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4화
희락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범이 형, 키가 또 큰 것 같아. 형은 열 살 넘었어?”
“네 나이의 두 배 정도 됐어. 몇 살인지 한번 계산해 봐.”
희락이 손가락을 펴더니 헤아리기 시작했다.
“아홉, 열, 열하나…….”
백천범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학당에 다닌다면서 손가락으로 수를 세는 거야?”
희락이 헤헤 웃었다.
“매일 공부하는 건 너무 힘들단 말이야. 손가락으로 세도 충분하잖아.”
“그 정도 끈기밖에 없으면 어떡해. 너희 집은 가게도 하는데, 계산을 못 하면 아버지를 어떻게 도와드리려고.”
희락이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거야, 계산하는 사람을 두면 되잖아.”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 그들을 불렀다. 고개를 들어보니 백천범의 가게를 빌린 전 씨의 부인이었다. 옆에는 딸아이 유유妞妞도 있었다.
백천범을 유독 좋아하는 유유가 두 눈을 반짝였다.
“범이 오빠, 어디 가?”
백천범이 손에 든 물통을 내보이며 말했다.
“미꾸라지 잡으러.”
마침 전씨 부인은 꽃무늬 원단을 들고 있었다.
“아주머니, 옷감 사러 가세요?”
전씨 부인은 온화한 성격이었다. 그녀가 평소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계절이 바뀌었으니 옷 한 벌씩 해 입으려고. 규가 워낙 솜씨가 좋잖니? 좀 도와달라고 할 생각이란다.”
“잘 생각하셨어요. 안 그래도 요 며칠 짬이 날 테니 어서 누나한테 가 보세요.”
전씨 부인은 유유를 데리고 길을 재촉했지만 유유는 버티고 서서 입술을 삐죽였다. 백천범과 미꾸라지를 잡으러 가고 싶다며 고집을 부리는 통에, 전씨 부인은 백천범을 믿고 유유를 보내 주었다.
희락은 유유가 오는 게 탐탁지 않은지 입을 삐죽거리며 그녀를 계집아이라고 불렀다. 유유가 바로 주먹을 날렸지만, 희락은 허리를 비틀며 도망치더니 익살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약이 오른 유유가 희락을 뒤쫓았고 두 사람은 시시덕거리며 멀리 뛰어갔다. 가장 뒤에서 걸어가던 백천범은 소란스러운 두 아이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일상의 작은 소란이 좋았다.
백천범과 아이들이 개울가에서 미꾸라지와 드렁허리를 잡고 있을 때, 가동의 수하가 초상화를 들고 마을로 들어섰다.
가동의 수하는 한 집도 빼놓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젊은 여인이 보이면 초상화를 들고 얼굴을 일일이 대조했다. 마을에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백천범의 집까지 다다랐다. 앞쪽에서 장사를 하던 전 씨는 관청에서 나온 사람을 알아보고 공손히 맞이했다.
감색 관복을 입은 사람은 이 참사參事였고, 회색 옷을 입은 두 사람은 그의 수행원이었다.
이 참사가 전 씨를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성이 무엇이오? 어디에 살고, 가족은 어떻게 되오?”
전 씨가 여전히 공손한 태도로 답했다.
“쇤네는 전 씨입니다. 여기 뒤뜰에 살고 가족은 처와 딸이 있습니다.”
“호적부에 등재는 되어 있소?”
“예. 이게 쇤네의 호적 표입니다.”
전 씨가 품에서 갈색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이 참사는 그의 호적 표를 꼼꼼히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좋소. 본관과 잠시 뒤뜰에 가야겠소.”
마침 손님이 오는 바람에 전 씨는 미소를 지으며 예를 갖췄다.
“나리, 지금 쇤네가 가게를 비울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 옆길을 따라 들어가시면 뒤뜰이 나옵니다. 다들 집에 있을 것입니다.”
이 참사도 굳이 장사를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뒤뜰로 가 보면 될 일이다.
“알겠소. 볼일 보시오. 들어가서 확인 좀 하겠소.”
그가 두 수행원을 데리고 뒤뜰로 향했다. 수행원이 닫힌 대문을 손으로 밀며 소리쳤다.
“계시오?”
안에서 소리를 들은 월향은 급히 몸을 움츠리고 월규를 바라보았다.
“관아에서 나온 사람이야, 어떡해?”
옷을 만드는 일로 월규와 이야기를 나누던 전 씨 부인이 월향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관아에서 찾아올 수도 있지, 왜 그리 무서워해?”
월규가 서둘러 대신 해명했다.
“무서운 게 아니라, 저희는 호적부에 등록이 안 되어 있잖아요. 향이는 그게 걱정돼서…….”
부인도 곧장 뜻을 이해하고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 내가 해결해 줄게.”
그사이 참사 일행이 방문 앞까지 다가왔다. 전 씨 부인은 서둘러 그들에게 들어오라 청했고 월향에게는 차를 내어오라고 했다.
이 참사는 자리에 앉지도, 차를 마시지도 않고 세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성씨와 출신 지역이 어떻게 되오?”
전 씨 부인이 느긋하게 답했다.
“나리께 아룁니다. 쇤네의 바깥양반이 앞에서 기름 가게를 하는 전 씨입니다. 가게 명패에 적힌 전기錢記가 바깥양반 이름이지요. 이쪽은 제 딸들이고 가향柯鄕에서 왔습니다.”
이 참사가 월향과 월규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초상화를 펼쳐 유심히 살펴보았다. 두 여인 모두 아리따운 외모를 자랑했다. 한 명은 동그란 얼굴형에 온순한 상이었고 다른 한 명은 뾰족한 얼굴형의 여인이었다. 초상화와 나이는 비슷해 보였지만, 아무리 봐도 외모는 닮지 않았다.
그는 초상화를 다시 말아 넣었다. 아리따운 아가씨들 앞인 만큼 그가 두 손을 맞잡고 예를 갖추었다.
“상부의 명인지라 확인을 해야 했소. 그럼, 실례가 많았소.”
그때 월규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나리, 초상화에 그려진 사람은 누구입니까? 왜 찾으시는지요?”
다른 사람이 물었다면 대답도 않았겠지만, 고운 여인의 앞이라 이 참사는 성의껏 답했다.
“그저 상부의 지시에 따를 뿐, 다른 건 우리도 알 수 없소. 지금 관원들이 성 안팎을 돌아다니며 이 여인을 찾는다오. 성 밖 길목에는 병사들까지 배치되었다 들었소. 젊은 여인을 보면 이유 불문하고 잡아들인다고 하니 당분간은 멀리 나가지 마시오.”
담이 작았던 월향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여인에게 자상한 이 참사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걱정하지 마시오. 집에만 있으면 아무 일도 없소.”
* * *
오늘은 제법 많은 미꾸라지를 잡았다. 발을 깨끗이 닦고 신발을 신은 백천범은 한 손에는 광주리, 한 손에는 물통을 든 채 아이들과 기쁜 발걸음을 옮겼다.
길가에 있는 주루酒樓 앞을 지나는데 누군가 튀어나와 그녀를 불렀다.
“범아, 잠깐만.”
백천범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희락이 재밌다는 듯 키득거리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범이 형, 앵앵鶯鶯 누나가 부른다.”
그녀를 부르는 사람은 사앵앵으로, 그녀의 가족들이 주루를 운영하고 있었다. 높게 걸린 파란색 현판에는 「취선루醉仙樓」라는 글자가 금빛으로 새겨져 있었다.
보통 취선루라는 이름을 내건 주루는 호화로운 편이다. 눈앞의 주루 역시 마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집안에 큰 경사가 있을 때면 취선루에 손님을 초대해 술을 대접하는 게 의례였다. 이런 주루에서 손님을 대접하면 꽤나 체면이 서지 않겠는가.
취선루는 평소에도 장사가 잘되는 편이었다. 수성과 가까운 마을이라 남북을 오가는 장사꾼이나 여행객들이 많았는데, 대부분이 취선루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사앵앵은 월향이 만든 간식을 무척 좋아해, 백천범이 지나가면 늘 몇 개씩 사 먹을 정도였다.
아담한 키의 사앵앵이 꽃에 날아드는 나비처럼 사뿐하게 다가왔다.
“범아, 오늘은 간식 없어?”
제철에 나는 재료로 만드는 간식이라, 지금은 재료가 마땅치 않았다. 대부분 옥수수 전병이나 호박 전병, 감자전이 주를 이루었다. 종류가 몇 가지 안 되는 음식을 자주 먹으면 질릴 수 있으니, 요즘은 간식 장사보다는 미꾸라지를 파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썼다.
“내일 감자전을 만들 건데 가져올까?”
“응. 다섯 개만 가져다줘.”
사앵앵이 활짝 웃으며 주머니를 꺼냈다.
“돈은 미리 줄게.”
“아냐.”
백천범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일 간식을 가져왔을 때 주면 돼.”
손이 잡힌 사앵앵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다 수줍게 말했다.
“알겠어. 내일 꼭 가져와야 해.”
옆에 있던 희락이 히죽거리며 끼어들었다.
“누나, 범이 형네 간식이 그렇게 좋아? 다섯 개나 달라니, 혼자 다 먹을 수 있어?”
사앵앵이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장난기가 심한 어린아이들을 유독 싫어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저리 가.”
꾸지람을 들은 희락을 보고 유유가 고소하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그래, 네가 뭔 상관이야!”
신이 난 유유가 적극적으로 백천범의 장사를 도왔다.
“앵앵 언니, 미꾸라지는 안 필요해? 방금 잡아서 엄청 싱싱한데.”
사앵앵이 물통에 빼곡히 찬 미꾸라지를 보더니 감탄을 내뱉었다.
“와, 정말 많네. 마침 필요했는데 잘됐다. 내가 전부 살게. 굳이 시장에 나갈 거 없이 우리 집에 팔고 가.”
백천범은 반색하며 물통을 들고 주루로 들어갔다. 부엌에 놓인 광주리에 미꾸라지를 담고 무게를 잰 그녀는 계산대에서 돈을 받아 품에 쑤셔 넣었다. 활짝 웃는 얼굴로 사앵앵에게 인사를 건넨 뒤, 백천범은 마음만큼이나 가벼운 물통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떠나자 주루 관리인이 울상이 되어 입을 열었다.
“아가씨, 미꾸라지는 잘 팔리지도 않는데 이렇게 많이 사서 어디에 쓰시려고요. 며칠 뒤면 다 죽을 겁니다.”
줄곧 백천범만 바라보던 사앵앵은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고개를 돌렸다.
“그럼 우리가 먹으면 되잖아.”
관리인이 마뜩잖은 듯 중얼거렸다.
“그래도 너무 많습니다요. 날마다 미꾸라지만 먹을 수도 없고…….”
사앵앵이 눈을 부릅뜨자 관리인은 황급히 장부를 정리하러 갔다.
백천범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시장에 가기도 전에 다 팔고 돌아왔으니, 횡재가 따로 없었다.
키가 작았던 유유는 잰걸음으로 뛰어야 겨우 백천범을 따라갈 수 있었다. 유유가 결국 숨을 헐떡이며 불만을 쏟아냈다.
“범이 오빠, 천천히 가. 못 따라가겠잖아.”
희락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유를 놀려 대기 시작했다.
“누가 그렇게 작으래? 나중에 너 좋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겠다!”
백천범이 걸음을 늦추며 희락을 가리켰다.
“알겠어. 천천히 갈게. 걷기 힘들면 희락이한테 업어 달라고 해.”
유유가 입을 삐죽거리다 고개를 홱 돌렸다.
“내가 쟤 부인도 아니고, 쟤한테는 절대 안 업혀.”
백천범은 순간 멍해졌다. 문득 묵용감에게 업혔던 기억이 그녀를 그 시간으로 이끌었다. 부인을 업은 저팔계 같다며 장난을 쳐도 그는 화를 내기는커녕, 그녀야말로 아기 돼지라며 맞받아쳤다. 돼지띠였던 그녀는 종종 농담 삼아 자신을 돼지라고 불렀기에 깔깔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그때, 그녀는 정말 행복했다. 웃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없었다. 그녀에게 늘 자상했던 그는 그녀가 재채기만 해도 걱정하지 않았던가. 지금은 스스로 살길을 찾아 부족함 없이 살고 있으니 그리 나쁘지는 않다. 다만… 불쑥불쑥 나오는 단어 하나에도 그가 떠올라, 그녀는 종종 멍해지곤 했다.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