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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06)화 (305/1,192)

제306화

회의실에 있던 병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사장풍이 바로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소인, 왕야의 마음만 받겠습니다. 소인은 서둘러 임안성을 함락하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그 외의 일을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초왕이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눈을 번득였다.

“못난 놈. 어찌 여인이라는 말로 이리 놀라느냐? 본왕도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니 거절하지 말거라.”

거절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사장풍은 거듭 그의 상을 거절했다.

“왕야, 말씀을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무엄하다!”

그가 거절할수록 초왕의 의심은 깊어만 갔다.

“어찌하여 본왕의 호의를 그리 거절하느냐? 설마 아직도…….”

초왕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듣는 귀가 많으면 잡음이 생기는 법이고, 이 일이 밖으로 퍼져도 좋을 게 없다. 자신과 사장풍의 명성쯤이야 어찌 되든 알 바가 아니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백천범에 관해 떠들어 대는 건 원하지 않았다.

이런 일에서 사람들은 줄곧 여인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화의 근원이라는 둥, 지조가 없다는 둥, 비겁한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 대는 세상이었다.

결국 상을 내리는 일은 흐지부지되었다. 하사품을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큰 공을 세운 장수에게 벌을 내릴 수는 없으므로.

사장풍은 복명을 마치자마자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초왕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밖으로 나오니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에서 가동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장풍이 발걸음을 세우고 뒤를 돌아보았다. 가동이 씩씩거리며 그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놀라 돌아가시는 줄 알았잖아. 왜 하필 왕야한테 맞서는 거야? 어렵사리 세운 공이잖아. 자칫 잘못했다간 다 물거품이 된다고.”

사장풍이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뭐가 물거품이 된다는 거야?”

가동이 눈을 찡긋거렸다.

“나한테까지 뭘 감추려고. 말해 봐. 원하는 게 뭐야?”

사장풍이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안 알려 줘.”

“그 말은 정말 무언가…….”

별안간 가동이 입을 쩍 벌리며 감탄했다.

“역시 왕야의 말씀이 맞았네.”

“왕야께서 뭐라고 하셨는데?”

“안 알려 줘.”

“그럼 관둬. 나도 안 알려 줄 테니까.”

“…어휴. 알았어.”

가동이 사장풍을 말재주로 어찌 당할까. 결국 그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네게 무슨 계략이 있는 것 같다고 하셨어. 무슨 계략인지는 알아내지 못하셨지만 말이야. 왕야께서 나한테 알고 있는 게 있냐고 물어보시는데, 나란들 뭘 알겠어. 모른다고 했지. 자, 내가 알고 있는 건 전부 말해 줬으니까 너도 얼른 말해.”

사장풍이 두 손을 펼치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 모르는 거야?”

“뭐?”

“대장군이 되는 거야. 아버지한테 약속할 때 너도 있었잖아.”

가동은 그제야 모든 걸 알겠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맞아, 맞아. 기억난다. 하지만 그게 왕야께서 여인을 내리시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가동은 갑자기 마음이 근질거려 입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네가 여인을 품어 본 적이 없어서 그래. 그건 정말…….”

“넌 있는 거야?”

가동이 눈을 굴리더니 모호한 답을 내놓았다.

“그런 셈이지.”

사장풍이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런 셈은 뭔데.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거지.”

가동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쩍게 말했다.

“마지막에 실패하긴 했지만 그, 그래도 입도 맞추고 또…….”

가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장풍이 귀신을 본 것처럼 기겁하며 물러났다. 불길한 느낌에 고개를 돌린 가동에게 날카로운 손톱이 날아들었다. 피할 새도 없이 얼굴을 뜯긴 가동은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달아났다.

잔뜩 성이 난 녹하가 치맛자락을 붙잡고 가동의 뒤를 맹렬하게 쫓았다. 염치도 없는 놈 같으니, 뻔뻔한 짓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감히 입 밖으로 꺼내려 들었다! 저 입을 당장 찢어놓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듯했다.

허겁지겁 도망치는 가동을 보며 사장풍은 배를 잡고 웃었다. 전쟁 중에 참으로 보기 드문 광경이 아닌가. 한참을 웃은 끝에 발걸음을 돌린 사장풍은 문득 백천범을 떠올렸다. 귀엽기만 한 그녀에게서 저리 사나운 모습을 볼 일이 있을까. 물론 그 또한 가동처럼 얼빠진 짓은 안 할 테지만.

백천범이 묵용감을 선택한 후로 그는 두 번 다시 그녀를 보지 못했다. 그녀에 대한 원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누그러졌다. 그는 본래 패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넘어진다 한들 다시 일어나면 그만이다.

초왕이 군대를 일으킨다는 말에 그는 주저 없이 병사를 자원했다. 연적이라는 입장을 떠나 초왕은 존경스러운 장군이다. 게다가 영웅은 난세에 나온다고 하지 않던가. 초왕을 따라야 공을 세울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초왕을 따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초왕은 황제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장군으로서도, 지도자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훈련을 통해 조금씩 발전한 그는 대장군이 되겠다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시간과 생각을 자신을 갈고닦는 데 쏟아부었다.

하지만 백천범을 다시 만난 밤, 말라비틀어진 그의 연정이 다시금 피어났다. 그는 오랫동안 격앙되어 재회의 순간을 자꾸만 곱씹었다. 두 사람은 운명적인 인연이 틀림없었다.

우두산에서 그녀를 데려온 이는 그였고,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녀를 만난 사람도 다름 아닌 그였다. 초왕은 지척에 있으면서도 그녀를 찾지 못했다. 이런 인연이라면 백천범은 응당 그의 운명과도 같았다.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머지않아 혁혁한 공을 세우는 것은 물론, 사랑하는 여인까지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그의 가슴을 한껏 부풀게 했다.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손이 불쑥 튀어 나와 그를 벽으로 잡아끌었다. 사장풍은 놀라지 않았다. 경비가 삼엄한 관저에 적장이나 강도가 숨어들긴 어려울뿐더러, 자신을 붙잡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녹하에게 쫓기던 가동이다.

막 입을 떼려는데 가동이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고개를 쭉 빼고 모퉁이 너머의 상황을 살피던 가동은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깜짝 놀랐네.”

사장풍이 가동을 비웃었다.

“그렇게나 무서워?”

“무서운 게 아니라 은애하는 거야.”

줄행랑을 칠 땐 언제고, 가동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였다.

“너는 아내가 없으니까 내 마음을 몰라.”

사장풍은 아무 말 없이 웃었다. 아내는 없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기분을 그도 알고 있었다. 저마다 다른 성격을 가지듯 사랑의 형태도 마찬가지다. 그와 백천범의 사랑은 가동과 녹하의 형태와는 다르다. 하지만 그로 인한 행복은 같았다.

가동이 또다시 고개를 내밀고 밖을 살폈다.

“밖으로 나가서 얘기하자. 여긴 역시 위험해.”

사장풍이 결국 픽 웃고 말았다.

“이런 한심한 놈. 어디 가서 우리 마을 출신이라고 하지 마.”

내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겨우 문을 빠져나온 가동은 큰 길가로 나온 후에야 안심한 듯 어깨를 폈다.

“밥시간도 되었겠다,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 네가 큰 공을 세웠으니 축하는 해야지.”

사장풍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 당직을 서야 하지 않아?”

“영구가 있잖아. 게다가 왕야께서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기셨으니 굳이 얼굴도장 찍을 필요 없어.”

사장풍이 살짝 흥미를 보였다.

“얼마나 중요한 일이길래 왕야께 얼굴도 안 비춰?”

“엄청. 엄청 중요한 일이야.”

가동이 품에서 초상화 뭉치를 꺼냈다.

“한번 봐 봐.”

초상화를 펼친 사장풍의 안색이 미미하게 어두워졌다.

“이게 다 뭐야?”

“뭐긴 뭐야. 왕비 마마를 찾는 거지. 내가 이만큼이나 찍어 냈다니까.”

가동이 어깨를 으쓱이며 자랑스레 말했다.

“여기저기 보내 놨으니 조만간 소식이 올 거야.”

“왕야께서는 여기에 왕비 마마가 계실 거라고 확신하시는 거야?”

“확신은 아니야.”

가동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쨌든 왕야께서 명을 내리셨으니 난 따라야지. 못 찾으면 이곳엔 왕비 마마께서 안 계시는 거로 생각하고. 왕야께서도 성을 함락시킬 때마다 이렇게 찾으실 거래. 그러다 보면 언젠간 찾게 될 거라고 하시더라.”

사장풍이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초왕은 백천범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렇다면, 그가 먼저 백천범을 찾아 숨겨야 했다. 하지만 그날 밤, 몇 마디 나눈 게 다인데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그가 아는 사실도 매우 단편적이었다. 성에 난 불을 끄기 위해 주변에 살고 있던 그녀가 지원을 나왔다는 사실 외에는, 그도 아는 게 없었다.

사장풍은 그날 밤 일을 차분히 되짚어 보았지만 좀처럼 단서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때, 문득 뭔가를 떠올렸는지 그가 가동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해야 할 일이 생각났어. 술은 다음에 마시자.”

가동이 어리둥절해 그를 붙잡았다.

“방금 돌아왔는데 할 일이 어디 있어?”

“중요한 일이야.”

사장풍은 가동의 손을 뿌리치고는 슬쩍 떠보듯 물었다.

“그 일… 진척은 있어? 주변 마을은 다 찾아본 거야? 성안도 확인했어? 빠뜨리는 곳이 있으면 안 되잖아.”

“성안은 내가 확인했고 주변 마을도 거의 조사를 마쳤어. 조금 멀리 있는 마을 몇 개가 남긴 했는데, 며칠이면 끝날 거야.”

사장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열심히 해. 난 이만 가 볼게.”

백천밤을 마주친 날, 그는 성의 남쪽 구역 일부의 담당이었다. 그 구역에 지원을 나온 사람들은 성 근처 마을에 사는 사람들로 보였다. 지원자들에게 보상을 하기 위해 명부를 받아 놨다고 했으니, 명부만 찾으면 백천범이 사는 곳을 알 수 있다!

그는 열심히 생각을 이어갔다. 명부는 이튿날 아침 보고되었으니 이 일은 지금쯤 태자에게 넘어갔을 테고, 명부도 태자의 손아귀에 있을 게 분명했다.

초왕과 태자의 분업은 매우 명확하게 나뉘었다. 한 명은 전투, 한 명은 내부 관리를 도맡고 있다. 하지만 무관인 자신이 무슨 명분으로 태자에게 명부를 달라고 할 수 있을까.

* * *

백천범이 제안했던 땅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남쪽 지역의 토질은 너무 푸슬푸슬해서, 숙련자가 아닌 이상 굴을 파내는 게 쉽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관원이 다녀간 이후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월향과 월규는 며칠 동안 마을 곳곳을 서성이며 소문을 들어 보려 했지만,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 두 사람과 달리, 마을 사람들은 백천범이 여인인 줄 몰랐기에 초상화를 보고도 그녀를 닮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월규는 다른 이들과 수다를 떨면서 초상화에 그려진 여인이 무척 예쁘다는 이야기를 흘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월규와 월향이 훨씬 더 예쁘다며 칭찬 일색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초상화 사건은 지나가는 소란에 불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본래의 일상으로 완전히 녹아들었다.

그리고 며칠 뒤, 이장이 세 사람의 집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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