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5화
황제가 이렇게 진노한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백여름은 딸에게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 어디가 불편하시옵니까? 신이 태의를 부르겠습니다.”
황제가 숨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잠시 화가 치솟았을 뿐이다. 괜찮다.”
백여름이 여전히 무릎을 꿇고 고했다.
“폐하, 신이 당장 초왕을 추포하여 잡아 오겠나이다.”
“소용없네. 이렇게 말끔히 떠난 걸 보면 예전부터 계획한 일이었겠지.”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는 백 귀비를 내려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승상도 귀비도 일어나시오. 이렇게 된 이상, 누굴 원망해도 소용없는 일이오.”
백여름은 그제야 몸을 일으키고 백 귀비를 부축하며 눈짓했다. 그녀는 억울한 표정으로 흐느꼈지만 소란을 피울 때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난지의 부축을 받아 처소로 돌아갔다.
백 귀비가 돌아간 후, 백여름이 허리를 굽히며 물었다.
“폐하, 어찌하면 좋을까요?”
“어찌하긴?”
황제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떠났다면, 태도를 정했단 뜻이지. 맞서 싸울 준비를 해야 하네.”
백여름이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초왕에게는 한 명의 병사도 없사옵니다. 감히 얼굴을 내보이거든 죽음을 각오하고 맞서겠습니다!”
“그 애 뒤에 태자가 있음을 잊었더냐.”
한바탕 분풀이를 한 부린 황제는 오히려 조금 홀가분한 기색을 보였다.
“있다 한들 겁낼 게 무엇이냐. 적들은 숨어 있고 난 이리 잘 보이는 곳에 있지 않은가. 주제도 모르고 날뛴다면 반역죄로 모조리 처단하겠다!”
* * *
월규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효월수방은 계속 적자를 면치 못했고 원단을 사는 데 쓴 돈조차 메우지 못했다. 이대로 간다면 폐업밖에 방도가 없었다.
탁자 앞에 앉은 월향과 월규의 얼굴은 근심이 가득했지만, 백천범은 달랐다. 그녀가 예리한 눈빛으로 남아 있는 자수품을 살피더니 물량을 종이에 적기 시작했다.
“양말이 여덟 켤레, 손수건 열두 장, 신발 자수 다섯 개, 주머니 열 개, 향낭 열 개…….”
월향이 그녀를 힐끗 돌아보았다.
“숫자는 세서 뭐 하게? 싸게 팔려고?”
“아니.”
백천범이 태연히 말했다.
“장사는 안 되지만 입소문은 제법 났으니까, 일거리를 받아서 팔면 남은 물건도 팔 수 있어.”
월규가 언짢은 표정을 보였다.
“은표가 있을 땐 뭐든 다 좋아야 한다더니. 범이 너처럼 장사하면 손해를 안 보는 게 이상하겠어. 이제는 일거리만 받아서 먹고살자고? 그럼 지금보다 남는 게 없을걸.”
“아이, 누나도 참. 그만 혼내. 사람이 좌절을 겪어 봐야 식견이 넓어지는 거지. 배우는 데 쓴 값으로 생각하면 되잖아.”
백천범이 헤헤 웃으며 넉살 좋게 말했다.
“좋은 소식도 있어. 어떤 사람이 우리 가게가 마음에 든다면서 가겟세를 내고 여기서 장사하고 싶대. 누나들 생각은 어때?”
월규의 표정에 경계심이 가득 어렸다.
“어떤 사람? 뭐 하는 사람인데?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야지. 아무나 거래할 수는 없잖아.”
한편 월향은 다른 걱정을 꺼냈다.
“가게를 내어 주면 우린 어떻게 하려고? 몇 푼 안 되는 가겟세만으로 지낼 수는 없어.”
월규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 이 주변에서 우리 가게 같은 곳은 은자 한 냥이면 빌릴 수 있어.”
백천범이 허리춤에서 주머니를 꺼내더니 안에 든 돈을 탁자에 쏟았다. 은자 부스러기 조각과 동전 몇 닢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한 달에 한 냥 이 전을 주겠대. 우선 두 달 치 가겟세를 줬어. 장사가 잘되면 계속 여기를 빌리고, 잘 안 되면 가게를 접겠대.”
월규와 월향이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중요한 일을 우리랑 상의도 안 하고 승낙한 거야?”
백천범이 머쓱하게 뒤통수를 만지작거렸다.
“아가씨는 외간 남자와 말을 섞기 힘들잖아. 그래서…….”
월규가 결국 버럭 화를 냈다.
“가게를 그렇게 빌려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빌려주려면 일 년 치 세를 받아야지. 다달이 받다가 두 달 뒤에 나가겠다고 하면, 우린 입에 거미줄을 쳐야 한다고!”
“장사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 사람들까지 굶어 죽게 할 수는 없잖아!”
백천범이 받아치자, 월규가 눈을 부릅뜨며 쏘아붙였다.
“넌 대체 생각이란 게 있니?”
“누나, 그렇게 노려보지 말고 내 말 들어 봐.”
월규를 겁낼 리 없는 백천범은 연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적자를 보긴 했지만 다른 사람 입장도 생각해 줘야지. 그래도 우린 두 달 동안 은 두 냥을 번 거잖아. 생각해 봤는데 월규 누나는 수를 잘 놓으니까 자수만 전담하고, 월향 누나는 간식을 잘 만드니까 매일 간식을 만드는 거야. 둘이 만든 걸 내가 나가서 팔고, 어때?”
월규와 월향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월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나쁘진 않은 생각이네. 자수는 그리 큰 비용이 들지 않지만, 간식은 어느 정도 재료비가 들 텐데 가겟세만으로 타산이 맞으려나 모르겠네.”
“그것도 생각해 봤어. 우리는 남들이랑 다른 간식을 만들어야지.”
백천범이 입술을 할짝거리며 말했다.
“예전에 기홍 언니가 화전이랑 나물 전, 쑥떡, 조롱박 경단 같은 걸 만들어 줬거든. 여름에는 연잎 떡이랑 연밥 과자, 옥수수 전병, 가을에는 국화 전병이랑 계화꽃 떡, 대추 떡도 만들어 줬어.
겨울에는 고구마 같은 걸 캐거나 산에서 먹을 걸 찾아오면 돼. 난 산을 잘 타니까 문제없어. 흔치 않을수록 귀한 법이니까 비싼 걸 팔지 않아도 계절마다 제법 돈을 벌 수 있을 거야.”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월향은 그녀의 계획에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인데? 그렇게 하면 재료비도 많이 들진 않을 테니 적은 돈으로도 이윤을 제법 남길 수 있겠어. 역시, 우리 범이는 똑똑하다니까.”
월향의 칭찬에 백천범은 부끄러운 듯 코끝을 비비며 헤헤 웃었다.
“내가 정말 똑똑했으면 적자를 낼 일도 없었을 텐데.”
결국 세 사람의 효월수방은 기름을 파는 가게로 바뀌었다.
기름 가게 사장은 전 씨였다. 마침 백천범이 바꾼 이름의 성도 전 씨라, 두 사람은 성이 같다는 이유로 서로를 살갑게 대했다. 전 씨는 백천범에게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근처에 거처를 마련했는데 집주인이 마음을 바꾸는 통에 묵을 곳이 사라졌다며 울상이었다. 그러면서 곁채 하나를 빌려줄 수 없냐고 간곡하게 사정을 했다.
이 일은 반드시 월규와 월향과 상의해야 한다. 여인들이 묵는 곳인 만큼 외부인을 들이는 건 조심스러운 문제였다.
월규와 월향은 아내와 함께 장사를 하는 전 씨의 성실함을 보고 흔쾌히 승낙했다. 장사 때문에 밖에 나가기도 쉽지 않을 테니 편의를 봐주고 싶었다. 게다가 곁채를 빌려주면 은자도 더 벌 수 있을 터였다.
기름 가게는 늘 북적거렸다. 장사가 제법 잘되는 듯했다.
백천범은 매일 바구니를 짊어지고 거리를 누비며 맛 좋은 제철 간식을 판다고 소리쳤다. 며칠은 다른 장사꾼들과 같은 방법으로 팔았지만, 그녀는 곧 꾀를 내었다. 일부러 아이들이 있는 집을 찾아가 문 앞에서 간식을 판다며 목청을 높였다.
또한 아이들에게 공짜로 과자를 하나씩 나눠 주었다.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 아이들은 자연스레 또 먹고 싶어 했고, 공짜로 받은 게 미안했던 부모들도 간식을 두 개씩 사 갔다. 어쨌든 한 개는 공짜로 받았으니 이득을 봤다는 생각에 그들도 기분이 좋았다.
맛도 좋고 값도 그리 비싸지 않게 받는 데다, 곱상한 얼굴로 예쁘게 말하는 어린 장사꾼이 크게 한몫 거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차츰 친근하게 여겼다.
어린아이들뿐만 아니라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도 그녀가 파는 간식을 좋아했다. 백천범은 이윤을 따지기보다는 늘 정직하게 장사를 하고, 가끔 남은 것들을 공짜로 나눠 주었다. 점점 단골손님이 늘어나면서 그녀가 올 시간이 되면 골목 어귀에 서서 기다리는 사람도 생겨났다.
그녀의 간식 장사가 입소문을 타게 되면서, 광주리를 가득 채운 간식은 골목 두 개를 돌기도 전에 다 팔리기 일쑤였다. 간식을 사지 못한 손님들은 아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내일은 더 많이 가져오라고 신신당부했다.
명색이 제철 간식이니 백천범은 계절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단오가 돌아오자 그녀는 일부러 먼 곳까지 찾아가 대나무 잎을 따 깨끗하게 씻어 말렸다. 그녀는 간식과 대나무 잎을 함께 팔며, 시장보다 더 저렴한 가격을 불렀다. 곧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대나무 잎을 사기 시작했다.
대나무 잎이 금세 동이 나자 그녀는 뛸 듯이 기뻤다. 그다음엔 쑥을 듬뿍 캐서 팔았다. 이곳 사람들이 문이나 창문에 쑥을 걸어 두는 풍습을 눈여겨 봐둔 터였다. 파는 것만큼 덤으로 주는 것도 많았지만, 제법 많은 돈을 벌었다.
그녀를 점점 더 친근하게 여긴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범이’라고 불렀다. 늘 덤을 받으니 미안해진 사람들이 그녀를 챙겨 주기 시작했다. 그들은 채소나 마늘, 생강, 싱싱한 파와 고추를 주며 그녀의 씀씀이에 보답했다.
고기를 줄 때도 있었다. 강이 발달한 만큼 물고기가 많으니 어디서든 낚시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낚시를 하다 그녀와 마주친 단골손님들은 그녀에게 생선을 건네곤 했다.
어느 날은 백정의 집을 지나다 고기 한 덩이를 얻었는데, 어찌나 신이 났는지 그녀는 눈이 다 감길 만큼 활짝 웃어 보였다. 어느 노파가 막 부화한 병아리 한 마리를 줄 때도 있었다.
보송보송한 병아리를 보니 절로 노랑이가 떠올랐다. 그녀는 병아리가 알을 낳을 때까지 잘 키워 보기로 마음먹었다. 나중에 그 알이 닭이 되고, 닭이 또 알을 낳을 테니……. 소소하지만 달콤한 미래를 생각할수록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굶지 않고 무탈하게 지낼 수 있다. 곱씹을수록 행복한 일이 아닌가.
점점 그녀의 앞에 희망이 비치는 듯했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녀가 빈 광주리를 짊어지고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백천범은 희망을 꿈꿨지만, 세상일은 예측하기 어려운 법이었다. 어느새 희망은 훌쩍 멀어져 있었다.
단오가 지나자마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듯 초왕과 황제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퍼졌다.
백성들은 전쟁의 형세보다 전투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문이 돌았고, 백성들은 하나둘 짐을 싸고 도망칠 준비에 몰두했다.
모두가 전쟁을 이야기할 때, 백천범 일행은 초왕의 존재를 떠올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의 손에 잡히기라도 하는 날엔 그대로 목이 날아갈 게 뻔하지 않은가.
월규는 백성들 틈에 섞여 도망치자고 제안했고, 월향은 힘들게 일군 가업을 두고 떠나기 아쉽다며 망설였다. 백천범은 며칠 더 지켜보기로 했다. 아직은 소문이 퍼졌을 뿐이니, 실제로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