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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03)화 (302/1,192)

제303화

불이 전부 꺼지고 날이 밝아 와도 폐허에서는 여전히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치 죽은 이들을 위해 길게 타오르는 향처럼 연기는 쉼 없이 솟구쳤다. 터전을 잃은 백성들은 대문 앞에 주저앉아 통곡하거나 넋을 놓았다. 어떤 이는 잿더미를 뒤적거리며 쓸 만한 물건을 찾기도 했다. 하나같이 남루한 옷차림과 꾀죄죄한 몰골이 난민보다 비참해 보였다.

성안의 관청은 텅 비어 있었다. 묵용감은 수성 부윤의 관아를 정리하여 임시 관청으로 바꿔 두었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였기에 그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태자가 곁에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묵용연은 본디 황태자였으니 이런 업무에 익숙했다. 폐허가 된 성의 정리부터 가택 수리, 구휼 등 사소한 일부터 중요한 일까지 가리지 않았다.

묵용감은 부하들을 소집하여 병사 배치 작전을 논의했다. 사장풍을 좌익장으로 선발한 그는 병사들을 인솔해 엄수의를 추격하라 명했다. 여기에 잔혹한 군령장을 작성했는데, 엄수의의 목을 가져오지 못하면 사장풍이 목을 내놓아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는 사장풍을 지그시 응시하며 그의 대답을 물었다.

그날 밤, 사장풍의 표정에서 모종의 계략을 읽어낸 그였다. 무슨 일이든 쉽게 이루도록 놔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사장풍은 곧바로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가 두 손을 머리 위로 뻗어 초왕의 군령장을 받아 들었다.

논의가 끝난 후, 부하들이 하나둘 해산하는 가운데 묵용감이 사장풍을 불러 세웠다.

“군령장은 함부로 받는 게 아니다. 열흘 안에 엄수의의 머리를 가져오지 못하면 네 머리를 내놓아야 한다. 그 뜻을 알고 있느냐?”

“잘 알고 있습니다. 열흘 안에 엄수의의 목을 가져오지 못하면, 소인의 머리를 기꺼이 왕야께 바치겠습니다.”

사장풍은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기필코 해야 하는 일이다. 그는 물러설 생각도, 도망칠 생각도 없었다.

묵용감은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천범 때문에 사장풍은 오랜 시간 실의에 빠져 지내지 않았던가. 혼란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병사를 모집할 때, 사장풍은 그의 병사가 되겠다며 찾아왔다. 그는 옛일에 연연하지 않고 사장풍을 받아 주었지만, 남몰래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사장풍이 전투에 뛰어났으나, 어떤 전적을 얻든 얼굴에 늘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림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자연스레 의구심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을까. 정말 좌익장이 된 것만으로 저리 자신감이 넘치는가?

“떠나기 전, 본왕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느냐?”

“없습니다. 소인이 반드시 좋은 소식을 가져올 테니 지켜봐 주십시오.”

묵용감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손을 내저었다.

“그만 가 보거라.”

사장풍이 떠난 뒤, 묵용감은 가동을 불러들였다.

“사장풍이 별말 없었느냐?”

가동은 의아해하며 되물을 뿐이었다.

“없었습니다. 그날 제가 없는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셨습니까?”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리자 가동이 서둘러 덧붙였다.

“왕야, 무엇이 알고 싶으십니까, 소인이 가서 떠볼까요?”

묵용감은 속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저 얼치기 같은 놈이 사장풍에게서 정보를 캐 오겠다니, 역으로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되었다.”

그가 고개를 젓고는 말을 이었다.

“내 너에게 맡길 일이 있다.”

가동은 감격스러웠다. 묵용감은 늘 영구에게만 지시를 내렸지, 그에게 일을 맡기는 때는 극히 드물었다. 게다가 영구는 입이 무거워 정보를 알려 주는 법이 없으니, 그는 가장 늦게 사실을 알곤 했다.

초왕이 자신에게 분부를 내린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가동은 곧장 예를 갖췄다.

“왕야, 분부만 내리십시오. 소인이 온 힘을 다해 완수하겠습니다.”

묵용감이 상자에서 족자를 하나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이걸 들고 성 안팎을 조사해 보거라.”

족자에 그려진 초상화를 보는 순간, 가동은 초왕의 지시를 곧바로 이해했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어린 왕비였다. 갸름한 얼굴에 까맣게 반짝이는 눈, 한쪽으로 삐뚤어진 쪽머리까지. 실물과 똑같진 않았지만 제법 비슷한 분위기라, 한눈에 봐도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왕비 마마께서 이곳에 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묵용감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리 오랫동안 영남에서 소식이 없었으니, 영남에 없는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성을 함락할 때마다 초상화를 들고 주변을 탐문하겠다. 그러다 보면… 언젠간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

초왕의 목소리에는 서글픔이 배어 있었다. 마음이 시큰해진 가동은 족자를 말아 조심스레 품에 넣었다.

“왕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인이 최선을 다해 왕비 마마를 찾겠습니다.”

“그래. 가서 볼일 보거라.”

밖으로 향하던 가동이 우뚝 멈춰 섰다.

“왕야, 이 일은 공개적으로 진행합니까? 아니면 암암리에 찾을까요?”

묵용감이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

“어느 방법이든 상관없다. 찾기만 하면 된다.”

“예. 알겠습니다.”

밖으로 나온 가동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반드시 완수해야 한다. 그래야 초왕에게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각인시킬 수 있다. 게다가 녹하도 늘 어린 왕비를 걱정하지 않았던가. 그가 왕비를 찾아낸다면 녹하에게 확실히 점수를 따고도 남으리라!

녹하를 떠올리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행군 중이라 혼사를 치르기 어렵다지만, 어여쁜 여인은 늘 그의 눈앞을 서성대며 그의 마음을 애끓게 했다. 몇 번이나 은밀히 신혼의 달콤함을 속삭이려 했지만 녹하는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왕비를 찾기 전까진 혼인할 수 없으니 선을 넘지 않겠다는 결심은 견고한 성처럼 단단했다.

이미 참기 힘든 수준까지 도달한 그는 녹하를 볼 때마다 이마에 땀이 흥건할 만큼 초조해지곤 했다. 어떻게든 밀어붙이려 했지만, 그녀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당장 폭발해 버릴 듯 괴로웠던 그는 하는 수 없이 수풀에 숨어 홀로 해결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 뒤로 녹하는 거의 이틀간 가동을 보려 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방탕한 놈이라며 욕을 퍼붓기 일쑤였다. 녹하에게 들은 욕이 떠오르자 가동은 쓰라린 눈물을 삼켰다. 스무 살이 넘은 사내가 혼사도 못 치르고 애끓고 있으니, 이 심정을 누가 알아줄까!

가동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왕 한다면 확실히 처리하는 편이 좋았다. 그는 탁본을 뜰 사람을 찾아 초상화를 여러 장 만들고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재해를 입지 않은 동네를 돌아다니며 집마다 물어볼 계획이었다. 한곳에 모여 있는 이재민들은 한 명씩 대조해 보면 될 듯했다.

수성 주변의 작은 마을에도 초상화를 배포했다. 이장이나 촌장들이 나서면 대조하는 일이 보다 쉬워질 터였다. 혹여 왕비가 미리 소문을 듣고 도망치더라도, 곳곳에 초왕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으니 절대 포위망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빠져나갈 틈 없이 대대적으로 수색해도 왕비를 찾지 못한다면, 왕비는 정말 이곳에 없다는 뜻이리라.

수성의 재건과 수리는 태자 묵용연의 지휘 아래, 초왕비를 찾는 일은 가동의 지휘 아래 활발히 진행되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화마로 인한 백성들의 고난과 근심은 점차 옅어져 갔다.

관청을 임시 거주지로 정했기에 기홍과 녹하, 황보주아와 두 시녀도 관청으로 들어왔다. 앞뜰에서 공무를 보고 뒤뜰은 거처로 사용되었다. 오랫동안 적적하던 관청이 별안간 활기를 띠었다.

* * *

폐허가 된 수성은 대대적인 복구 작업이 시급했다. 인근 마을의 목수와 미장이들이 모두 동원되어 작업에 매달렸다. 조수도 적잖이 필요했던 탓에 어린아이들까지 일손을 거들었다. 관가에서 주는 품삯은 다른 일에 비해 많은 편인 데다 가로채는 일도 없으니, 이른 아침 성으로 향하는 커다란 마차는 늘 사람들로 붐볐다.

백천범도 돈을 벌고 싶었다. 아침에 나가면 저녁에 한 손 가득 동전을 들고 돌아올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좋지 않은가! 그러나 월규와 월향이 결사반대하고 나섰다. 백천범이 사내로 분장을 하고 있긴 해도, 어쨌든 여인이 종일 사내들과 어울리는 일은 안 된다며 매달렸다. 무엇보다 반년 내내 그녀를 제대로 보살펴 주지 못한 것도 속상한데 밖에서 고생을 하게 둘 수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초왕이 수성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 월규와 월향을 불안하게 했다. 불을 끄던 날은 각기 진화에 정신이 없고 밤이니 마주치지 못했더라도, 대낮에 갑자기 마주친다면? 영구나 가동을 마주쳐도 큰일이었다.

두 사람의 걱정에도 백천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왠지 묵용감과 별로 인연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묵용감이 아닌 사장풍을 만난 게 그 증거가 아닐까.

다만 월규와 월향이 울고 불며 심하게 반대하니, 하는 수 없이 가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말았다.

성에 가지 않더라도 온종일 집에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개울가에서 미꾸라지를 잡을 생각에 물통을 챙겨 나왔다. 초여름에는 제법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운이 좋을 때에는 드렁허리를 잡기도 했다. 이곳 사람들은 드렁허리의 가늘고 긴 모습이 뱀을 연상시킨다며 먹기를 꺼렸다.

보통 드렁허리는 북쪽 지역에 내다 팔았다. 도성까지 옮기려면 며칠에 한 번씩 깨끗한 물로 갈아주는 수고가 들었다. 도성에 도착할 때까지 살아 있는 건 많지 않았지만, 비싼 가격에 팔리기 때문에 돈이 많은 사람이나 사 먹을 수 있었다.

그녀도 초왕의 저택에 있을 때 몇 번 먹어 본 적 있었다. 맛이 정말 일품이었으니, 만약 잡게 되면 가져가 먹고 미꾸라지만 내다 팔 생각이었다.

개울로 향하던 그녀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소리쳤다.

“숨어 있지 말고 나와!”

나무 뒤에서 희락이 고개를 내밀더니 헤벌쭉 웃으며 뛰어왔다.

“범이 형, 미꾸라지 잡으러 가? 나도 갈래.”

백천범이 희락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왜 숨어 있었어?”

“규 누나가 볼까 그랬지. 날 보면 혼낼 테니까.”

희락이 헤실거리며 말을 이었다.

“누나가 날 혼내면 우리 엄마랑 또 싸울 거야. 우리 엄마는 규 누나가 시집도 못 갈 거래.”

백천범이 박장대소를 터뜨리더니 희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규 누나는 입은 좀 거칠어도 마음이 여린 사람이야. 엄마한테 마음에 담아 두시지 말라고 전해 드려.”

희락이 입술을 삐죽였다.

“역시 우리 같은 사내대장부가 훨씬 낫지. 여인들처럼 잔소리하진 않잖아.”

백천범은 픽 웃더니 희락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고작 여덟 살도 안 됐으면서, 사내대장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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