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302)화 (301/1,192)

제302화

죽음으로 인한 상처는,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천천히 아물어 갔다. 유모는 그녀에게 이제 희미한 흉터로만 남지 않았던가.

그러나 살아 있어도 볼 수 없으니, 개미에게 천천히 마음을 갉아 먹히는 듯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만 느껴졌다.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음을 알기에, 어디엔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수도 없이 그리움이 솟구쳤다. 그녀는 한밤중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기 일쑤였다. 당장이라도 그를 찾아가고 싶었다.

설령 그가 그녀를 죽인다고 해도,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한번 그런 생각이 들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문 앞을 서성거렸다. 어느 날은 거리로 뛰쳐나가기까지 했다. 그러나 어둡고 조용한 거리에서, 그녀는 마음을 접고 돌아왔다.

수없이 고민하고 망설이던 날들이 지금의 복잡하고 불안한 감정을 만들어 냈다. 이제는 정말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이토록 뒤엉킨 감정을 표현할 방법을 몰라, 그녀는 입을 다물고 서 있었다.

사장풍은 한때 마음에 품었던 여인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초왕의 곁을 차지한 여인 때문에 백천범이 도망쳤단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한동안 끝도 없는 분노에 시달렸다.

때론 그녀와 다시 만나 이루지 못한 연을 잇는 상상도 해 보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모습을 보니,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의 마음은 늘 한 명만이 들어갈 수 있었고, 그 자리는 여전히 묵용감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던 그는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마음을 가라앉힌 그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키가 많이 크셨습니다.”

백천범이 고개를 돌리며 작별 인사를 고했다.

“먼저 갈게요.”

“…몸조심하십시오.”

“사 제독님도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수건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둠 속을 헤치고 나아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풍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가동의 목소리다. 그녀는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장풍이 고개를 돌리자 초왕이 가동과 함께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이쪽은 어찌 되었느냐?”

사장풍이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위로 들어 올렸다.

“불길은 잡았습니다. 곧 완전히 끌 수 있을 듯합니다.”

“수고했다.”

초왕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한쪽을 가리켰다.

“둘째 형님께서 저쪽을 진화하고 있으니, 이쪽 일을 마치는 대로 병력을 이끌고 가서 돕거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초왕은 북쪽을 살피러 갈 채비를 서둘렀다.

사장풍이 그를 불러세웠다.

“왕야,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냐?”

사장풍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가동을 바라보았다.

가동이 입을 삐죽거렸다. 다른 이도 아니고, 자신을 남처럼 여긴단 말인가? 자리를 비켜 달라고 하다니,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는 사장풍의 시선을 못 본 척 버티고 섰다. 그러나 초왕이 날 선 눈빛을 보내자 그는 골이 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가동이 떠난 뒤에도 사장풍은 묵묵부답이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뭔가를 주저하고 있었다.

결국 초왕이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너와 꾸물거릴 시간 없다. 할 말이 생각나거든 다시 찾아오너라.”

사장풍이 그제야 황급히 말을 꺼냈다.

“왕야, 소인은 왕야의 좌익장이 되고 싶습니다. 엄수의를 추포하실 때 소인도 데려가 주십시오. 그자의 목으로 세상을 떠난 전우들과 백성들을 위해 제를 지내겠습니다.”

초왕이 뒷짐을 지더니 코웃음을 쳤다.

“본왕의 좌측 선봉에 서고 싶다?”

“왕야께서 지난날의 감정을 잊고 소인을 받아 주셨으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간 왕야를 따르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고, 제 편협한 생각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소인도 왕야처럼 혁혁한 공을 세워 훗날…….”

“대장군이 되고 싶다?”

묵용감은 그날 순포 관청 뒤뜰에서 사장풍이 그의 부친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어딘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야망이 있군.”

사장풍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초왕은 모르고 있다. 사장풍의 마음에 드리운 수만 가지 고민 중 그가 마침내 붙잡은 결론을.

그는 대장군이 되고 싶었다. 출세와 명예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그녀에게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백천범은 여전히 초왕을 그리워했지만 만나는 건 꺼리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에게도 조금이나마 희망이 남아 있는 셈이었다. 그는 기다릴 자신이 있었다. 그녀가 초왕을 잊는 날까지 기다릴 것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만반의 준비를 해 둘 작정이었다. 그래야 모든 일을 순조롭게 해결할 수 있었다.

“기회를 주마. 다만 기회를 잡는 건, 온전히 네 몫이다.”

“소인, 왕야의 기대를 절대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초왕이 그의 어깨를 토닥인 뒤 발걸음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사장풍이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왕야.”

묵용감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또 무슨 일이냐?”

사장풍은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 그와 초왕 둘 다 공평한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를 먼저 찾는 이가 승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한동안 주저하던 사장풍은 결국 말을 삼켰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왕야.”

그는 다시 한번 맞잡은 손을 올리고 예를 갖췄다. 눈빛에는 망설임이 가득했지만, 입은 굳건하게 다물려 있었다.

초왕은 그의 태도가 의심스러웠지만 딱히 잘못된 점을 짚을 수 없었기에 미간을 찌푸리고 나아갔다.

* * *

백천범은 이장이 있는 곳으로 가서 명부에 서명을 했다. 그녀가 전범이라고 적힌 이름 밑에 표시를 하자 이장이 눈을 크게 떴다.

“네가 전범이냐?”

그녀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이장도 별말 않더니 근처에 서 있는 서너 명을 가리켰다.

“저쪽에서 기다려라. 사람이 모두 모이면 그때 출발할 거다.”

백천범은 이장이 가리킨 사람들에게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그녀에게 물을 건넸다.

“범아, 힘들었지? 물 좀 마셔.”

그녀가 물주머니를 받아 들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 조 형!”

고개를 젖히고 얼른 물을 들이켰다. 안 그래도 목이 바짝바짝 타고 있었다. 목을 축이고 물주머니를 돌려준 그녀는 벽에 기대어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그녀도 월규와 월향이 걱정했던 일이 고민이었다. 초왕과 마주친다면 어찌해야 할까? 그녀는 자신이 모든 걸 포기할까 싶어 겁이 났다. 성에 들어온 뒤로 가슴이 끊임없이 술렁였다. 한데 초왕이 아니라 사장풍과 마주치다니, 초왕보다는 사장풍과 더 인연이 깊은 게 아닐까?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어렴풋이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유심히 들어 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인 듯했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형, 저쪽에서 아이가 우는 것 같아. 내가 가 볼게.”

조 형이라 불린 사내는 마을의 대장장이였다. 그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 모이면 떠나니까 빨리 다녀와. 마차가 기다려 주진 않을 거야.”

백천범은 그에게 삽을 맡기고 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직 사방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자욱한 연기가 앞을 가리자 매캐함에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울퉁불퉁한 바닥에는 불에 탄 벽돌과 나뭇가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백천범은 앞을 더듬거리며 천천히 나아갔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몸을 튼 그녀가 자세를 낮췄다. 점점 더 커지는 울음소리를 따라가니, 역시나 담장 아래 한 아이가 웅크린 채 울고 있었다.

“왜 혼자 있어? 가족을 잃어버린 거야?”

아이가 서럽게 흐느끼며 말했다.

“엄마랑… 아빠를 못 찾겠어.”

백천범이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다부지게 말했다.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줄 테니까, 거기서 한번 물어보자. 알겠지?”

아이가 대답과 함께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꾀죄죄한 얼굴에 떠오른 눈빛이 참으로 가여웠다.

그 시선에 백천범의 마음이 아려왔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했다. 유모가 죽은 뒤 그녀도 이토록 가여운 눈으로 큰오빠를 봤을까. 그때 그녀는 큰오빠에게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큰오빠는 나중에 꼭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했지만, 약속의 뒤에는 곤란함이 있었다.

덕분에 그녀도 홀로 남겨진 기분을 잘 알게 되었다. 백천범은 아이의 손을 꼭 붙잡아 주며 미소를 보였다.

“걱정하지 마. 형이랑 같이 찾아보자.”

아이를 폐허 속에서 데리고 나와 사람이 많은 곳으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가족들을 찾는 이들을 숱하게 마주쳤다. 부모는 자식을, 아이는 부모를 목 놓아 불렀다. 그들의 애타는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때리고 있었다. 아이가 말을 걸었지만 대답도 할 수 없을 정도로.

* * *

마침내 모든 불이 꺼지고 수성은 짙은 암흑에 파묻혔다. 성이 삼 할 정도 불탔을 무렵부터 진화에 나섰기에, 한밤중이 되어서야 진화가 끝났다. 묵용감은 백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사람을 애타게 찾는 소리, 걱정스러운 목소리, 울음소리 등이 난잡하게 뒤섞여 그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사방이 어두우니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때 한 아이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형, 우리 엄마랑 아빠를 찾을 수 있을까?”

대답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대답을 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밤이 지나고 해가 떠오르면, 드러난 폐허에서 많은 이들이 비극적인 이별과 감격스러운 재회를 겪을 터였다.

묵묵히 앞을 향해 걷던 그는 별안간 마음을 붙드는 기이한 감정을 느꼈다. 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급히 몸을 돌려세웠다. 되돌아가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로 넘쳐났다. 이토록 사람이 많은데도, 어둠이 짙게 드리워지니 그 희미한 그림자는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결국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어찌 이곳에 있을까. 마음이 흐트러지면 헛것이 보인다더니, 역시 그의 착각이리라.

다시 앞을 향해 걸어가는데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 왔다.

“전범, 전범아……!”

그의 눈이 확 커졌다.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황급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렸다.

“방금 누굴 불렀더냐?”

“예? 그게, 전범이라고 저희 마을에 사는 아이입니다. 아직 오지 않아 찾고 있었습니다.”

“전 씨라 하였느냐?”

“예. 성은 전 씨고 이름은 범, 외자입니다.”

천범이 아니라 전범이었다. 그는 손끝부터 힘이 빠지는 느낌에 탄식을 내뱉으며 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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