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297)화 (296/1,192)

제297화

그는 둘째였지만 선황의 적자였다. 다섯 살에 태자로 책봉된 그는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걸 깨달았다. 남몰래 형제들을 관찰하던 그가 눈여겨보았던 대상이 셋째인 묵용감이었다.

묵용감은 언변에 능하진 않았지만 다른 이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고 권력에는 늘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묵용감은 도성에서 세력을 키우는 대신 군대를 이끌고 남북을 누비며 경험을 쌓는 삶을 택했다.

훗날 거짓으로 꾸민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초왕이 군대를 이끌고 도성으로 돌아왔다. 묵용연은 초왕이 혼란을 잠재우고 천자의 자리에 오를 줄만 알았다. 놀랍게도 묵용감은 대황자를 황위에 앉혔고 진심을 다해 그를 보좌했다.

묵용연은 쌍방이 죽는 싸움 대신 몸을 숨기는 방법을 골랐다. 아직 자신에게 기회가 남아 있다. 묵용감, 그가 자신의 기회가 되어 주리라.

내내 몸을 숨기고 기다려온 그는 마침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임안성만 함락하면 즉위는 식은 죽 먹기였다. 그는 황위에 오르게 되면 초왕에게 중임을 맡기고 함부로 시기하지 않겠다 마음먹었다.

초왕이 있는 한 그의 천하는 영원히 굳건할 터였다. 그는 누구보다 묵용감이 주는 이점을 잘 알았다. 가소로운 묵용한. 그자는 스스로 인내심이 뛰어나다 자부했지만 결국 초왕을 홀대한 시점에서 그에게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 * *

기홍과 녹하는 막사 안에서 막 따온 치자꽃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침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온 영구가 진한 꽃향기에 그만 재채기를 터트렸다.

영구와 기홍을 번갈아 바라보던 녹하가 입을 가리고 웃더니 슬쩍 일어났다.

“왕야께 차를 내어 드려야겠다.”

기홍은 민망한 듯 녹하를 몇 차례 불렀지만 녹하는 들은 척도 않고 사뿐히 나갔다. 영구와 남게 된 기홍은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이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늘 무표정한 영구는 기홍을 볼 때도 변함없었다. 심지어 조금은 성가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산에서 꽃을 따다 발목을 접질렸다고 들었습니다.”

“…별일 아닙니다.”

기홍이 입속으로 웅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아프지도 않은걸요.”

“잠시 보여 주십시오.”

“정말 괜찮습니다. 저는… 아이참, 어찌……!”

바닥에 쪼그려 앉은 영구는 반항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곧장 신발까지 벗겨지고 새하얀 양말이 드러나자 기홍이 아연실색했다.

“그만하세요. 누가 보겠습니다.”

영구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양말을 벗겨내고 발목을 유심히 살폈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기홍에게 양말을 신겨 주고 고개를 들었다. 기홍의 얼굴은 누르면 터져 버릴 듯이 붉게 익어 있었다. 그가 드물게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이가 보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우린 혼사를 치르게 될 테니까요.”

기홍은 부끄럽고 분했지만 녹하가 가동을 대하는 것처럼 영구를 대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몸을 돌려세우고 뾰로통하게 말하는 걸로 대신했다.

“…누가 그리한답니까?”

영구가 그녀의 몸을 다시 돌려세우더니 더없이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싫습니까?”

세상에 이런 강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기홍은 입술만 잘근거렸다. 이해할 수가 없다. 제대로 대화한 적도 없는데 이리 쉽게 혼담을 꺼낸단 말인가?

영구도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듯 침묵을 지켰다. 그는 자존심이 센 편이라 어떤 말들은 쉽사리 꺼내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민망한 분위기만 이어졌다.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던 녹하는 막사 안에서 아무런 기척도 나지 않자 까치발을 들고 조금씩 다가갔다. 벌어진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려는 순간, 갑작스레 나타난 가동이 그녀의 옷깃을 붙잡고 멀찍이 끌어냈다.

“뭐 하는 거야?!”

녹하가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성을 냈다.

가동은 여느 때처럼 헤벌쭉 웃어 보였다.

“내가 묻고 싶은데? 난 그저 널 구한 거야. 영구의 검이 또 네 목을 겨누지 않도록.”

지난번 일을 떠올리면 녹하는 여전히 간담이 서늘해지곤 했다. 그녀는 밖으로 몇 걸음 더 떨어진 후에야 맞받아쳤다.

“뻔뻔하긴, 영구가 내 목에 칼을 들이밀어도 넌 찍소리도 못했잖아.”

“아무 말도 못 하긴.”

가동이 검을 뽑아 들고 허공에 휘둘렀다.

“나도 검을 뽑았다고. 못 봤어?”

“검을 뽑으면 뭐 해, 이기지도 못하는데.”

가동은 순순히 인정한다는 듯 검을 다시 검집에 꽂았다.

“그건 그래.”

기홍은 인내심이 강한 편이었지만 영구가 한 수 위였다. 기세등등한 그의 눈빛을 더는 외면할 수도 없어, 기홍은 패배를 인정하듯 입을 열었다.

“…그만 가 보세요. 왕야께서 찾으실 겁니다.”

영구는 미동도 하지 않고 같은 질문을 던져 왔다.

“싫습니까?”

기홍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사내가 어디 있담! 더는 버틸 수 없었던 그녀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싫습니까?”

“아뇨.”

그녀가 서둘러 해명했다. 고개를 끄덕였던 건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된 영구는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더니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안도의 숨을 내쉰 기홍은 맥이 풀린 나머지 한동안 넋을 놓고 있었다. 멍하니 막사 천장을 올려다보던 그녀가 별안간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기홍은 출발하기 전날 밤을 떠올렸다. 그날 밤, 그녀와 녹하를 찾아온 학평관이 묵용감의 말을 전했다. 함께 떠나거나, 집으로 돌아가는 일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녹하는 조금 머뭇거리다 함께 떠나겠다고 했다. 부모님이 계신 집이 성안에 있지만 가동과 평생을 약속한 사이인 만큼 가동과 함께할 생각이었다.

다만 기홍은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녀의 집은 도성 밖인 데다 나이도 찼으니 새해가 지나면 저택을 떠나야 한다. 백천범도 없는 와중에 남아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녀가 한참을 망설이고 있는데 영구가 불쑥 방 안으로 들어왔다. 호위 무사가 여인들의 방에 난데없이 들어왔으니 다들 깜짝 놀랐지만, 영구는 아랑곳하지 않고 냉담하게 말했다.

“다들 잠시 나가 주십시오.”

녹하와 학평관은 자연스레 방을 나섰고 기홍은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영구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걸 모를 기홍이 아니다. 방을 들어온 순간부터 영구는 그녀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찌나 빤히 바라보는지 심장이 요동칠 정도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의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또렷이 울려 퍼졌다.

“저와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난데없는 제안에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와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예리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다시 물었다.

그녀는 입만 살짝 벌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평생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없으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던 그가 실망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리하겠다 하면 앞으로는 제가 그대를 지키겠습니다. 그리하지 않겠다고 하면 이 일은 없던 걸로 해 주십시오.”

말을 마친 그가 발걸음을 돌렸다. 순간 그녀는 무언가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그를 불러 세웠다.

그녀를 돌아보는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아주 희미하게나마 눈빛에 희망이 서려 있었다. 영구의 무표정한 얼굴을 수도 없이 봐 온 그녀는 그의 얼굴에서 어떠한 감정을 발견할 때면 긴장과 함께 심장이 요동쳤다. 평소와 다른 그의 반응이, 그도 드러내 보이는 감정이 왠지 그녀 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붉게 물든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다 조용한 성격이었으니, 말로 하지 않아도 의미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기뻐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담담했다. 다만 그 역시 비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뒤이어 들어온 녹하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든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영구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따라가겠다고 덜컥 약속하고 말았다.

솔직히 지금까지도 그녀는 자신과 영구가 어떤 사이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출발 후부터 지금까지 영구는 그녀에게 많은 관심을 쏟았다. 조금 전처럼 그녀가 다리를 다친 걸 알면 곧장 달려와 확인하는 식이었다.

녹하에게 늘 다정한 말을 건네는 가동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따금 녹하의 성미를 건드려 히죽거리며 사과를 하거나 얻어맞아도 기뻐하기만 하는 가동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영구는 그녀를 찾아오는 일도 적었고 밖에서 마주치더라도 멀찍이 서서 바라보는 게 다였다. 그뿐이지만 가슴이 달음박질을 치는 통에 그녀는 황급히 막사로 돌아오곤 했다. 그뿐이지만, 그뿐이라도…….

영구의 생각에 푹 빠져 있는데 어느새 안으로 들어온 녹하가 피식 웃으며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입맞춤이라도 한 거야?”

기홍은 펄쩍 뛰며 탁자 위에 있던 꽃 한 송이를 집어 던졌다.

“죽을래? 네 입을 꿰매 버리는 수가 있어.”

녹하가 탁자를 돌아 도망치며 깔깔 웃었다.

“부끄러워서 화내는 것 좀 봐. 내 말이 맞지?”

날쌘 녹하를 잡을 수 없으니, 기홍은 꽃을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낙담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아니거든. 어디 가동 무사님 같은 줄 아니.”

“그럼 이리 오랫동안 뭘 했는데?”

“아무것도 안 했어.”

“무슨 얘기라도 했을 거 아니야?”

“아무 말도 안 했어.”

녹하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말했다.

“알았다. 그냥 널 보러 온 거였구나. 역시 왕야한테 직접 배운 사람은 방식이 다르네.”

기홍이 그녀에게 눈을 치뜨며 노려보았다.

“너도 말해 봐. 지금까지 왕야께 차를 내어 드린 거야? 가동 무사님이랑 어디 숨어 있다가 온 거지?”

“말도 마.”

녹하가 자리에 앉아 물을 따르며 언짢음을 숨기지 않았다.

“왕야께서는 별말씀 안 하시는데 우리 그분은 어찌나 말이 많은지. 왕야의 체면만 아니면 내가 가만 안 있었을 거야.”

기홍은 그녀가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어린 왕비 때문에 녹하와 황보주아가 맞서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한 명은 주인, 한 명은 하인이니, 계속 소란을 피우면 손해를 입을 쪽은 녹하였다.

“괜히 왕야만 난처해지시니까 네가 피해 다녀.”

“내가 자꾸 피해 다니니까 더 그러는 거야.”

녹하가 더욱더 성을 내며 말했다.

“내가 자기를 무서워하는 줄 안다고. 제대로 싸우면 내가 욕을 한바탕 퍼부어 줄 수도 있는데. 너도 알지? 죄신의 딸 주제에 무슨 왕비라도 된 줄 알아. 어이가 없어서, 정말!

제일 화나는 건 두 계집종이야. 그게 뭐 하는 짓이니? 물 좀 길어 달라면서 가동을 막 부려 먹는다니까. 그 물러 터진 놈은 누가 부르기만 하면 쫄래쫄래 가서는… 참나, 이번엔 내가 쉽게 넘어가나 봐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