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298)화 (297/1,192)

제298화

기홍이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난 또 뭐라고, 낭군님 걱정이었네. 네 낭군님은 심성이 워낙 착해서 남들 비위를 다 맞춰 주는 거 몰라? 나도 어제 부려 먹었는데, 나도 밉겠네?”

녹하가 입을 삐죽이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당연하지. 앞으로는 조금만 부려 먹고 네 영구 무사님한테 부탁해.”

“웃겨, 정말.”

기홍이 그녀를 흘겨보았다.

“얼른 하자. 이러다 오늘 못 끝내겠어.”

녹하가 꽃 한 송이를 들고 천천히 향기를 맡았다.

“향 정말 좋다. 왕비 마마께서 계셨다면 무척 좋아하셨을 텐데. 네가 만든 화전을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기홍의 손이 멈추고 금세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루라도 빨리 왕비 마마를 찾았으면 좋겠어. 왕야께서 너무 힘들어하시잖아.”

녹하가 코웃음을 치며 꽃을 다듬어나갔다.

“다 왕야가 자초했지. 그러게 왜 왕비 마마를 시골 별장으로 보냈냐고. 황보주아는 마마께서 도망쳤으니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겠지만, 제 발로 침소를 찾아갔어도 퇴짜를 맞았잖아? 나였다면 혀를 깨물든가, 벽에 머리를 박고도 남았어. 정말 대단해. 저렇게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굴다니, 낯짝도 두껍지.”

“왕야께서는 아직도 왕비 마마 생각뿐이셔. 마마께서 안 계시니까 도통 웃을 줄 모르시잖아.”

“누가 아니래. 밤에 장군들이랑 회의를 하다가 갑자기 넋을 놓으신대. 한 곳만 보시면서 멍하니 앉아 있는데 다들 흠칫 놀란다더라.”

녹하가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가동 말로는 왕비 마마께서 영남 지역으로 도망치셨대. 왕야께서 어떻게든 왕비 마마를 찾아오라면서 부하들을 보냈다고 들었어.”

기홍이 갑작스레 떠오른 듯 고개를 갸웃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폐하께 잡혀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 일 때문에 왕야께서 군대를 모으신 거였잖아.”

“글쎄. 가동 말로는 군대를 모은 건 예전부터 계획하시던 일이었대. 계속 결정을 미루시다가 왕비 마마의 일로 결심이 선 거지. 폐하께서도 그리 똑똑하진 않은 거 같아. 우리 왕야께 그런 위협이 통할 줄 아나.”

“그럼 마마께선 어찌 되신……?”

“걱정하지 마. 가동이 그러는데 왕비 마마는 폐하께 붙잡힌 게 아니래. 우리 마마 같은 분은 어디서든 잘 지내고도 남지. 그 얘기 못 들었어? 별장을 떠날 때 왕야의 편병을 들고 가셨다잖아. 은자 만 냥에 달하는 거라던데, 지금쯤 어디 안전한 곳에 숨어서 아주 잘 지내실걸.”

기홍이 그녀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가동 무사님이 이런 걸 다 말해 줬어?”

녹하는 자신이 너무 많은 걸 털어놓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수습했다.

“자발적으로 말한 건 아니고, 내가 좀 심하게 괴롭혀서 알아냈지. 영구 무사님한테는 말하지 마.”

기홍이 녹하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아무리 네가 괴롭혔어도 다 털어놓다니! 만약 네가 아니라 적군이었다면 곧바로 배신자가 되는 거야.”

녹하가 입을 가리며 태연히 웃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워낙 잘 구슬리니까 지는 척하면서 털어놓은 거지, 적군이 몰아세우면 더 강하게 반발할걸?”

기홍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어떻게 구슬렸는데? 나도 좀 알자.”

녹하는 그제야 기홍의 의도를 파악하고 부끄러움에 그녀를 찰싹 때렸다. 기홍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 지금 나 때린 거야? 영구 무사님한테 이르러 가야겠다.”

* * *

백천범은 집에서 온종일 기다렸지만, 그 망나니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기에 그녀는 날이 어두워지기 전, 작은 나무통을 들고 나갔다. 개울가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와 튀겨 먹을 생각이었다.

정원을 나서려는데 누군가 대문 앞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녀는 얼른 벽에 바짝 붙어서 슬금슬금 다가갔고 순식간에 문을 열어젖혔다. 손에 들고 있던 나무통으로 그자의 머리를 힘껏 내려친 그녀가 매섭게 소리쳤다.

“어디서 굴러온 호색한이냐?”

문 뒤에 있던 사람은 머리를 잡고 뒷걸음질 치더니 가까스로 벽을 잡아 몸을 지탱했다.

얼른 살펴보니 하얀 피부에 땅딸막한 청년이었다. 청년이 씩씩거리며 백천범을 노려보았다.

“누군데 감히 날 때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백천범은 지지 않고 호통을 쳤다.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우리 집 대문 앞에 수상한 사람이 있는데 관아로 끌고 가지 않은 걸 고맙게 생각해야지! 몰래 숨어서 뭐 했어? 당장 말해!”

백천범의 외침에 월향과 월규가 뛰어나왔다. 월규가 그 청년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저 사람이야. 저 사람이 그 망나니라고!”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며 손에 쥘 만한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백천범은 곧바로 청년의 옷깃을 잡아 마당으로 끌고 들어왔다.

“문 잠그고, 얼른 때려!”

백천범에게 다가온 월향은 빨개진 얼굴로 망설였다. 그녀는 문을 닫았지만 차마 빗장을 걸어 잠그진 못했다.

그사이 월규가 대나무 장대를 집어 들고 뛰어왔다.

“이 망나니 같은 놈, 또 찾아와? 지난번에 맞은 게 부족했구나! 이번엔 다리를 부러뜨려 주마!”

백천범이 청년을 꽉 붙든 채 말했다.

“잠깐, 누나들은 방에 들어가 있어. 내가 처리할게!”

청년은 백천범보다 키가 컸지만 그녀에게 붙잡힌 채 허수아비처럼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었다.

“감히 날 때리다니, 내가 누군지나 알아? 내가 누군지 아냐고?”

뻔뻔하게 떠드는 청년이 짜증 났던 백천범은 그의 머리를 힘껏 내리치며 노려보았다.

“입 닫아.”

그자는 입을 다물기는커녕 씨근거리며 월향에게 소리쳤다.

“날 때리게 보고만 있을 거야? 난 네 낭군이잖아!”

오도카니 서 있던 월향은 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뭐, 뭐?! 헛소리 집어치워. 난 네가 누군지도 몰라!”

감히 월향을 모욕하다니! 월규와 백천범은 매가 약이라는 말처럼 그자를 흠씬 두들겨 팼다.

한바탕 주먹을 날린 백천범이 손을 거두고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시퍼렇게 붓도록 얻어맞은 그는 머리를 감싸 쥔 채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참으로 못난 꼴이 아닌가. 그녀는 월규를 떨어뜨려 놓은 후 따져 묻기 시작했다.

“너 누구야? 이름은 뭐고, 어디 사는 놈이야?”

더는 주먹이 날아오지 않는 걸 알아차린 듯, 청년이 실눈을 뜨더니 슬쩍 머리를 감싼 손을 내렸다.

“내 이름은 양보전梁寶田이다! 집은 마을 서쪽이고 우리 외숙부가 이장이다. 날 때렸으니 외숙부한테 너흴 잡아가라고 이를 거야.”

백천범과 월규가 눈짓을 주고받았다. 말하는 투며 행동거지를 보니 이자는 동네 바보가 아닌가.

약자를 괴롭히지 않는 백천범은 그를 일으켜 세운 뒤 다소 온화하게 물었다.

“매일 대문 앞에 숨어서 뭘 봤던 거야?”

양보전이 눈치를 보다가 월향을 가리켰다.

“저 여인을 봤지, 예쁘니까. 내 색시로 삼을 거다.”

월향이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흘렸다.

“꿈도 크시지!”

“우리 엄마가 혼담을 넣었댔어. 이 집 아들이랑 얘기했다던데. 혼사가 결정되면 가족이나 마찬가지지.”

백천범이 깜짝 놀라 자신을 가리켰다.

“무슨 소리야? 내가 이 집 아들인데.”

양보전이 한껏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그러면서 이 매형을 때렸다고?”

백천범은 미간을 힘껏 찌푸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잘 들어. 누나의 혼사는 아무하고도 얘기한 적 없고 너한테 시집갈 일도 없으니까 매형이고 뭐고 그런 소리 하지 마! 또 오기만 해 봐, 네가 바보든 뭐든 보이는 족족 두들겨 팰 테니까.”

“하! 보이는 족족 두들겨 팬다? 무서워 죽겠네.”

그때 누군가 문을 발로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섰다. 호리호리한 몸에 하늘색 비단 도포를 걸치고, 가느다란 눈매를 가진 사내였다.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경박한 표정을 짓더니 월규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양보전이 그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사촌, 저 애들이 날 때렸어.”

뒤따라온 하인 몇 명이 우르르 마당으로 들어왔다. 그중 한 명이 양보전을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고, 누가 우리 도련님을 이 꼴로 만들었습니까?”

백천범이 앞으로 한 발짝 걸어 나와 월규와 월향을 지키듯 서서 말했다.

“너흰 또 누구야?”

“우리 외숙부 아들이야. 이름은 전진곤田進坤이고.”

그때 월규가 백천범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겨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장님 댁 도련님이야. 부잣집 도령이라 상대하기 까다로울지도 몰라.”

“깜찍하긴, 뒤에 숨어서 내 얘길 하는 건가?”

전진곤이 고개를 틀고 히죽거리며 월규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소름이 돋는 눈빛이었다.

평소에는 물불 안 가리는 월규였지만, 지금의 신분으로 그는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다. 월규는 화를 꾹 누르고 몸을 돌려 기분 나쁜 눈빛을 피했다.

백천범이 다부지게 말했다.

“누나들은 들어가. 내가 알아서 할게.”

“어떻게 그래?”

월규와 월향이 동시에 외치며 백천범의 소매를 붙들었다.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싸움이라도 나면, 범이 너 혼자 어쩌려고?”

소란이 커지며 대문 밖에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점점 북적거리며 갖은 목소리가 뒤섞이는 중에, 젊은 부인이 그 틈을 뚫고 들어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식구도 몰라보면 어떡해? 범아, 내가 말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야.”

안으로 들어온 유가네 부인이 양보전을 잡아끌며 말했다.

“이 사람이 참기름 집 아들이라니까.”

그녀는 백천범에게 살갑게 웃으며 분위기를 녹이려 애썼다. 그러나 백천범은 그녀의 체면을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이모, 농담하지 마세요. 저희는 그저 가난한 평민에 불과해요. 저리 높은 집안과 어찌 혼사를 논하나요.”

유가네 부인은 넉살 좋게 웃으며 수습에 나섰다.

“보전이가 네 누나 향이를 좋아한대. 보전이네 부모님이 보전이를 얼마나 아끼는데. 그러니 혼사를 치르면 향이도 귀염받는 며느리가 되지 않겠어? 보전이네 부모님도 혼사만 치르면 가게를 며느리한테 넘겨주겠다고 하셨어.”

백천범의 얼굴은 점점 벌겋게 달아올랐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으니 온갖 생각은 다 사라지고 하나의 결론만이 남았다. 그녀가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체 뭘 받았길래 저런 바보랑 엮어 주려고 했어요?”

유가네 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지만 곧 낯빛을 바꾸고 사근사근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범아, 너희를 생각해서 그랬어. 남매 셋이 연고도 없는 곳에 와서 사는데 양 씨네랑 사돈지간이 되면 얼마나 든든하니? 너희가 여기 온 지도 반년이 다 되어 가는데, 호적부에 들지도 못했잖아. 이장님의 미움을 사면 하는 일마다 쉬운 게 없을 거야.”

“그 호의는 마음만 받을게요.”

백천범은 월규가 든 대나무 장대를 낚아챘다. 그녀가 장대를 가슴 앞에 가로로 뉘어 들었다. 마른 체구였지만 반년 동안 월규와 월향의 키를 넘어선 그녀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눈을 부릅뜨니, 제법 늠름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우리 남매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일 없이 스스로 살길을 찾겠습니다. 누나들의 혼인은 누나들과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할 거예요. 우리가 부귀를 좇을 일은 더더욱 없으니, 양가든 전가든 필요 없어요.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하는데, 누구든 우리를 괴롭히면 저 전범錢凡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