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9화
그녀가 씩씩하게 말을 마치자 문밖에 모여 있던 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대부분 주변 가게의 상인들이라, 백천범과는 친분이 두터웠다. 누구에게나 예의 바르고 인정 많은 아이인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늠름한 구석이 있을 줄이야. 이장에게 미움을 산다고 해도 당당한 모습에 다들 범이를 다시 봤다며 난리였다.
전진곤이 찾아온 목적은 월규와 월향이었다. 사촌 양보전과는 길이 겹쳤을 뿐이다. 전진곤이 보기에, 월향과 월규는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여인들이다. 굳이 따져 보자면 월규가 그의 취향에 가까웠다. 예쁜 얼굴에 제법 앙칼진 면도 있지 않은가. 그에 비해 월향은 얌전하고 말을 아꼈다.
어쨌든 월향이 양보전에게 시집을 오면 그의 형수가 될 터. 자연히 월규와 마주칠 기회도 많을 테니 손에 넣는 것쯤은 간단하다 여겼다. 어느 여인이 바보의 곁에서 시간을 보내려 할까? 하소연이라도 하기 위해 자매를 불러들일 터였다.
그는 양보전 같은 바보가 아니기에 으름장만으로 쫓아낼 수는 없었다. 그가 능글맞게 히죽거렸다.
“전범, 오기가 제법이군. 호적부에 들지 않고 떠돌이로 살겠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 사촌이 아둔하니 누이를 보내기 싫어하는 것도 당연하지. 하면 난 어떠하냐?”
그가 양손을 펼쳐 보였다.
“십 리 안에서 나보다 반듯한 이가 어디 있을까? 가업도 있고 아버지는 마을 이장이지. 여기서 내 체면을 깎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때, 네 매형으로 충분하지 않나?”
백천범이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그쪽은 이미 혼인을 하지 않았소? 수성의 태수太守(군의 으뜸 벼슬) 집안 규수와 혼사를 치렀다고 들었는데.”
“하, 나 같은 사람이 첩을 들이지 않을까? 우리 가문의 사람이 되기만 하면 내가 귀하게 떠받들어 줄 테니 푸대접은 걱정하지 말게.”
“누이들을 첩으로 보낼 일은 없으니 포기하시오.”
백천범은 제안을 단번에 거절했다. 여느 때보다 단호한 그녀의 표정에 굳은 의지가 새겨져 있었다.
“하, 이 나리가 구구절절 말했건만 어찌 들을 척도 않느냐? 네 체면을 봐서 네 누이를 마음에 든다 했는데, 체면을 살려 줘도 뻔뻔하게 나오는구나. 한낱 외지인이 뭘 믿고 우쭐거리느냐? 이 나리가 마음만 먹으면 너희를 내쫓을 수도 있다.
초왕의 군대가 성 밖을 헤집고 다닌다는데 감히 떠돌아다닐 수 있을까? 병사들은 반년 가까이 여인을 가까이하지 못했으니 네 누이를 보면 눈이 벌게지고도 남겠지. 보아하니 너도…….”
그가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법 곱상하게 생겼으니 마음에 들어 하겠구나.”
결국 월규가 분노를 터트리며 눈을 부릅떴다.
“금수만도 못한 놈아! 네 꼴이나 제대로 보고 남을 욕하시지. 이장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위세를 부려? 내세울 게 그것뿐이야? 차라리 우리 동생과 정정당당하게 겨뤄 보든가!”
백천범은 들고 있던 대나무 장대를 내던졌다. 뻔뻔한 말을 들을 바에야 월규의 말대로 해 줄 생각이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주먹을 쥐고, 다른 손바닥을 곧게 펴며 자세를 잡았다.
“자, 덤벼.”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와중에 체면을 구겼으니, 전진곤은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는 스무 살 청년이지만 전범은 어린아이가 아닌가. 아이에게 도전장을 받다니, 이겨도 불명예스러운 승리고 지면 얼굴에 먹칠을 하고 만다.
그때, 하인 한 명이 다가와 말했다.
“도련님, 제가 대신 겨루겠습니다.”
백천범이 경멸을 담은 웃음을 보이며 턱 끝으로 하인을 가리켰다.
“감히 맞서지 못하겠다면, 하인을 시켜도 좋다.”
지켜보던 이들이 일제히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순식간에 얼굴이 벌게진 전진곤이 씩씩대며 하인을 밀쳤다.
“저리 꺼져. 네가 언제부터 내 일에 그리 나섰다고.”
그가 부채를 허리춤에 꽂은 뒤 싸울 자세를 잡고 백천범에게 손을 흔들었다.
“덤벼.”
백천범은 곧장 그에게 달려들었다. 오랜 시간 수련을 하면서도 대련할 상대가 마땅히 없었으니, 그녀도 자신의 실력이 궁금했다. 그녀는 가동이 가르쳐 줬던 초식을 펼쳐 그를 가차 없이 응징해 주었다.
줄곧 허술한 모습을 보였어도, 가동은 일급 호위 무사다. 그가 알려 준 초식은 많지 않았지만, 무술이라고는 배워 본 적도 없는 도령을 제압하기에는 충분했다. 오히려 백천범은 힘이 남아돌아 맥이 풀릴 뻔했다.
전진곤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배에 주먹을 꽂아 넣은 그녀는 뒤이어 그의 무릎 안쪽을 걷어찼다. 다리에 힘이 풀린 그가 넘어지자, 백천범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위에서 짓누르며 양쪽 따귀를 번갈아 휘갈겼다.
전진곤의 하인들이 백천범을 공격하려 들었지만, 구경하던 이들이 벌떼처럼 들어와 그들을 겹겹이 둘러쌌다.
“지금 뭐 하는 거요? 사람을 이 지경까지 괴롭혀 놓고, 아직도 성에 안 차는 거요?”
하인들은 한바탕 욕을 먹자 울먹거리며 전진곤을 일으켰다. 지금 누가 누굴 괴롭히는데, 다들 눈이 뒤통수에 달린 게 아닌가!
“당신네 도련님 데리고 썩 꺼지쇼. 두 번 다신 오지 말고. 이 집 아들이 아주 뛰어난 무예가요!”
“나이는 어려도 몸놀림이 보통이 아니니, 괴롭히려거든 주제 파악부터 하고 와야 할 거요.”
“썩 꺼지시오. 이 바보 도령도 데려가고!”
“아무도 댁들을 원치 않으니 멀리멀리 꺼지시오!”
하인들은 흠씬 얻어맞은 두 도련님을 부축해 재빨리 줄행랑을 쳤다. 그들이 떠난 후, 백천범은 두 손을 맞잡아 가슴 위로 올리며 감사를 전했다.
“여러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전범,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어린 나이가 무색할 만큼 말도 똑 부러지게 잘하니, 다들 그녀를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도 두 손을 맞잡고 가슴 위로 들어 올리며 그녀에게 답례했다. 이미 날이 저문 터라 사람들은 백천범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는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다.
백천범은 대문을 잠근 뒤 월향, 월규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백천범은 큰일을 겪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니 헤헤 웃고 있었지만, 월규와 월향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월향이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었다.
“속은 후련하지만, 이장 댁 형제를 건드렸으니 앞으로 어쩌지?”
월규가 한참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어쩌겠어. 지켜보다가 적당히 처신해야지. 그러다 정 안 되면.”
그녀가 백천범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왕야를 내세우는 건 어때?”
“왕야를 어떻게 내세워?”
백천범이 대번에 그녀를 흘겨보았다.
“왕야를 내세워서 전 씨랑 양 씨를 해치우면, 그다음은 우리 차례가 되자고?”
월규가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웅얼거렸다.
“그냥, 범이 네가 청을 드리면 왕야께서 가벼운 책벌만 내리실지도 모르잖아. 예전에도 범이 네 말이면 큰일도 해결됐었잖아.”
백천범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예전이니까 가능했지. 이제 난 도망친 왕비라고. 폐위되지도 않았고, 이혼도 안 했는데 내가 도망쳤으니 왕야의 체면이 어찌 되었겠어. 이 일만큼은 왕야께서도 쉽게 용서하시지 않을 거야. 왕야를 찾아가고 싶으면 너나 가. 난 절대 안 가. 왕야가 변덕이 얼마나 심한데, 자칫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목이 날아갈 거야.”
월규도 방법이 없으니 말을 꺼냈지만, 백천범의 단호한 대답에 곧바로 생각을 바꾸었다. 지금 상황과 초왕을 비교해 보면… 역시 초왕이 더 무서웠다.
“그래, 됐어. 그만 생각하자. 우리는 무려 초왕야의 저택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이라고. 그깟 이장 따위를 겁내서야 되겠어?”
마음을 다진 월규가 책상을 내리치며 용기를 북돋웠다.
“사람이 꼭 죽으란 법은 없어. 막다른 곳에 다다르더라도 새로운 길이 열릴 거야.”
백천범이 웃으며 거들었다.
“월규 누나는 과거라도 보려는 거야? 언제 이렇게 말을 잘하게 됐을까? 이거 봐, 입만 열면 청산유수인 초왕의 시녀가 시골 이장을 겁낼 게 뭐 있어.”
그러나 월향은 여전히 수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저 지경을 만들어 놨으니 우리가 불리하긴 해. 대책을 세우거나 준비를 해 둬야 할 거야. 내일 당장 우리를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
“무슨 준비?”
“당연히 은자지. 사람을 때렸으니 돈을 물어 줘야 하잖아.”
월규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돈이 어디 있어. 배 째라고 해.”
백천범이 헤벌쭉 웃으며 주먹을 들었다.
“내일 오면 내가 또 때려 주면 되지.”
월향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휴, 그래. 어련하시겠어요. 난 밥하러 간다.”
* * *
백천범은 며칠 동안 집을 지켰지만, 전 씨와 양 씨 모두 감감무소식이었다. 오히려 초왕과 수성을 지키는 군대가 교전을 시작했다는 소식만 들려 왔다.
그녀가 사는 마을엔 별다른 영향이 없었지만, 거리를 지날 때면 격앙된 전투 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차츰 불안에 떨게 된 마을 사람들은 또다시 두문불출하며 전투가 끝나기만을 바랐다.
월향이 연신 탄식을 내뱉었다.
“왕야께서 무탈하셔야 할 텐데.”
월규가 혀를 차더니 남 일처럼 답했다.
“뭘 그런 걱정을 해. 왕야께서는 군신이시라고. 왕야께서 전쟁을 두려워하시는 거 봤니?”
평소 같았으면 백천범이 끼어들었겠지만 그녀는 어쩐지 침묵을 지켰다. 한참 전부터 무릎을 감싸 안고 계단에 주저앉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
월규가 다가와 그녀를 툭툭 치며 물었다.
“왕야가 걱정되는 거야?”
“…내가 왕야 걱정을 해서 뭐 해?”
백천범이 무릎에 턱을 괴더니 무심하게 말했다.
“왕야는 대장군이야. 직접 전투에 나갈 일도 없을걸. 걱정되는 건 백성들이라고. 성문이 너무 오랫동안 닫혀 있잖아. 작년에 수확한 쌀 정도는 있겠지만 반찬이 뭐가 있겠어. 문이 닫혀 있으니 채소들이 하나도 못 들어가잖아.”
“아이고, 보살이 따로 없네. 제 코가 석 자인데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뿐이라니.”
백천범이 입술을 쭉 빼며 답했다.
“왜 내 코가 석 자야. 그래도 우린 먹을 게 남아 있잖아.”
“전 씨 주인장이 쌀이며 기름을 외상으로 주니까 그렇지. 같은 전 씨라고 이렇게 주니, 사람이 너무 착해. 지금 쌀독 바닥이 보이는데 미안해서 더는 외상도 못 하겠어.”
백천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성을 전 씨로 바꾸자고 했을 땐 그렇게 걱정하더니. 어때, 좋은 점이 더 많지?”
할 말을 잃은 월규가 괜히 웅얼거렸다.
“좋긴, 점점 돈독만 오르는 거 같은데.”
“나쁜 것도 아닌데, 뭐. 우리가 사기를 치기라도 했어? 능력껏 먹고살려는 거잖아. 어차피 돈이 없으면 살 수도 없는걸. 어쨌든 나는 전 씨가 좋아. 전범, 돈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잖아.”
월규가 눈을 굴리더니 코웃음을 쳤다.
“참, 작명 수준하고는. 토끼들한테 지어 줬던 하랑이, 회랑이며, 노랑이에 깜장이까지… 하나같이 대충 지어 준 이름이잖아.”
토끼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그녀는 새끼 토끼들이 그리워졌다. 여섯 마리 중 두 마리는 기홍과 녹하에게 주었고, 한 마리는 앞뜰의 마구간 영감에게 주었다. 남은 세 마리는 저택에 그대로 있을 터였다.
다들 잘 자라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설구와 구구는 지금쯤 또 새끼를 낳았을까? 아련하게 피어오른 그리움이 짙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