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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08)화 (307/1,192)

제308화

사장풍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태자에게서 명부를 가져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초왕을 움직일 방법을 궁리했다. 지난번에 세운 공으로 초왕은 그를 우원佑元 장군의 자리에 앉혔다. 유례없는 특진으로, 이제 그는 고급장교 회의에 들어갈 수 있다.

지금은 양쪽 군대가 대치 중이었다. 초왕은 강남, 황제의 대군은 위수강변 근처에 주둔하고 있었다. 상대가 먼저 쳐들어오기 전에는 섣불리 공격하지 않을 태세였다. 온전했던 국가가 남북 두 진영으로 분열된 형국이었다.

대치 중인 남북 사이에 자그마한 지역이 하나 있다. 위수강 이남 지역이자 난강瀾江 이북 지역으로, 본래 황제의 통치를 받아야 하지만 그곳을 지키는 군대는 황제의 세력도, 초왕의 옛 측근도 아니었다. 그들은 전쟁에 나서는 대신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초왕의 수하들은 이 지역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진압파와 온건파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또 어떤 이들은 이 지역을 빙 둘러가 그대로 북진하자고 주장했다.

사장풍으로서는 공격이든, 투항을 받아내든, 돌아가든 상관없었다. 그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 초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군영을 떠나는 일이다. 초왕이 떠나야 백천범이 안전해지고, 명부를 손에 넣을 기회가 올 테니.

초왕이 그에게 의견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말장末將(옛날 장군이 자신을 낮춰 부르던 말)의 생각에, 내전은 백성들에게 피해가 막심하니 속전속결이 가장 중요합니다. 왕야께서는 동월국의 군신이시니 전투에 있어서 누구도 왕야를 뛰어넘을 수 없지요.

적병에 비해 아군의 수가 적어도 왕야께서 직접 군대를 이끄시면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그리하면 단숨에 임안성까지 칠 수 있고, 전쟁도 빠르게 끝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백성들도 편안한 삶을 되찾겠지요.”

초왕이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 물었다.

“임안성을 치는 건 당연하나, 네게 물은 것은 난강을 어찌 지날지에 대한 의견이다. 치는 게 좋겠느냐, 투항하도록 유도하는 게 좋겠느냐, 아니면 돌아가는 게 낫겠느냐?”

“어느 방법이든 말장은 왕야만 믿고 따르겠습니다. 왕야께서 선봉을 이끄시는 한, 모든 성을 함락과 전쟁의 종결은 파죽지세의 기세이리라 생각합니다. 왕야께서 반드시 승리를 거머쥐실 것입니다!”

초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네 말은 본왕더러 군대를 지키라는 게 아니더냐?”

“정무는 태자 전하께서 보시니 군신인 왕야께서는 전투와 관련된 일을 총괄하셔야 하는 줄로 압니다.”

초왕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도 일리는 있다. 네 말대로 하도록 하지.”

사장풍은 기쁜 마음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초왕이 그를 물끄러미 보더니 별안간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지금은 본왕이 처리할 일이 남아 있어 잠시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사장풍의 미소는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순간 심장을 차가운 손이 꽉 부여잡은 듯했다. 문득 시선을 올려보니 초왕이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눈을 내리깔고 표정을 감추었다.

이런 교활한 인간! 사장풍은 속으로 분노를 쏟아냈다. 지금 보니 그의 속내를 떠보려 의견을 물은 게 아닌가.

그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물론, 전투 중에는 부상을 당할 위험이 크니 왕야의 옥체를 위해 후방을 지키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어쨌든 말장과 모든 장군이 왕야의 분부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왕야의 위치가 바뀌어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옆에 있던 효기대장군 한통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사장풍, 왕야의 어머니라도 되는 듯 잔소리만 늘어놓는구나.”

사장풍은 멋쩍은 듯 웃었다. 초왕이 그를 의심하고 있는 이상, 모든 언행은 무슨 의도가 담긴 것이라고 여겨질 수 있었다. 그는 이제 어떠한 실마리도 보여선 안 되었다.

사장풍은 원래 초왕을 다른 곳으로 보낸 후 태자의 방에서 명부를 훔칠 생각이었다. 고작 자그마한 명부에 불과하니, 없어진다 한들 소란이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곁에 초왕이 있다면 분명 그의 귀에도 소식이 전해질 것이었다. 초왕이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 하니,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정말로 막바지에 몰리면, 무식한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녀가 성 밖 마을에 있는 게 확실하니 수성에서 가까운 마을부터 꼼꼼하게 조사하면 찾을 수 있을 터였다. 다만 초왕이 그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만큼, 일거수일투족에 감시가 붙고도 남았다. 초왕의 눈을 피해, 아무도 모르게 그녀를 찾을 수 있을까?

그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 문득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올리자 그대로 초왕의 시선과 맞닿았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초왕은 천천히 미간을 찌푸렸고, 사장풍의 눈가에 서서히 웃음기가 서렸다. 어떤 일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확실하게 전해지는 법이었다. 두 사람은 또다시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초왕은 병사들을 자식처럼 아끼는 사람이었다. 사병들의 목숨은 무엇보다 중요하니, 전투를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사병들 또한 백성이 아닌가. 결국 그는 장군들과 논의 끝에 투항을 유도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 중임을 누가 맡을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한 참이었다. 효기대장군 한통이 초왕을 찾아와 사장풍을 넌지시 추천했다. 사장풍은 그의 직속 부하이니, 일을 잘 처리하면 선임인 한통의 체면도 세워질 터였다.

“왕야, 이 자식이 제법 용맹하여 싸움도 잘하고 언변도 좋습니다. 한번 믿고 맡겨 주십시오.”

초왕은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를 머금었다.

“다른 이면 모를까, 사장풍은 안 된다.”

“무엇 때문입니까?”

한통이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봉미협鳳尾峽 전투 땐 경험을 쌓도록 보내신 줄 알았습니다.”

“사장풍은 구문제독이었다. 늘 오가는 사람을 상대하여 이미 말주변이 출중한데 굳이 보낼 필요는 없지. 어쨌든 사장풍은 보낼 수 없으니 대신 네가 잘 감시하거라.”

한통은 더욱더 의아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왕야, 감시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본왕과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자다.”

한통이 크게 놀라더니 머릿속에 떠오른 가능성을 일단 내뱉었다.

“설마, 적군의 첩자입니까?”

묵용감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다. 인품에는 문제가 없어. 너무 많은 걸 알려 하지 말거라. 그저 잘 지켜보도록. 어떤 움직임이든 곧장 보고해야 한다.”

초왕이 말을 아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 짧은 대화는 한통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젊은 우원 장군과 초왕 사이에… 미묘한 무언가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한통이 떠난 후 묵용감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역시 강남은 아름다웠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이어졌다. 바깥에 흩날리는 이슬비가 나뭇잎과 꽃을 더욱더 짙은 색으로 물들였다. 바위를 타고 자라난 녹색 이끼 위에, 몇 가닥 풀과 자줏빛 꽃잎이 하늘거리는 광경은 신비롭고도 생기발랄했다.

다시 고개를 돌리니 마침 성안이 꽃으로 가득했다. 저 멀리 늘어선 가옥들은 빗물 사이로 뿌연 자태만 어렴풋이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날, 그녀와 함께 우산을 쓰고 천천히 거리를 거닐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도 왜 이렇게 사장풍을 신경 쓰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사장풍의 변화는 백천범과 관계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저 출세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필사적으로 싸우고 대장군이라는 칭호를 얻고 싶었는지도.

피 끓는 청춘일 땐 누구나 이름을 날리고 싶어 하는 법이다. 권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그가,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하고자 성 밖 군영에 머물기 시작했던 것처럼.

그런데도 그는 이렇게 하고 싶었다.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아주 작은 연결고리라도 있다면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이렇게 모든 걸 의심하고, 생각하고, 매달려야만 무엇이라도 붙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곁에 없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손에 담긴 모래를 힘껏 움켜쥐려 해도 손가락 사이로 다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두 눈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도무지 멈출 방법이 없었다. 그런 무기력함에 짓눌려, 그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는 한밤중에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기 일쑤였고, 적막한 침대에서 멍하니 넋을 놓았다. 이렇게 계속 시간이 흘러간다면, 그녀의 모습조차 잊게 될까 두렵고 또 두려웠다.

가동에게 맡겼던 초상화는 그가 직접 그렸다. 그녀의 모습을 잊을까 봐, 눈을 감아도 그녀의 모습이 선명할 때 서둘러 그린 그림이었다. 뛰어난 실력은 아닌 터라 그녀의 분위기만 겨우 그려 내었지만,

그는 사장풍을 통해 좋은 소식을 듣고 싶었다. 두 사람이 사사로운 만남을 가지게 되어도, 백천범이 다시 선택할 기회를 원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나타나기만 한다면, 그녀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어찌 되든 좋았다. 사막을 홀로 헤매는 이가 물 한 모금 외에 무엇을 원할까. 그녀는 이제 지독한 갈증이 되었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저, 그녀가 보고 싶을 뿐이었다.

모두 그의 잘못이었다. 그녀를 보내는 게 안전한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그의 곁보다 더 안전한 곳이 어디 있다고……. 그녀가 그의 약점임을 누구나 알기에, 그녀를 노리는 자들도 점점 늘어났다. 그러나 그자들은 하나를 망각하고 말았다. 약점은 언제든지 갑옷이 될 수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 * *

감시를 알아차린 사장풍은 적잖이 괴로웠지만, 한편으로는 초왕의 통찰력에 감탄했다. 아무런 허점도 드러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초왕은 어떻게 그의 마음을 꿰뚫었을까. 고작 한순간 드러낸 표정만으로?

그는 주변 마을을 탐색하려던 계획을 미뤄 두기로 했다. 여기서 작은 틈이라도 보일 순 없었다.

그는 자신이 초왕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초왕과의 암투를 시작했으니, 행동에 더욱더 신중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백천범을 향한 마음뿐만이 아니라 남자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으니. 비참한 패배를 맛본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발길을 돌리지 않았던가. 이번만큼은 반드시 승리를 거머쥐어야 했다.

기회는 며칠 뒤에 찾아왔다. 그는 초왕에게 공문을 전하라는 명을 받고 수성으로 향했다. 사실 이런 자질구레한 일까지 그가 할 필요는 없었지만, 한 장군이 내린 명이니 순순히 나섰다.

공문을 전하자 초왕은 성 밖에 주둔한 병사들의 상황을 묻더니 이내 손을 흔들고 그를 내보냈다.

문을 나서는 순간, 불쑥 나타난 가동이 그를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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