 듯했다. 그래, 이 이름이다. 그가 맡은 구역으로 지원을 나왔던 마을은 오수진이라는 곳이었다.
그는 입으로는 이소로의 질문에 답하며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오수진에서 나온 이들의 명단이 그의 눈동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죄다 낯선 이름이었다. 대체 누가 그녀란 말인가?
세 번이나 훑어본 끝에 그는 마침내 한 이름을 찾아내었다.
「전범」
전범, 전범. …천범!
그렇게나 찾아 헤맸던 그녀를, 마치 운명처럼 찾아내다니!
그가 별안간 탁자를 내리쳤다. 그는 승전보를 올린 장군처럼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가자. 오늘은 내가 산다!”
* * *
하루가 지났지만, 월향의 결정은 변함이 없었다. 결국 백천범은 이장을 찾아가 월향의 생각을 전했다.
이장은 당연히 크게 기뻐했고, 오느라 고생했다며 그녀에게 돈주머니를 쥐여 주었다.
백천범도 사양 않고 넙죽 받았다. 그저 길품삯일 뿐인데 거절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돈을 받은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신나게 걸음을 옮겼다.
주루를 지나가는데 사앵앵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돌아보니 사앵앵이 그녀 앞으로 뛰어와 무언가를 품에 찔러 넣고는 잽싸게 주루로 뛰어 올라갔다. 어찌나 빠르던지, 백천범은 혼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그녀가 잠시 머물렀던 곳에 맴도는 향이 너무나 향기로웠다. 백천범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향기를 만끽하다 고개를 들고 사앵앵이 서 있는 2층 창가를 바라보았다. 사앵앵은 얼굴이 빨갛게 물든 채 입술을 삐죽이고 있었다.
“냄새는 왜 맡는 거야?”
“이건 무슨 향이야? 진짜 좋다.”
백천범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누나들한테도 이 향을 쓰라고 해야겠어.”
사앵앵이 얼른 대답했다.
“금릉에서 사 온 거라 수성에는 없어. 내일 오면 한 통 줄게.”
백천범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냐, 그건 너무 미안하잖아.”
“나한테까지 예를 차리고 그래.”
사앵앵이 백천범의 품에 쑤셔 넣었던 물건을 가리켰다.
“…집에 가서 잘 맞는지 한번 신어 봐.”
백천범은 그제야 사앵앵이 준 게 신발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사내들이 신는 신발이라 모양새가 투박해도, 양쪽 볼이 짙은 청색으로 마감되어 꽤 색다른 느낌이었다.
부잣집 아가씨도 신발을 직접 만들 수 있다니, 백천범은 퍽 신기해하며 물었다.
“직접 만든 거야?”
사앵앵이 부끄럽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어?”
“응, 마음에 들어. 다음에 어떻게 만드는지 알려 줘.”
백천범이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나도 만들어 보고 싶어.”
“…….”
사앵앵은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내가 신발을 만들겠다니, 처음 듣는 소리다.
“그런 걸 뭐 하러 배워. 어차피 네 옷은 누나들이 만들어 주잖아. 나중에 누나들이 시집을 가더라도…….”
그녀의 얼굴이 점점 더 빨개지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내가 있잖아.”
이런 쪽으로는 늘 둔했지만, 지난번에 희락이 꺼낸 말을 떠올린 백천범은 사앵앵이 정말 그녀를 마음에 둔 게 아닐까 싶었다.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그녀가 여인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마음에 들어 하다니…….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백천범은 이 신발을 받을 수 없었다.
“사앵앵, 신발은 다시 가져가. 난 누나들이 만들어 준 신발이 많아.”
사앵앵의 표정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필요 없으면 버려. 난 한번 준 물건은 절대 돌려받지 않는다고.”
이렇게 좋은 새 신발은 버리기 너무 아까웠다. 백천범은 하는 수 없이 신발을 들어 그녀에게 흔들어 보였다.
“그럼 잘 신을게, 사앵앵. 다음에 필요한 게 있거든 말만 해.”
사앵앵이 다소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사앵앵이라고 부르지 마, 듣기 안 좋으니까. 그냥 앵앵이라고 불러.”
“알겠어.”
확실히, 성까지 부르는 건 조금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이젠 앵앵이라고 부를게, 사앵앵.”
그제야 사앵앵이 입을 가리고 수줍게 웃었다.
백천범이 손을 흔들며 몸을 돌렸다.
“그만 가 볼게, 사앵앵. 다음에 봐.”
“…….”
앵앵이라고 불러 준다더니……. 그녀가 입술을 길게 뺐다.
* * *
오후가 되니 양보전이 집으로 찾아왔다. 소심했던 그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예전처럼 문 앞에 서서 안을 힐끔거리고만 있었다. 월향도 그를 발견했지만, 직접 부르기가 부끄러워 백천범에게 데려오라고 말했다.
백천범은 잽싸게 달려 나가 문을 열어젖혔다.
“그렇게 수상쩍게 있지 말고 얼른 들어와요.”
지난번 일 때문에 백천범이 조금 무서웠지만, 앞으로는 처남이 될 사이니 좋은 인상을 보여야 했다. 양보전이 헤헤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밥은 먹었어?”
백천범이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곧 신시인데 밥 먹었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바보 아니에요?”
양보전은 고개를 숙이고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바보 아닌데.”
백천범은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바보와 이리 겨루어 무엇 한단 말인가. 다만 그녀도 아직은 월향의 선택이 내키지 않아, 불만스러운 태도가 불쑥 나오곤 했다.
집 안으로 들어온 양보전은 월향의 얼굴을 보자마자 금세 화색이 돌았다. 그러다 월규와 눈이 마주치니 거북이처럼 목을 잔뜩 움츠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의 눈에는 이 중에서 월향만 좋은 사람이었다.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온화한 데다 가녀리고 아리따운 목소리로 상냥하게 말을 걸어 주지 않는가.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던 그는 곁눈질로 그녀를 힐끔거렸고,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한참이나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를 보고 있던 월향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의 웃음에 양보전은 혼이 나간 사람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내 몸이 흔들거리더니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때, 월규의 짧은 호통이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깜짝 놀라 허둥거리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그 광경에 백천범과 월규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양보전은 황급히 일어났지만, 두 여인의 웃음소리에 고량주를 마신 사람처럼 목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정말 바보 같고 어수룩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호감이 가는 구석이 있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월향은 그를 조금씩 귀엽게 보고 있었다. 그리 큰 키는 아니었지만, 외모도 깔끔한 데다 흠잡을 데가 없었다. 바깥에 나설 때도 늘 단정하고 깔끔한 차림새였으니 입만 열지 않으면 보통 사람과 똑같이 보였다.
한편, 월규는 그가 아무것도 할 줄 몰라서 월향이 고생만 할까 걱정이었다. 그에게 이런저런 일을 시켜 봐야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우선 토란 껍질을 까는 일을 맡겼다.
양보전의 집은 어릴 때부터 장사를 크게 했으니, 늘 시중을 들던 사람이 있었다. 제법 호사스러운 삶을 누리던 그가 언제 이런 일을 해 보았을까. 그러나 월규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던 그는 작은 걸상에 걸터앉아 열심히 토란 껍질을 벗겼다.
한창 벗기다 보니 손이 가려운 느낌에 손등을 긁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얼굴이 간지러워 얼굴을 벅벅 긁었다. 마침 월향이 그의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얼굴이 왜 그래요?”
선녀가 따로 없는 월향이 봐주고 있다. 그는 간지러움도 잊어버리고 헤헤 웃었다.
“그만 해요.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다고요. 어서 나가요.”
“괜찮아요.”
양보전은 토란을 쥐고 버티기 시작했다.
“내가 껍질을 안 벗기면 향이한테 시킬 거래요. 향이가 벗기면 간지럽고 아파요.”
“전 안 그래요.”
월향이 서둘러 그를 내보내려 했다.
“저는 여러 번 해 본 일이라 괜찮아요. 어서 나가요.”
양보전은 완강히 버티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내가 해요. 향이가 하면 안 돼요. 향이가 간지럽고 아프면 내 마음도 아파요.”
“…….”
다른 사내가 말했다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겠지만, 양보전이 말하니 묘한 기분이었다. 역시 그는 바보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내보이는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진실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일부러 을러대듯 물었다.
“그런 말은 누가 알려 줬어요?”
“아무도. 내가 혼자 한 말이에요.”
양보전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향이는 내 아내니까 향이를 소중하게 아껴 줘야 해요. 절대 힘들게 하지 않을 거예요. 행복하게만 해 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