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6화
며칠 뒤, 관병들이 피난길을 막아서고 돈이나 부녀자를 약탈했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원망과 분노가 사방에서 들끓었지만, 창과 검을 쥔 병사들 앞에서 백성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이를 악물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피난길에 올랐던 이들은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떠나지 않았던 백성들도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문불출하며 지냈다. 자연히 민심은 흉흉해지고, 긴장된 분위기가 온 마을을 휘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근처에 있던 수성蘇城의 성문이 굳게 닫히고 누구의 출입도 불허한다는 명이 내려왔다. 관병들은 모두 성안에 있었기에 주민들의 피난을 막지 못했지만, 정작 주민들은 떠날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초왕의 군대가 성 밖을 지키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초왕은 황제보다 무섭기로 소문이 자자한 만큼, 누구도 위험을 무릅쓰려 하지 않았다.
초왕이 근처에 있다는 소문을 접한 월규와 월향은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랐다.
백천범도 겁이 나긴 했지만 두 사람보다는 훨씬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피할 곳도 없었고, 언젠가 일어날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게다가 전쟁을 벌였는데 초왕이 백천범이란 존재를 신경이나 쓰겠는가? 자신을 잊고도 남았으리란 생각이 스쳤다. 무엇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그와 가까운 곳에 있는 게 안전할지도 모른다.
본래 낙천적이었던 그녀는 점점 더 확신을 가지고 월규와 월향을 달래 주었다. 두 사람은 근심에 잠겨 좀처럼 기운을 내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초왕이다. 이름만 떠올려도 몸이 덜덜 떨릴 만큼 무서운 존재가 지척에 있다고 하니, 겁이 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며칠이 더 지나고, 주민들은 초왕의 군대가 성 밑까지 쳐들어오긴 했지만 마을에서 소란을 피우진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평소와 같은 날들이 이어지자 사람들은 점점 집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각자의 일을 하며 예전의 삶을 되찾았다.
깊게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한 일이다. 거의 십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수성에서 두 군대가 대치하고 있건만, 성 밖은 안정된 생활이 이어진다. 오히려 성안에서는 식량을 걷고 장정들을 징발하기 시작해 혼란스러웠다.
백성들은 예전부터 초왕을 두려워했다. 군신이라는 명성이 자자할뿐더러 흉악하고 잔인한 인상이 너무도 강한 탓이다. 그러나 초왕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도 백성들의 삶에 폐를 끼치지 않으니, 평가가 점차 좋아지기 시작했다.
군대를 잘 지휘한다거나 규율을 엄격하게 지킨다거나,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다는 등 그에 관한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다만 매우 못생겼다는 소문만큼은 여전했다.
여느 날처럼 광주리를 짊어지고 골목을 누비던 백천범의 귓가에, 젊은 부인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얼마 전에 우리 오라버니가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초왕을 봤다지 뭐야. 멀리 있었는데도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대. 어쩌겠어? 산을 거의 굴러서 내려왔다더라.”
“정말? 초왕이 그렇게나 무섭게 생겼어?”
“소문이랑 똑같더래. 솥뚜껑같이 까만 얼굴에 눈은 방울처럼 크고, 네모난 입에 들창코였대. 게다가 송곳니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지 뭐야! 그래도 키가 커서 금색 갑옷을 입은 모습이 늠름했다더라고.”
백천범이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화花 이모, 지금 종규鍾馗(중국에서 역귀나 마귀를 쫓는다는 신) 얘기하는 거예요?”
수다를 떨던 젊은 부인이 백천범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범이 왔구나. 며칠 동안 네 간식을 못 사서 아쉬웠는데, 오늘은 뭘 가져왔니?”
백천범이 빈 광주리를 흔들어 보였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가져왔어요. 다 못 팔까 봐 누나가 조금밖에 안 만들어 줬거든요. 내일은 옥수수 전병을 만들 건데 드시겠어요?”
“물론이지, 내일 나한테 꼭 들러 주렴.”
화 부인이 살갑게 웃었다.
“간식도 다 팔았으니 범이 너도 좀 놀다 가. 우리 소계小啓가 널 어찌나 좋아하는지, 목소리만 들려도 네가 왔다면서 야단법석이라니까.”
백천범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소계는 집에 없나 봐요?”
“말도 마. 어제 나랑 친정에 갔다가 제 삼촌이 초왕 얘기를 하니까 보고 싶다고 어찌나 떼를 쓰던지. 꼬맹이가 숨어도 모자랄 판에 데려가 달라는 게 말이 되니! 그러다 악몽이라도 꾸면 어쩌려고… 정말 겁도 없지.”
묵용감의 외모가 추악하다는 소문을 들으니, 백천범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편을 들고 있었다.
“화 이모, 삼촌이 정말 제대로 본 거 맞대요? 그자는 초왕이 아니었을걸요. 초왕은 사실 아주 잘생긴 사내예요.”
줄곧 듣고만 있던 유劉가네 부인이 그녀를 놀렸다.
“아무렴 우리 범이보다 잘생겼을까 봐?”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 범이는 엄청난 미남이 될 거야. 어느 집 아가씨가 시집갈지 몰라도 참 복 받았지.”
백천범이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전 아직 어린걸요. 누나들이 시집간 다음에 생각해 봐야죠.”
“듣고 보니 그건 그렇네.”
유가네 부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나들도 어리진 않던데 정혼자는 없어?”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둘 다 나이는 찼는데 정혼자가 없어요.”
“잘됐네! 내가 잘 아는 사람이 네 누나를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 동그란 얼굴에 웃을 때 보조개가 생기는 그 아가씨 말이야.”
백천범이 깜짝 놀라 외쳤다.
“향이 누나요?”
“그래, 그래, 그 아가씨.”
유가네 부인이 열성적으로 말했다.
“가서 누나 생각은 어떤지 물어보고, 누나도 원한다면 혼사를 정하자꾸나. 안 그래도 전쟁 때문에 나라가 뒤숭숭하지 않니. 누나들도 불안할 테니 얼른 혼사를 치르면 든든하고 좋지 않겠어?”
백천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떤 사람인데요?”
“걱정 안 해도 돼. 저기 참기름 집 알지? 그 집에 아들이 하나 있거든. 그 집이 부자는 아니어도 먹고 사는 데는 문제없어. 게다가 외아들이라 얼마나 귀하게 길렀는데. 만약 시집가면 가게 사모가 되는 거니까 누나한테도 잘된 일이지.”
듣고 보니 백천범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민 집안에 시집을 가면 그녀처럼 번잡한 일을 겪지도 않을 테고, 작아도 물려받을 가업이 있으니 걱정 없는 삶을 누릴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온 백천범은 월향에게 의사를 물었다. 순식간에 월향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시집가지 않을 거라며 소리쳤다.
월규가 짓궂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
“그럼 평생 노처녀로 살 생각이었어?”
“너도 나랑 동갑이잖아. 넌 왜 안 가는데?”
“상대가 없는데 어떻게 가?”
“내가 양보할 테니까 먼저 가.”
“이런 일이 양보가 되니? 그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널 마음에 들어 하잖아.”
월규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얼른 혼사부터 정하자. 혼사만 정해지면 그 빈대 같은 놈을 죽도록 패 줄 테니까!”
처음 듣는 소리에 백천범은 영문을 모르고 눈을 깜박이다 물었다.
“웬 빈대 같은 놈? 무슨 일 있어?”
월규가 기다렸다는 듯이 콧김을 뿜어내며 그간의 일을 술술 풀어놓았다.
“넌 온종일 밖에 있으니까 못 봤을 거야. 웬 빈대 같은 놈이 매일 집 앞을 알짱거리는데, 월향이만 보면 혼이 쏙 빠진 것처럼 꼼짝도 안 해. 내가 빗자루로 몇 번이나 쫓아냈는데 염치도 없는지 매일 와. 월향이는 부끄럽다고 나한테 말도 못 꺼내게 한다니까.”
“하! 이런 대담한 놈을 봤나!”
백천범이 탁자를 내리치며 눈을 부릅떴다.
“감히 우리 식구들을 못살게 굴다니. 내일은 장사를 쉬더라도 그 못된 놈을 만나야겠어!”
* * *
성 밖의 군영, 묵용감은 탁자 앞에 앉아 묵묵히 군사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옆에 있던 태자 묵용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수성은 쳐도 그만, 안 쳐도 그만인 듯하구나. 길을 돌아서 곧장 금릉金陵을 치는 건 어떻겠느냐?”
묵용감이 고개를 젓더니 지도에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돌아갈 수도 있지만, 이곳 수성은 적방에게 가장 유리한 보루입니다. 엄수의嚴守義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닙니다. 수성을 차지했으니 운성雲城까지 손을 뻗겠지요. 만약 금릉을 친다면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럼 강공을 퍼부어야지. 숨 쉴 틈도 주지 않아야 한다.”
“수성은 풍경도 뛰어나고 유적도 많은 백 년 노성입니다. 그런 곳을 무너뜨리면 아깝지 않겠습니까.”
묵용감은 문득 백천범에게 강남 구경을 시켜 주겠다던 약속을 떠올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수성을 망가뜨렸다간 언젠가 그녀를 데려왔을 때 한이 될 테지.
태자가 잠시 묵용감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셋째 네 말은, 저들을 가두자는 것이냐?”
“우리가 들어갈 수 없듯 저들도 나올 수 없습니다. 엄수의가 성안에서 식량을 징수한다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백성들의 원망이 들끓더군요. 엄수의가 전술에 뛰어난 사람이라지만 민심을 잃으면 오래 버티진 못할 겁니다. 식량과 물자가 모두 떨어지면 저절로 성문이 열리겠지요.”
비로소 태자의 얼굴에 안도감이 묻어났다.
“역시 군신이로구나.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쓰는 격이니 내 어찌 초왕 앞에서 전술을 논하겠느냐? 병권이 없어도 여전히 네 지시에 천군만마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묵용한은 상상도 못 하겠지.”
묵용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폐하가 암암리에 이리 큰 세력을 키우셨음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태자가 그를 빤히 응시했다.
“알고 있었지만 내버려 둔 게 아니더냐?”
태자가 알고 있으니 묵용감도 거짓말은 그만두었다.
“예. 알고는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 천하는 폐하의 것이라 생각했으니까요. 군주가 모든 권력을 가지려는 것도 마땅하지요.”
“모든 권력을 가진 후엔 네 목을 칠 수도 있었다. 두렵지도 않느냐?”
묵용감이 손을 들어 막사 밖을 가리켰다.
“폐하는 절 죽일 수 없습니다.”
태자가 고개를 돌려 그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막사 밖에는 사병들이 흐트러짐 없는 대열을 이루고 서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활기가 넘쳤다. 적군을 포위한 상황이지만 긴장의 끈을 쥔 채, 최상의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태자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알다시피, 황제는 묵용감을 죽일 수 없다. 초왕은 동월국의 군신이자 모든 사병의 추앙을 받는 신적인 존재인 만큼, 호부 따위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 초왕이 살아 있는 한, 황제 홀로 동월국을 지배하는 일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머지않아 황제도 이 사실을 깨닫게 될 터였다.
태자는 황제보다 초왕을 더 잘 알고 있었다. 형제 중 야욕이 없는 사람을 고르라면 오직 한 명, 초왕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