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1화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어쩌면 이라는 희망이 그녀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묵용감의 대답은 그녀의 정신을 일깨웠다. 결국 답을 듣고 말았으니, 그녀의 마음은 시린 설원 한가운데에 남겨진 듯했다. 그는 함께 그 설원을 걸어갈 이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조금의 연정도 남지 않았으므로.
황보주아는 한기가 서린 숨을 내쉬고 겨우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오라버니께서 성을 무너뜨리실 날만 기다리겠습니다.”
그녀는 대갓집 규수였다. 아무리 감정이 요동쳐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다. 늘 예를 갖추고 실수 없이 행동해야 했다.
묵용감은 천천히 밖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리따운 자태는 기억 속 그대로였지만, 이제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다. 그녀와 함께한 옛일들이 그저 한바탕 꿈처럼 다가왔다. 백천범을 만나면서 그는 백일몽에서 깨어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자가 막사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주아의 표정이 좋지 않던데, 싸우기라도 했느냐?”
묵용감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와 주아가 싸울 일이 있겠습니까.”
태자가 그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주아는 몇 년간 네 생각뿐이었다. 의지할 데라고는 너밖에 없는 아이니, 주아의 마음을 저버리지 말거라.”
“…그렇습니까?”
묵용감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간 형님과 함께 지냈으면서 돌아왔을 때는 혈혈단신으로 지낸 척했습니다. 그런데도 의지할 데가 저밖에 없는 아이입니까?”
“내가 시킨 일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드러낼 수 없었으니. 숨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런 일로 주아를 탓하지 말거라.”
묵용감은 시선을 떨구고 모래 지도만 바라보았다. 입김 한 번에도 흩어질 모래처럼, 그의 마음 안에서도 무언가 흩어진 지 오래였다.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변하는 법입니다. 그만큼 더 정확히 보이기도 하지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지금은 공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형님께선 생각해 두신 전략이 있으십니까?”
“전투는 네가 전문이 아니더냐.”
태자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 말대로 따르겠다.”
묵용감이 마지막 깃발을 모래 지도에 꽂았다. 어느새 그는 전략을 짜고 전장을 지휘하는 초왕으로 돌아와 있었다.
“더 기다릴 필요 없습니다. 오늘, 공격을 개시하겠습니다.”
“오늘?”
태자가 생각지도 못한 듯 깜짝 놀라며 물었다.
“방금 병사를 철수시키지 않았더냐? 지금 다시 출병하겠다니, 방어할 틈도 없이 공격하려는 게냐?”
묵용감이 고개를 젓더니 막사의 천을 걷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은 힘을 비축해 두었다가 밤에 치려 합니다.”
“왜 밤까지 기다리느냐? 어두운 밤에 적군이 성루에서 등을 비추면 우리가 불리하지 않겠느냐?”
묵용감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밤이 되면 형님도 아시겠지요.”
그는 전장을 누비며 온갖 전투를 섭렵한 동월국 최고의 군신이다. 많은 이들은 그가 많은 병사를 앞세워 적을 무찌르는 줄 알고 있다. 그들은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뛰어난 장수라면 모름지기 용기와 지혜를 겸비해야 하는 법이다.
용기를 가져야 모든 병사가 우러러보는 정신적 지주로 자리 잡을 수 있고, 빠른 판단과 다방면의 지식을 겸비해야 훌륭한 전술을 펼칠 수 있다. 하다못해 기상 예측 따위까지 섭렵해 둘 필요가 있었다.
태자의 말은 일리가 있다. 적군은 성안에 있으니 높은 곳에서 등을 비추면 그의 병력은 숨을 길이 없을 터. 그러나 그의 걱정은 다른 곳에 있었다. 적군이 그의 병력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의 머릿속엔 풍등을 띄워 적군이 그의 병력을 똑똑히 마주하는 계획이 자리잡고 있었다.
* * *
수성의 함락은 묵용감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가 자신만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묵용감이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성이 함락되자 엄수의가 도망칠 길을 열기 위해 성에 불을 지른 것이다.
성문을 열자마자 치솟는 화염과 함께 구슬피 우는 백성들의 소리가 흘러넘쳤다. 만약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릴 만큼 화가 치솟은 묵용감은 서둘러 불길에 달려들었다. 지금은 공격보다 백성을 구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는 절호의 기회를 잡아 성을 함락했지만 엄수의는 성에 불을 지르는 걸로 기회를 만들어 내었다. 불길이 순식간에 몸을 불리며 하늘을 붉은 열기로 물들였다. 성안에 있던 백성들은 치솟는 불길 사이를 허둥지둥 뛰어다녔다.
혼란 속에서 다른 이에게 짓밟히거나 연기를 마신 자가 부지기수였다. 다들 발밑에 있는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고 벌떼처럼 그 위를 짓밟고 지나갔다. 치솟는 불길보다 무서운 것은 이성을 잃은 백성들이었다. 쓰러진 이와 짓밟혀 신음하는 이, 도와 달라며 울부짖는 이들의 모습은 아비규환을 연상케 했다.
초왕과 태자는 혼란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한 명은 불을 끄는 일을, 다른 한 명은 백성들을 대피시켜 혼란을 잠재우는 일을 지휘했다.
그 와중에 겁에 질린 백성들은 불이 붙지 않은 곳으로 도망쳤지만 오히려 죽음에 이르는 길이었다. 태자는 병사를 배치해 백성들 앞을 막아섰고, 잿더미가 된 폐허로 이끌었다. 고약한 냄새에 숨을 쉬기도 버거웠지만, 이미 불길이 사그라든 곳이라 오히려 안전했다.
초왕은 병사들과 함께 불을 끄려 했지만 그들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성 밖의 마을로 병사들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말이 요청이지, 사실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다들 허겁지겁 성으로 달려왔다. 비겁하게 몸을 사린다면 초왕에게 용서받지 못할 게 뻔했다.
초왕에게 목이 잘려 나가고 싶은 이는 아무도 없었던 데다 목숨을 구하는 일이니 너나 할 것 없이 지원에 나섰다. 다들 집에 있는 물통과 삽, 젖은 솜이불 등을 챙겨서 성안으로 향했다.
지원 요청은 사내들에게만 적용되었다. 여인이나 아이, 노인들은 집을 지켰다. 사람이 많을수록 혼잡할 수밖에 없으니, 꼭 필요한 인원만 데려가는 게 나았다.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면 오히려 방해만 될 테니. 백천범의 집에서는 당연히 백천범이 가야 했다. 월규와 월향은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초왕이 성안에 있다는데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백천범이 웃으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이렇게 어두운데 누가 누군지 어떻게 알겠어. 걱정하지 마. 불만 끄고 바로 올게.”
짧은 웃옷을 입고 각반까지 깔끔하게 맨 그녀는 영락없는 사내아이로 보였다.
밖으로 나오니 마당에서도 성안의 불길이 보였다. 저렇게 큰불이라면 단순히 물을 끼얹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에 있던 삽을 들고 서둘러 어둠 속을 달려 나갔다.
성 입구에 다다르자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덮쳤다. 매캐한 연기가 사방에 자욱했다. 백천범은 서둘러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른 이들과 들어갔다. 많은 사람이 한데 뒤엉켜 혼란스러운 성안에서, 병사들은 땅에 널브러진 시신을 한쪽으로 옮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평상시에 이렇게 많은 시신을 봤다면 기겁했겠지만, 전쟁이 벌어진 상황인 만큼 다들 엄숙하게 지시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시 사항이 내려왔고, 모두가 질서정연하게 불을 끄기 시작했다.
백천범은 작은 건물 앞에 배정되었다. 남쪽 지역의 저택은 북쪽 지역과 달리 대부분이 2~3층짜리 건물이었다. 게다가 건물들이 죄다 이어져 있어 불이 쉽게 옮겨붙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다행히 건물 뒤에 연못이 있어 물을 빠르게 끼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러 채의 건물을 집어삼키며 피어오른 불길은 좀처럼 꺼질 줄을 몰랐다. 물통을 나르던 백천범은 아예 삽으로 젖은 흙을 퍼서 불길에 던져넣었다. 그녀가 흙을 던져넣은 부분만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이를 본 몇몇 사람들은 물통을 내던지고 주변에서 젖은 나뭇가지를 찾아 던졌다. 물을 머금은 나뭇잎과 가지에는 불이 붙지 못하고 연기만 피어올랐다. 그 후에도 여러 방법을 사용하니 마침내 불길이 조금씩 잡히는 듯했다.
앞에 나선 사람들이 지치면 뒤에 있던 사람들이 나서서 불길을 잡았다. 백천범은 한 번도 쉬지 않고 앞을 지켰다. 얼굴을 덮은 수건은 불길 앞에서 진작 말라 버렸지만, 온몸에 땀이 흘러내린 탓에 젖고 마르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불길 앞에서 버티고 있었을까. 결국 그녀도 더는 팔을 들기가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손에서 삽을 낚아챘다.
“그러다 죽고 싶은 것이냐? 잠시 쉬었다 하거라.”
아주 오랜만이었지만,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백천범은 멍하니 그자를 올려다보았다.
갑옷을 입은 사내는 큰 키에 짙은 눈썹, 큰 눈을 가지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자국이 얼굴 곳곳에 남아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그는 부단히 삽으로 모래를 퍼 올렸다. 그녀와는 달리 단단한 팔을 휘두르며 연신 모래를 쏟아붓자, 어느덧 연기만이 피어올랐다.
백천범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그때, 그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멈추거라.”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가 땀을 훔치며 다가오더니 삽을 건넸다.
“네 것이다. 필요 없는 것이냐?”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손만 뻗어 삽을 받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억센 손아귀가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남자는 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얼굴을 보여라.”
그녀가 미동도 하지 않자 그가 직접 얼굴을 덮은 수건을 걷어 냈다. 얼굴이 드러난 순간,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어떻게 왕……?”
백천범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사장풍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녀를 한쪽으로 끌고 가 조용히 물었다.
“왜 여기 계십니까? 왕야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날 만났단 말은 절대 하지 마세요.”
“왕야께서 아시는 게 싫으십니까?”
백천범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보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그녀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무서웠다. 그녀는 초왕에게서 도망친 왕비였다. 그의 성격이라면 홧김에 그녀를 죽여도 이상하지 않다. 원망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황보주아는 옆에 두고 저만 우스운 꼴을 만들다니…….
또 다른 감정이 들기도 했다.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 둔 그 감정. 아무도 모르지만 그녀만큼은 또렷이 느끼는 감정, 그리움이었다. 그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숨기는 게 거의 없었지만, 묵용감에 대한 그리움만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사별이 가장 고통스러운 줄 알았다. 떠난 이를 땅에 묻고 나면 두 번 다신 볼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안다. 생이별이, 그와 떨어져 있는 지금이 더욱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