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0화
모래시계를 보던 녹하가 기홍에게 고개를 돌렸다.
“햇볕 쬐어 줄 시간이야.”
기홍이 나물을 다듬으며 대꾸했다.
“네가 데려가. 나는 이거 마쳐야 해.”
녹하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한쪽에 놓인 커다란 대바구니를 들고 막사를 나섰다.
바깥은 맑고 쾌적했다. 살랑거리는 초여름 공기에 그윽한 꽃향기가 담겨 있었고, 따사로운 햇살이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 주었다.
녹하는 대바구니를 한쪽 풀밭에 내려놓았다. 바구니 안에는 토끼 여섯 마리가 납작 엎드려 있었다. 그녀가 한 마리씩 밖으로 꺼내놓자 토끼들은 풀밭에 엎드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녹하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희 주인님이랑은 딴판이구나. 너희 주인님은 늘 쉴 새 없이 돌아다니셨는데. 너희는 돼지처럼 꼼짝도 하질 않네.”
저택을 떠나던 날, 초왕은 남월각에 남아 있던 토끼 세 마리와 회림각에 있던 두 마리, 앞뜰에 있던 한 마리까지 함께 데려가라고 지시했다. 안타깝게도 설구와 구구는 데려올 수 없었다. 어린 왕비가 떠난 뒤 어떤 먹이도 먹지 않고 시름시름 앓다 굶어 죽고 말았으니.
그녀가 희미한 탄식을 내뱉었다. 주인이 의리가 넘치는 사람이라, 토끼마저 주인을 닮은 것만 같았다.
그때, 바람결에 방울 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들어왔다. 방울 소리처럼 들려도 사실 허리에 찬 옥구슬이 짤랑이며 나는 소리다. 고개를 든 녹하가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피해 다녀도 모자랄 와중에 그녀는 기어코 녹하에게 다가왔다. 망신을 당하고 싶어 안달이 난 걸까?
황보주아는 녹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쪼그려 앉아 토끼를 살폈다. 보송보송한 토끼를 귀여워하지 않고 어떻게 지나칠까! 그녀도 토끼가 갖고 싶었지만 묵용감에게 말을 꺼내기 조금 부끄러웠다.
한참 지켜보던 그녀가 결국 토끼를 쓰다듬었다. 그 순간, 녹하가 매섭게 호통쳤다.
“만지지 마십시오!”
황보주아가 멈칫하며 물었다.
“왜요?”
녹하는 토끼를 바구니에 넣으며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왕야께서 아끼시는 것이니 함부로 만지시면 안 됩니다.”
말을 마친 그녀가 발걸음을 돌려 막사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분을 못 이긴 황보주아가 소리를 질렀다.
“멈춰!”
물론, 녹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다른 이도 아니고 황보주아의 말에 따르는 건 도무지 그녀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녹하가 걸음을 멈추지 않자 황보주아를 따르는 두 시녀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아가씨께서 멈추시랍니다. 안 들리십니까?”
녹하가 대바구니를 잠시 내려놓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들려. 그게 왜? 난 토끼 아씨들을 데려다줘야 해서 다른 건 신경 쓸 겨를이 없는데?”
싸움을 겁내지 않는 녹하는 이미 황보주아와 여러 차례 소란을 피웠다. 그럴 때마다 묵용감은 녹하를 꾸짖었지만 딱히 벌을 내리진 않았다. 묵용감의 마음을 알아차린 녹하는 황보주아를 더욱더 안중에 두지 않았다.
황보주아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오라버니의 시녀라 예를 갖춰 주었더니, 일개 시녀가 감히 내게 호통을 치느냐!”
“제가 시녀이긴 해도 아가씨의 시녀는 아니지요.”
녹하가 담담하게 입담을 뽐냈다.
“밖에선 다른 이들도 절 아가씨라 부른답니다.”
황보주아와 자신의 신분이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의미였다.
황보주아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다 못해 금방이라도 김이 피어날 듯했다. 그녀가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당장 저 애의 뺨을 쳐라. 오라버니 대신 저 버르장머리 없는 것을 제대로 가르쳐야겠다!”
두 시녀가 곧장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들도 녹하처럼 오만방자한 하인은 처음이었다. 안 그래도 매번 황보주아의 화를 돋우니, 본때를 보여 주고 싶었다.
녹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들과 싸움을 벌인다 해도 겁날 게 어디 있을까.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다. 더욱이 그녀는 어린 왕비와 양수리 마을에서 대규모 전투까지 겪은, 화려한 전력의 소유자가 아니던가.
그러나 직접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코웃음을 치고 목청을 높였다.
“가동!”
마침 가동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묵용감은 황보주아를 지키라는 이유로 가동을 군영에 남겨 두었다. 가동도 녹하의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사내가 여인들의 말다툼에 끼어들어 일을 키울까 싶어 지켜만 보았다. 그렇다고 크게 소란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때마침 녹하가 자신을 부르자 가동은 성큼성큼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녹하가 두 시녀를 가리키며 당당하게 말했다.
“저 애들이 날 때리려고 해.”
늘 헤벌쭉 웃으며 실없는 소리만 하던 가동이지만 결정적인 순간만큼은 허점을 보이지 않는다. 그가 얼굴을 굳히고 두 눈을 부릅뜨니 제법 위협적이었다.
황보주아가 급히 상황을 설명했다.
“녹하가 먼저 결례를 범했네. 이 애들은 날 지키려 한 것뿐이야.”
가동은 황보주아에게 여전히 예를 갖췄기에 두 손을 맞잡고 공손히 말했다.
“황보 아가씨, 녹하는 왕야의 사람입니다. 무언가 언짢으시거든 제게 말씀하시면 왕야께 고해 드리겠습니다. 하인을 시켜 손을 쓰시면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가동이 나서니 황보주아도 더는 밀어붙일 방도가 없었다. 그녀도 묵용감의 하인들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걸 잘 알았다. 말은 그럴싸하게 해도 마음속으로는 그녀를 욕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한때는 그녀도 대갓집의 천금 같은 규수였다. 이렇게 아랫사람들과 자주 대립하면 스스로의 격만 떨어진다. 두고 보라지, 이번 일은 절대 넘어가지 않으리라.
* * *
묵용감이 공성攻城을 결심한 이유는 성에 주둔한 병사들이 심심풀이로 백성들을 죽인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비록 성 밖에 있었지만 그는 성안의 소식에 밝았다. 성을 공격하지 않았던 이유도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던가. 그러나 진정 백성들을 위한다면 지금 성을 공격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꽤나 물러졌음을 깨달았다. 예전이었다면 대세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공격을 지체하지 않을 그였다. 그러나 이제는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한 백성들의 목숨을 떠올릴 때마다 그의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아마도 그녀 때문이리라.
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크고 까맣게 빛나는 두 눈에 티 없이 맑고 새하얀 피부를 가진 그녀가 어른거렸다.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그에게 잘했다며 칭찬을 하는 듯했다.
죽는 건 쉬워도 사는 건 고달픈 인생이었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그녀는 절대 삶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에는 언제나 주변까지 밝게 물들이는 빛이 있었으므로. 그렇다면 그의 빛은…….
그가 슬픔에 젖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고,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어둠 속에 놓여 있었다. 그의 빛은 그녀가 떠나던 순간, 그를 대신해 함께 가 버렸다.
묵용감이 군영으로 돌아오자 가동이 곧장 말고삐를 넘겨받았다.
“오셨습니까, 왕야.”
그는 짤막한 대답을 남기고 막사로 들어섰다. 그때 황보주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안으로 들어왔다. 눈가가 붉게 물들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걸 보니 억울한 일을 당한 듯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운 것 같구나.”
“오라버니, 이런 일로 오라버니를 성가시게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녹하가…….”
황보주아가 눈을 깜빡이자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주륵 흘러내렸다. 꾸며낸 눈물이 아니라 정말 억울함을 못 이겨 흘리는 눈물이었다.
“또 싸웠더냐?”
묵용감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소매를 걷어붙이고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닦았다.
“되도록 녹하를 건드리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황보주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찌 저렇게 말한단 말인가? 녹하는 시녀에 불과할 뿐인데 건드리지 말라니?
묵용감은 얼이 빠진 그녀를 보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로 싸웠느냐?”
“토끼를 잠시 밖에 두었길래 만져 보았더니 호통을 치지 않습니까. 오라버니, 한낱 시녀가 제게 호통을 치다니요. 규율이라는 걸 아는지나 모르겠습니다.”
듣고 있던 묵용감이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고작 그 일 때문이더냐? 원래 왕비의 토끼인 데다 녹하는 왕비와 각별했으니 네가 토끼를 만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왕비는 떠났지만 넌 이곳에 남아 있지 않느냐. 본래 녹하는 성질도 사나운 편이라 화를 내는 일도 잦다. 그리 마음 쓰지 말거라.”
황보주아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가 무겁게 입술을 떼었다.
“…오라버니도 속으로는 절 원망하셨군요. 저 때문에, 제가 있어서 왕비를 보냈다고요.”
“널 어찌 원망하겠느냐.”
묵용감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날 원망한다.”
“하면 왕비를 찾으실 생각이십니까?”
여기까지 왔으니 굳이 사실을 감출 필요가 없다. 그가 두 손을 펼쳐 보이며 털어놓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왕비다. 찾는 게 마땅하지 않느냐.”
“오라버니께서는 왕비를 정말 좋아하셨던 거군요.”
묵용감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곤 모래로 만든 지도 위에 작은 깃발을 꽂았다.
“좋아하는 게 아니다. 은애한다.”
그 말이 황보주아의 머리를 하얗게 물들이고, 심장을 꽉 움켜쥐었다.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분명 그녀를 위해 백천범을 저택 밖으로 내쫓지 않았던가.
그녀는 피가 날 때까지 입술을 깨물며 온갖 말들을 삼켜냈다. 단 한마디만이 그녀의 혀끝에 걸렸다. 그녀는 그제야 그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저도 은애하셨습니까?”
묵용감이 고개를 들었다. 반짝이는 두 눈은 어떤 흔들림도 없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좋아했었다.”
그녀의 모든 자존심이 이 자리에서 무너져내렸다. 황보주아는 눈앞이 아찔해 서 있기도 힘들었다, 그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맥없이 중얼거렸다.
“저는 좋아했었고 왕비는 은애하시는군요…….”
묵용감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주아야.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르는 게 아니다. 어떤 일들은 이미 훤히 꿰고 있으니 말하지 않을 뿐이지. 굳이 들추지 않는 게 좋겠는데. 네 생각은 어떠하느냐?”
황보주아의 얼굴이 또다시 핏기를 잃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옅은 미소를 보였다. 희망이 없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지만, 묵용감 앞에서라면 체면을 모두 잃어도 상관없었다. 이미 자존심은 짓밟힐 대로 짓밟혔다. 거절을 당하더라도 한 번 더 물어봐야 한다.
“알겠습니다, 오라버니. 이런 일로 오라버니를 성가시게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마지막으로 청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홀로 지내기 적적하니 토끼 한 마리만 데려가고 싶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묵용감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섯 마리가 늘 한데 모여 지냈는데 갑자기 무리에서 떨어지면 잘 지내지 못할까 우려되는구나. 성을 함락하고 나서, 원하는 걸 성에서 구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