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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07)화 (306/1,192)

제307화

월규와 월향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알고 보니 백천범이 성에 지원을 나갔던 일로 보상금을 전해 주러 온 것이었다. 많지는 않아도 초왕과 태자의 성의라며 한 사람당 정해진 양의 동전을 받았다.

이장은 쉰 살쯤 되었을까, 인자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유독 상냥한 말투로 말하던 그는 자꾸만 월향과 월규를 번갈아 보며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월향은 부끄러워했지만, 월규의 얼굴은 조금씩 굳어 갔다. 백천범은 가만히 앉아 발끝으로 바닥만 찔러 대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이장이 찾아온 목적이 보상금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난번 일을 언급하며 앙갚음을 하려 들지도 모른다.

내준 차를 다 마신 후에도 이장은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월향이 찻물을 더 따라 주었다.

“자네들이 우리 마을에 온 지도 제법 되었는데 아직 호적부에 들지 못했다니, 그간 내가 소홀했네. 원적原籍 명부를 가져오면 곧바로 등록해 주겠네.”

세 사람은 입이 딱 붙은 듯 침묵을 지켰다. 도망쳐 나온 사람에게 명부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게 있었다면 진작에 그들이 먼저 등록해 달라고 했을 터였다.

“왜,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가?”

이장이 그들의 안색을 살피다 덧붙였다.

“나에게 말해 보게. 고향을 떠나 고생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세 사람이 각자 시선을 피했다. 다른 때라면 모를까, 어찌 이 상황에서 초왕의 저택에서 도망쳤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있겠는가. 게다가 지금은 초왕이 수성에 머무르고 있다. 성을 함락한 후 그가 펼친 회유책이 효과를 발휘해, 백성들의 인식이 달라졌다. 사람들은 그를 우러러보게 되었고, 그를 이곳의 왕으로 여겼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왕에게 대적하려 할까.

한참 생각하던 백천범이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이장님. 사실 조금 어려운 일이지만,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저희 삼 남매는 서쪽에서 오는 길에 산적을 만났어요. 목숨은 건졌지만 짐을 거의 빼앗겼지요. 원적 명부도 빼앗겨서 그동안 이장님께 찾아가지 못했던 거예요.”

서쪽은 지형이 험준하고 숲이 우거져 산적이 들끓었다. 서쪽에서 왔다면 산적을 마주치는 건 당연할 수밖에. 운이 좋아 산적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오랜 기간 이동하다 보면 물건을 잃어버리는 일도 숱하게 일어나는 법이다.

“그거야 아주 쉽게 해결할 수 있지.”

이장이 선뜻 웃으며 말했다.

“원적 주소를 알려 주게. 그쪽으로 공문을 보내면 회신이 올 테니 길어도 두 달 안에 처리할 수 있다네. 이곳에 가게를 낸 걸 보면 오래 머물 생각으로 왔을 테지. 그럼 두세 달쯤은 충분히 기다릴 수 있지 않은가.”

세 사람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이장이 조목조목 내뱉은 말에는 틀린 구석도 없었고, 빠져나갈 구멍도 보이지 않았다.

백천범은 역시 노련미는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장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역시나 이장은 느긋하게 그들을 몰아세웠다.

“통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더는 내버려 둘 수 없네. 우리 마을은 지금 초왕이 관리하는 곳일세. 왜, 며칠 전에 관아에서 초상화를 들고 사람을 찾으러 왔었잖나?

그자들 말로는 내력이 의심스러운 자들은 모조리 잡아들이겠다더군. 나야 자네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안다지만, 증거도 없이 호적부에 올린다면 법도에 맞지 않는 일이라네. 위에서 조사라도 하는 날엔 나도 방법이 없어.”

드디어 이장이 시꺼먼 속을 언뜻 내비쳤다. 월향이 냉소를 지었다.

“이장님,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 남매를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늙은 여우처럼 굴던 이장은 단도직입적인 그녀의 태도에 인자한 모습을 꾸며냈다.

“난 삼 남매가 가여워서 도와주고 싶을 뿐이라네.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자네들 뜻은 어떨지…….”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그들의 안색을 살폈다.

“지난번에는 작은 오해 때문에 소란이 있었다지? 사실 내 조카 놈은 아주 성실한 녀석이야. 혼담도 여러 번이나 들어왔지만 여기 향이 아가씨가 마음에 든다며 전부 거절해 버렸네. 혼사를 치른 것도 아니면서 좋은 게 생기면 부인에게 줘야 한다며 두 개씩 챙길 정도니.

이렇게 착실한 사내를 어디에서 찾겠는가? 향이 아가씨가 시집을 오면 분명 떠받들고 지낼 걸세. 게다가 시집만 오면 삼 남매 모두 호적을 갖게 되니 누가 떠들어 댈 일도 없지.”

이장은 단단히 준비했는지 청산유수로 말을 뱉어냈다.

“참고로… 우리 아들이 했던 말은 못 들은 걸로 해 주게.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놈이 부인을 두세 명이나 들였으니 참 한심하지. 그런데도 예쁜 여인만 보면 첩으로 들이고 싶어 안달이야.

그날 자네가 따끔한 맛을 보여 줬다던데, 잘했네. 마음 같아선 자네를 업고 다니면서 자랑하고 싶을 정도야. 그놈이 또 찾아오거든 호되게 매운맛을 보여 주게. 다리 한쪽을 분질러 놔도 탓하지 않겠네.”

백천범과 월규, 월향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느라 바빴다. 줄곧 이장이 벼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잘했다며 그들을 치켜세우지 않는가.

“우리 조카의 모자란 부분을 꺼린다는 건 잘 아네. 그래도, 내 아들놈과 사느니 조카가 훨씬 나을 걸세. 우리 며느리는 수성 태수 집안 딸이니, 우리 집안도 혼사로 신분 상승을 한 셈이지.

관직자 집안의 규수가 성 밖의 작은 마을까지 시집을 왔으니, 응당 대접 받으며 편안히 지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우리 며느리가 속을 어찌나 태우며 지내는지 자네들은 상상도 못 할 걸세.”

그는 끝없이 아들의 흉을 보며 양보전을 은근슬쩍 치켜세웠다.

“이런 세상에선 남편을 잘 만나야 팔자가 트지 않겠나. 향이 아가씨가 잘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네. 우리 조카도 태어날 땐 멀쩡했어. 그러다 갑자기 열병이 나서 꼬박 사흘을 고열에 시달렸네. 열이 내리고 머리에 조금 문제가 생긴 게야.

그래도 사는 데 지장은 없네. 반응이 조금 느릴 뿐이지, 다른 문제는 없어. 무엇보다 애가 아주 착하고 마음씨가 고와. 화목하게 지내면서 아들딸 낳아 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않겠는가? 우리 여동생이 향이 아가씨가 시집만 온다면 모든 가업을 다 넘겨주겠다며 애걸복걸을 했다네.”

이장의 회유에 월향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장은 그녀의 흔들리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더욱더 다디단 말을 늘어놓았다.

“생각해 보게. 세상이 이렇게나 어지러운데, 젊은 여인이 부모도 없이 동생들을 돌보는 게 어디 쉬운가? 무슨 일을 당해도 상의할 사람도 없지 않나. 혼인만 하면 다 가족이 되니 그런 일은 걱정할 필요도 없다네.

우리 양씨와 전씨 일가는 가족이 워낙 많아서, 성 안팎으로 인맥이 잔뜩 이어져 있다네.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가 발벗고 나서지 않겠는가. 앞으로 규 아가씨와 범이도 혼인을 해야 할 텐데,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얼마나 힘들꼬.”

월향은 월규와 백천범도 살길을 모색한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들을수록 이장의 말이 옳았다. 이 마을에 뿌리를 내리려면 그들을 도와줄 사람들이 절실했다.

“지금만 볼 게 아니라 앞일도 생각하는 게 좋다네. 젊을 때는 여기저기서 관심을 듬뿍 받지만, 가는 세월을 붙잡을 수는 없지. 시간이 어찌나 빨리 가는지 몰라. 날 좀 보게, 언제 이렇게 늙었는지 원. 되었네. 늙으니 말만 많아져. 우선 서로 상의 좀 해 보게. 조급히 결정할 것 없이 둘이 왕래라도 해 보게나. 우리 조카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도 해 본다 생각하고.”

이장은 묵묵부답인 세 사람을 빤히 응시했다.

“혼사를 치르기도 전에 남녀가 만나는 건 규율에 어긋나지만, 자네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다른 이들도 입을 놀리진 않을 걸세. 만약 승낙한다면 범이를 보내 알려 주게. 승낙을 못 하겠다면 오늘 이곳에 오지 않은 셈 치겠네.”

이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럼 얘기들 나누게. 이만 가 보겠네.”

이장의 언변에 혼이 쏙 빠진 세 사람은 멍하니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월향이 서둘러 문 앞까지 따라 나갔다.

“이장님, 조심히 가시어요.”

이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뒷짐을 지고 천천히 대문을 나섰다.

역시 이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긴말을 하염없이 늘어놓아도 숨 한 번 헐떡이는 법이 없지 않았는가.

이장의 말에 마음이 동요된 월향은 밤새 잠을 설쳤다. 결국 그녀는 이튿날 아침, 월규와 백천범에게 쭈뼛거리며 다가가 시집을 가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절대 안 된다며 월향을 뜯어말렸다. 그러나 반대가 거셀수록 월향은 더욱더 확고한 의지를 내비쳤다. 월향은 붉게 물든 얼굴로 두 사람에게 맞섰다.

“이장님 말씀이 맞아. 전쟁이 벌어지고 있으니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어. 게다가 강남 지역은 살기 좋잖아. 사계절도 뚜렷하고 그리 춥거나 덥지도 않고. 이곳 생활에 익숙해진 데다 이웃들이랑 사이도 좋아. 왕야께서 성에 계시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을 떠나실 거야.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으니 곧 북쪽으로 가시겠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지만, 월향은 꿋꿋이 말을 이었다.

“왕비 마마를 찾으셔도 이곳은 조사를 마쳤으니까 다시 오지 않을 거야. 어수선한 상황만 지나가면 우린 편하게 지낼 수 있어. 하지만 이장님의 미움을 사서 위에 보고라도 되는 날엔 다시 조사를 받을지도 몰라. 그때는 정말 손쓸 수 없잖아.”

백천범과 월규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다.

“이곳에 정착하기로 했으니 기댈 곳이 있어도 나쁘지 않아. 양보전이 좀 모자라긴 해도 사람은 착실하잖아. 빈둥거리는 부잣집 도령보단 나을 거야. 일단 만나 보았다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면, 시집갈래.”

월규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속상한 어조로 말했다.

“이장님 말에 속지 마. 양보전한테 시집을 가겠다고? 정말 착실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던데. 그런 바보한테 혼담을 넣다니 이장도 좋은 사람이 아니야.”

월향이 곧장 맞받아쳤다.

“이장님이 당장 결정하라고 하신 게 아냐. 싫으면 없었던 일로 할 테니 우선 상의부터 하라고 하셨잖아. 그리고 기억 안 나? 여기 왔을 때 동네 사람들도 이장님은 좋은 분이라고 했어. 우리를 괴롭히려는 건 아닐 거야.

솔직히 그런 조건이면 아무 마을에서나 신붓감을 찾을 수 있는데, 나라고 안 될 게 뭐가 있어? 나도 이제 시집을 가야 할 때야.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밖에서라도 의지할 곳을 찾아야지. 그렇게 의지하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평소 남다른 말솜씨를 자랑하던 월규였지만 지금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녀가 백천범만 빤히 바라보았다.

“범이, 네 생각은 어때?”

백천범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일단 양보전 그자가 어느 정도 바보인지 알아야 해. 적어도 함께 지낼 수는 있는지 월향 누나가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내가 오늘 그 바보한테 시간 날 때 오라고 할게.”

월향이 눈을 흘겼다.

“바보가 뭐야. 멀쩡한 이름이 있는데.”

월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이고, 벌써부터 감싸 주기는. 이러다 정말 형부 생기겠네.”

월규와 백천범은 더 말리지 않고, 생각할 시간을 하루 더 주었다. 내일도 월향의 결심이 여전하다면, 양보전에게 소식을 전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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