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5화
“범이 형.”
희락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앵앵 누나가 형을 좋아하는 거 아냐? 형만 보면 평소랑 다르게 꽃님처럼 활짝 웃잖아.”
백천범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희락을 흘겨보았다.
“어린 애가 뭘 안다고, 허튼소리 하지 마.”
“내가 무슨 어린 애야. 여덟 살이나 됐는데. 나라고 모를까 봐? 어느 집 아가씨가 사내를 뚫어지게 봐. 형한테 아무 마음도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다!”
백천범이 아무 말도 없이 걸음을 옮기자 희락이 다시 재잘거렸다.
“형, 앵앵 누나가 형을 데릴사위로 들이겠다고 하면, 갈 거야?”
“안 가.”
백천범이 딱 잘라 말했다.
“우리 집도 체면이 있지, 어떻게 데릴사위로 들어갈 수 있어?"
“앵앵 누나네 가게는 엄청나게 크잖아. 데릴사위로 들어가면 나중에 취선루의 주인이 되는 거 아냐? 그럼 골목을 뛰어다니면서 간식을 팔지 않아도 되고, 개울가에서 미꾸라지를 잡을 일도 없잖아.”
백천범이 웃으며 희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아직 몰라서 그래. 간식을 팔고 미꾸라지를 잡는 게 얼마나 좋은데. 맨날 계산대 앞에 앉아 있기만 하면 얼마나 심심해? 지금 하는 게 훨씬 재미있는 일이야.”
잠시 고민하던 희락이 금세 맞장구를 쳤다.
“앗, 그렇네. 마음껏 돌아다니는 게 좋지. 앉아만 있으면 답답하잖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희락과 유유를 보내고 방으로 들어온 백천범이 곧장 돈주머니를 꺼냈다.
“오늘은 운이 좋아서 오는 길에 미꾸라지를 다 팔았어.”
그녀가 주머니를 흔들자 동전이 탁자 위로 와르르 쏟아졌다.
“맨날 오늘 같으면 좋겠다.”
그녀가 호들갑을 떠는데도 월규와 월향은 초상이라도 난 듯 침울한 표정이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월향이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사달이 나려나 봐. 오늘 관리가 찾아왔는데 범이 네 초상화를 들고 얼굴을 일일이 확인했어. 전씨네 아주머니가 옆에 있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큰일 났을 거야. 그때 네가 들어오기라도 할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월규의 안색도 못지않게 어두웠다.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치면 돼.”
“어떻게 도망쳐?”
월향이 머리를 감싸 쥐며 말했다.
“아까 못 들었어? 밖에도 병사들이 쫙 깔렸다잖아. 젊은 여인만 보이면 다 붙잡아 간대. 우리가 도망칠까 봐 왕야께서 미리 손을 쓰신 거야.”
백천범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다부지게 눈을 빛냈다.
“겁낼 게 뭐 있어. 여긴 이미 확인했다며. 또 올 일은 없을 거야.”
“그걸 어찌 알겠어.”
월향이 거의 울다시피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 있는 것도 위험한데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고. 불안해서 미치겠어.”
월규가 한숨을 내쉬더니 팔짱을 꼈다.
“그래도 침착해야 해. 며칠만 상황을 지켜보자. 지금은 전쟁 중이잖아. 병사들도 조만간 투입될 테니, 그때 도망치면 돼.”
“그건 그렇지만…….”
월향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백천범에게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불안하니까 며칠만이라도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 바깥 상황은 나랑 월규가 알아볼게.”
백천범은 방 안을 한동안 서성거리다 갑작스레 두 눈을 반짝였다.
“좋은 방법이 있어. 마당에 땅굴을 파는 거야! 숨을 수도 있고 밖으로 도망칠 수도 있잖아. 또 날 찾으러 오거든 같이 땅굴에 숨자. 좋아, 그렇게 하는 거다? 일단은 밥부터 먹고 얘기하자.”
* * *
엄수의가 수성에 불을 지른 일은 도성까지 빠르게 전해졌다. 소식을 들은 황제는 옥좌를 내리치며 진노했다. 아무리 교전을 벌여도 무고한 백성들에게 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 엄수의의 악랄한 행위에 황제의 분노는 맹렬하게 타올랐다.
조정 신하들은 곧바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긴급한 정보를 전하고자 팔백 리를 달려온 기병이 도착했다. 엄수의가 군대를 이끌고 협곡으로 퇴각하다 매복해 있던 초왕의 군대에 당해 목이 날아갔다는 소식이었다.
수장의 목을 빼앗긴 데다 초왕이 두려웠던 병사들은 죄다 항복했고, 결국 수만 대군이 초왕의 군대로 넘어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초왕의 군대는 더 북진하지 않고 수성 일대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소식을 들은 황제의 안색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대신들은 저마다 의견을 내놓느라 분주했다.
“초왕은 이미 수성을 장악하지 않았소? 어째서 굳이 엄수의를 쫓았단 말이오?”
“초왕이 아니라 사장풍이라는 좌익장이 엄수의의 목을 가져갔습니다.”
“어허, 강장 아래 약졸 없다더니……. 그래도 초왕이 직접 친 게 아니라 천만다행입니다. 초왕이었다면 지금쯤 위수까지 쳐들어왔겠지요.”
“…….”
귓가를 연신 어지럽히는 잡음에 백 승상이 목청을 높였다.
“그만들 하시오. 어찌 아군의 사기는 떨어뜨리고 적군의 기세를 치켜세운단 말이오? 초왕의 병력은 우리의 삼 할도 되지 않소. 수성에 머물러 있다면, 분명 북진을 망설이고 있다는 뜻이오.
폐하께서는 백성들을 굽어살피시느라 남쪽의 병사를 충원하지 않으셨소. 추후 초왕과 협상을 하고 군대를 퇴각시킬 여지를 남겨두신 게 아니겠소? 한데 초왕이 이리 나온다면, 폐하의 병사들이 초왕의 군대를 몰살하는 수밖에 없소.”
백 승상의 말에 신하들이 점차 안정을 되찾고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황제는 일견 침착해 보였지만, 안색은 여전히 잿빛이었다.
“승상의 말이 옳다. 모든 이가 동월국 백성이 아니더냐. 누구도 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 내전에서 가장 고통받는 이는 백성들이다. 동족상잔은 짐도 원하는 바가 아니지만, 초왕이 계속 짐의 뜻을 거스른다면 죽음으로 다스리겠다!”
조회가 끝난 후, 황제는 그 누구의 시중도 받지 않고 남서방으로 향했다. 커다란 자단목 의자에 앉은 그가 두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때, 백 승상이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와 조용히 목소리를 내었다.
“폐하.”
황제는 눈을 감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승상은 이제 어찌해야 한다고 보는가?”
백 승상이 답을 올리기도 전에 황제가 말을 이었다.
“참으로 가소롭도다. 삼 년 전에는 짐을 위해 태자의 군대를 퇴각시키더니, 지금은 태자를 위해 짐을 위협하지 않느냐. 대체 무슨 생각인지 짐은 도무지 알 수가 없네. 짐이 그간 섭섭지 않게 대했건만.
병권도 전부 그 애에게 넘겨주었지. 말로는 충성을 다한다더니, 뒤돌아서서 군대를 일으켰네. 참 실망스러운 일이군. 그간 짐이 해 온 노력과 고생이, 그 애의 눈에는 정녕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백 승상은 묵묵히 황제의 말을 들어 주었다. 황제가 긴 탄식을 마치자 그가 입을 열었다.
“폐하. 노신, 엄수의가 성에 불을 질렀다는 소식을 듣고 깨달은 것이 있사옵니다.”
황제가 비로소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깨달은 것이라니?”
“수성에 불이 나니 초왕이 북진하지 못했습니다. 민심을 생각한답시고 성의 재건에 묶여 있으니 오히려 저희에게는 이득이지요. 하여, 노신의 생각에는 성을 지킬 수 없을 땐 퇴각 직전에 불을 질러 초왕의 발을 묶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리하면 군대를 파견할 시간도 벌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 명을 내리시는 게 어떠…….”
순간 황제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더니 탁자를 내리치며 몸을 떨었다.
“어찌 감히! 엄수의가 저지른 비열한 짓만으로도 분노를 금할 길이 없는데, 짐에게 같은 짓을 하라니! 신하 된 자가 백성들의 생사는 안중에도 없단 말이냐?”
“폐하.”
황제의 분노에도 백 승상은 태연한 표정을 보였다.
“온 천하가 폐하의 것이듯, 백성들도 폐하의 백성입니다. 폐하의 위대한 업적을 위해 백성들이 아주 약간 희생될 뿐입니다. 폐하의 천하와 사직을 지키는 일보다 중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
나라의 혼란을 잠재워야 태평성세가 열리고, 백성들도 마음 놓고 지낼 수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폐하께서는 역사를 빛내는 성군으로 자리매김하시고 초왕은 영원히 악명을 남기게 되겠지요, 폐하!”
백 승상의 말은 참으로 달콤하게 들려 왔다. 그러나 황제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완전히 벗어나는 방법이기도 했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황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안 될 일이야. 어찌… 황제로서 짐은 그리할 수 없네.”
“폐하, 정녕 초왕의 군대가 임안성까지 북진하게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백 승상은 여전히 강경하게 황제를 밀어붙였다.
“천하와 사직을 우선 생각하셔야 합니다. 초왕이 임안성까지 쳐들어왔다간 손쓸 방도가 없습니다. 폐하!”
황제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파묻고 두 눈을 감았다. 어떤 마음을 따르든, 그에겐 고통스러운 결과만이 기다리는 듯했다.
* * *
당당한 걸음으로 수성 관청 회의실에 들어선 사장풍은 주석主席에 앉은 이에게 한쪽 무릎을 굽힌 뒤, 두 손으로 보따리를 들어 올렸다.
“왕야, 소인. 사명을 완수하고 엄수의의 목을 가져왔습니다.”
옆에 있던 가동이 서둘러 보따리를 받아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매듭을 풀어 보니 엄수의의 머리가 들어 있었다.
묵묵히 바라보던 초왕이 비로소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만 일어나거라. 아주 잘했다.”
그가 사장풍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상을 원하느냐? 뭐든 말해 보거라.”
사장풍이 침묵으로 답했다. 그러나 마음은 끊임없이 초왕에게 묻고 있었다.
‘천범 아가씨를 원합니다. 이제 아가씨를 놓아주시겠습니까?’
그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초왕이 격려의 눈빛을 보였다.
“말해 보래도. 뭐든 들어주마.”
사장풍은 허리를 굽히더니 두 손을 맞잡고 예를 갖췄다.
“소인의 직분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상은 필요 없습니다.”
초왕은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장풍이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한때 연적이었던 사장풍이 어찌하여 이리 담담해졌단 말인가? 무엇보다 그를 엄습하는 불길한 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승전보를 들었을 때, 그는 사장풍의 마음을 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때문에 사장풍이 돌아오자마자 원하는 것을 물었지만, 예상과 달리 사장풍은 없다는 말만 거듭했다.
초왕의 예리한 눈빛이 사장풍을 관통하기라도 할 듯 쏟아져 왔다.
“정말 아무것도 필요치 않더냐?”
“예. 소인은 정말 필요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초왕이 긴 손가락으로 탁자를 몇 번 두드렸다. 사장풍은 겸손한 장수의 모범을 보이고 있지만, 초왕의 눈에는 독니를 숨긴 뱀처럼 다가왔다. 초왕은 다시금 수를 던져 보았다.
“사장풍, 네 나이도 적지 않구나. 본왕이 상으로 널 보살펴 줄 여인을 내리겠다. 어떠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