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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94)화 (293/1,192)

제294화

묵용감은 눈을 내리깐 채 어떠한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천자이시고 저는 신하입니다. 천자께서 명을 내리시면 신은 복종해야 하는 법이지요.”

“예전의 일은 짐이 어리석었다. 부디 마음 쓰지 말거라. 예전처럼 이 형을 보좌해 다오.”

“폐하를 향한 이 아우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하지 않았사옵니다.”

“그래.”

황제가 마침내 미소를 보였다.

“다행이구나. 짐은 네가 어찌해야 할지 잘 아리라 믿는다.”

그때, 백 귀비가 머리 꽂이를 들고 다가오더니 어여쁜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서 보시기에 이 장신구는 어떠십니까?”

황제가 유심히 장신구를 들여다보다 말했다.

“어린 여인들이 하는 것 같구려. 귀비에게는 그리 어울리지 않소.”

백 귀비가 태연히 아양을 떨었다.

“폐하께서는 신첩의 나이가 많다고 여기시옵니까?”

두 사람이 장신구를 가지고 시시덕거리니 묵용감도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장신구를 바라본 순간, 그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표정을 감출 겨를도 없었다.

놀란 표정은 금세 사라졌어도, 황제의 눈길을 피하지 못했다. 황제가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짐이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소. 이 장신구를 보니…….”

그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구려.”

백 귀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누가 떠오르십니까?”

“귀비의 여동생이자, 우리 초왕비 말이오.”

황제가 웃으며 답하더니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초왕비에게 주면 잘 어울릴 듯하오. 셋째야, 그렇지 않느냐?”

묵용감은 소맷자락에 가려진 두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불길한 예감으로 가슴이 술렁거렸지만, 그는 담담한 표정을 내보였다.

“그리 마음을 써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실은 초왕비에게도 이런 장신구가 있사옵니다.”

“그래?”

황제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셋째는 왕비의 물건을 훤히 꿰고 있구나. 부끄럽지만 짐은 귀비의 장신구를 봐도 모르는 것투성이다.”

백 귀비가 그 틈을 타 애교스럽게 덧붙였다.

“폐하께서 신첩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초왕이 애처가라는 것은 온 천하가 다 알고 있지요.”

더는 자리를 지키고 싶지 않아, 묵용감은 곧장 일어나 인사를 고했다.

황제는 그를 불러세우더니 장신구를 건넸다.

“그래도 초왕비에게 더 어울릴 듯하니 상으로 내리겠다.”

머리 꽂이를 손에 쥔 그가 허리를 숙여 보이고 승덕전을 나섰다. 어느새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 땀이 도포를 눅눅하게 적셨다. 궁 문을 나선 뒤에야 그는 손바닥을 펴고 머리 꽂이를 자세히 살폈다.

밝은 햇빛 아래에서 모든 계략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틀림없다. 그가 백천범에게 준 머리 꽂이다. 한 쌍의 장신구 중 하나가 그의 손에 돌아왔다. 이 머리 꽂이는 그녀가 늘 하고 다닐 만큼 좋아하던 장신구인데, 어째서 황제의 손에 있단 말인가?

문득 진왕의 충고가 머리를 스쳤다. 그는 그제야 황제가 궁으로 부른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를 협박하기 위해서다. 진왕의 예상대로가 아닌가. 결국, 황제가 먼저 균형을 깨트리고 말았다.

그는 머리 꽂이를 꽉 움켜쥐고 어두운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스스로 깨닫길 바라며, 그는 줄곧 참고, 또 참았다. 그러나 오랜 기다림이 가져다준 건, 황제의 무자비한 마음뿐이었다.

그의 안색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아차린 영구가 서둘러 말을 끌고 다가왔다.

“왕야, 무슨 일이라도 있으시옵니까?”

묵용감이 다급히 물었다.

“왕비의 소식은 아직이더냐?”

영구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넓은 땅에서 도망친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소식을 접하자마자 사람을 보내 남쪽으로 향하며 그녀의 행방을 조사했다. 수소문 끝에 영남 지역으로 갈 거라는 소식이 들어왔다.

구정이 지난 뒤 영남 지역에 다다랐지만, 영남은 세 개의 군과 여섯 개의 부, 열두 개의 현으로 이루어진 광활한 지역이었다. 마을은 별처럼 총총히 늘어서 있으니, 어린 왕비가 아무 데나 몸을 숨긴다 한들 한참을 찾아야 했다.

묵용감이 손을 펼쳐 보였다.

“왕비가 하고 다니던 장신구다. 폐하께서 방금 본왕에게 주셨다.”

영구와 가동의 얼굴이 동시에 창백해졌다.

“왕비 마마께서 폐하의 손에 계신단 말씀이십니까?”

“폐하의 손에 있는지는 조사해 봐야지.”

묵용감이 다시 머리 꽂이를 움켜쥐었다. 어둡게 가라앉았던 눈망울에 매서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움직일 때가 되었다.”

* * *

“마마! 마마!”

조반을 가지러 갔던 무수리가 낙성각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작은 주전자로 꽃에 물을 주던 수원상은 그녀의 소란에 마음이 번잡해졌다. 막 입을 열려는데 옆에 있던 추문이 한발 빨랐다.

“아침 댓바람부터 귀신을 보기라도 했단 말이냐? 어찌 이리 소란스럽게 굴어?”

무수리가 겁을 먹은 듯 웅얼거리며 말했다.

“소인이 앞뜰에 조반을 가지러 갔는데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부엌에는 어제 먹다 만 찐빵만 남아 있었습니다.”

추문이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한 사람도 없다니,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야? 제대로 본 게 확실한가?”

“똑똑히 보았습니다. 정말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부엌은 물론이고 하인들 방문도 다 닫혀 있었습니다. 혹시 몰라 문을 열어 봤더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대문까지 다녀왔는데 대문이며 측문이며 다 닫혀 있었습니다.”

온몸이 오싹해질 만큼 깜짝 놀랐던 터라, 무수리는 아직도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추문은 이 소식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큰 저택에 아무도 없다니, 말이나 되는 일인가!

“마마, 소인이 다녀오겠습니다.”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수원상이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아니다. 내가 직접 가 봐야겠다.”

수원상과 추문은 서둘러 앞뜰로 향했다. 늘 떠들썩했던 앞뜰이 텅텅 빈 데다, 부엌에서 기르는 닭 몇 마리만 한가로이 앞뜰을 거닐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추문은 애타는 마음에 방이란 방은 전부 열어 보았다. 그 때마다 텅 빈 방만이 추문을 맞이했다.

수원상은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그녀는 체면을 차릴 겨를도 없이 치맛자락을 붙잡고 회림각으로 내달렸다. 중문을 지키는 이도 없었다.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정원을 선명하게 수놓은 빨간 꽃과 푸른 잎이 흔들거렸다. 봄기운은 물씬 느껴졌지만…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묵용감의 방에 서서 황망한 얼굴로 사방을 살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루아침에 저택에 지내는 이들이 죄다 사라지다니?

그때, 방으로 뛰어 들어온 추문이 숨을 헐떡이며 고했다.

“마마, 아무도 없습니다.”

수원상은 그제야 깨달았다. 묵용감은 그녀를 버리고 떠났다.

후원에서만 지내느라 바깥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해도, 그녀는 조정의 일을 대강은 알고 있었다. 황제와 초왕이 대치하니 그녀의 아버지도 난처한 상황이었다. 그는 수원상에게 기회가 되면 초왕을 설득하거나 준비를 해 두라고 전갈을 보내왔다.

그녀는 초왕을 설득하지 않았다. 설득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므로. 초왕이 그녀의 말을 듣기나 하겠는가? 물론 미리 준비할 수도 없었다. 시집을 온 이상, 죽어서도 초왕의 사람으로 남겠다고 결심했으니 저택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상황은 정말로,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묵용감이 이렇게 그녀를 내버릴 줄이야. 그녀를 데려갈 생각이 없어도, 언질은 해 줘야 하는 게 도리가 아닌가?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기만 했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어찌 손쓸 틈도 없이 떠나 버린단 말인가?

시집온 뒤로 억울한 일을 수도 없이 겪었지만, 오늘처럼 견디기 힘든 적은 없었다. 숨을 쉬기조차 버거웠다.

사랑하는 사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망설임도 없이, 어떠한 예고도 없이 그녀만 저택에 남겨 두고 홀연히 떠나 버렸다. 완전한 타인인 것처럼…….

“마마, 어찌하면 좋습니까?”

추문이 얼른 수원상의 팔을 부축했다.

“친정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수원상은 점점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된 듯,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결연한 표정으로 방 안을 한 차례 둘러본 뒤 나지막이 답했다.

“그만 가자꾸나.”

추문은 그녀가 낙성각으로 돌아가자고 할 줄은 몰랐지만, 묵묵히 그녀를 부축했다. 낙성각에 도착한 그녀가 모든 하인을 불러 모았다.

“알다시피 왕야와 다른 이들은 저택을 떠났다. 단, 내가 남아 있는 한 초왕야의 저택은 건재한다. 남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남아도 된다. 떠난다 해도 말리지 않겠다. 품삯은 계산해 줄 테니 각자의 길을 가거라.”

하인들은 서로 눈치만 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니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도 몰랐다. 초왕의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얼굴에 윤이 날 정도로 높은 품삯을 받았다. 그러니 한 번 일하기 시작하면 누구도 그만두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초왕도 떠난 마당에 이곳에 계속 남아도 되는 건가? 확신이 서지 않으니 다들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질문을 던져 침묵을 깨트렸다.

“왕야께서는 돌아오시는 겁니까?”

“돌아오신다.”

수원상이 의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곳은 왕야의 집이다. 그러니 돌아오실 장소는 바로 이곳이 아니더냐. 분명 돌아오신다.”

그녀의 침착한 반응에 하인들도 마음을 굳혔는지 모두 저택에 남겠다는 답을 내놓았다.

밤이 되자 추문이 주변을 물리고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마마, 많은 인원은 아니지만, 끼니는 때워야 하지 않습니까. 월말에는 봉급도 줘야 하는데 수입도 없이 어찌 저들을 먹여 살린단 말입니까?”

수원상이 차분하게 말했다.

“계획이 있으니 그리 걱정하지 말거라.”

시집올 때 많은 혼수를 가져왔으니 몇 년은 문제없다. 그녀가 정말 걱정하는 건 다름 아닌 묵용감이다. 그가 정말 이곳으로 돌아올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녀가 가진 돈을 다 써버리기 전에 돌아오긴 할까?

* * *

“뭐라!”

진노한 황제가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내던졌다.

“하룻밤 사이에 몰래 도망을 쳤다?”

“그러하옵니다.”

백여름은 황제의 진노한 표정을 마주하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저택 대문이 이틀이나 닫혀 있기에 사람을 들여보냈더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황제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더니 안색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중얼거렸다.

“초왕이 떠나다니, 초왕이……!”

백 귀비가 황제에게 다가와 나긋하게 속삭였다.

“그저 도망쳤을 뿐입니다. 폐하께서는 초왕이 두려우십니까?”

황제는 끓어오르는 분노의 근원을 찾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힘껏 손을 휘둘렀다. 백 귀비는 막을 틈도 없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다 네 잔꾀 때문이 아니더냐. 초왕비로 초왕을 협박하라더니, 초왕이 어디 협박을 참을 사람이란 말인가? 성이 났으니 분명, 분명……!”

황제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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