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3화
“가게 연 뒤로 우리가 번 돈이 얼마인지나 알아? 마을에 사람이 이렇게 적은데 시집오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애초에 여기에 정착하는 게 아니었다니까. 성안에 살면 얼마나 좋아.”
백천범이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이 마을에는 성문이 없으니까 언제든 도망칠 수 있어. 그리고 풍경도 얼마나 좋아? 사람이 적은 건 괜찮아. 나중에 마차 하나만 사자. 내가 성에 들어가서 더 많이 팔아올게. 오가는 길에 손님을 태우면 노잣돈도 벌 수 있잖아.”
가만히 듣던 월규가 코웃음을 쳤다.
“아이고, 됐네요. 마차 한 대가 얼마인지는 알아? 말 한 필 키우는 데 드는 돈은 어떻고? 게다가 범이 너는 너무 고지식해. 이 실 좀 봐. 전부 고급 실이잖아. 이렇게나 공을 들이니 이윤이 얼마나 남겠어?
다른 공방은 싸구려 실을 쓰면서 가격은 우리랑 똑같이 받아. 이렇게 팔다간 머지않아 문을 닫을지도 몰라.”
백천범은 이 부분만큼은 물러설 수 없는지 간곡한 어조로 그녀를 설득했다.
“좋은 실을 써야 색도 예쁘고, 수를 놓을 때도 힘이 안 든단 말이야. 단골손님들도 우리 제품을 얼마나 칭찬하는데.”
“칭찬을 안 할 수가 없지. 똑같은 가격이어도 우리 물건이 월등히 좋은걸.”
월향이 서둘러 끼어들었다.
“물건이 좋아야 입소문이 나지. 앞으로 더 잘 팔릴 거야.”
두 사람의 낙천적인 반응에 월규는 코웃음을 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백천범이 뭔가 말하려는데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범이 형, 범이 형 안에 있어?”
백천범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계단에 서 있던 희락喜樂이 그녀에게 헤벌쭉 웃어 보였다.
“범이 형, 나무에 연이 걸렸어. 형이 내려주면 안 돼?”
백천범이 고개를 들어 나무에 걸린 연을 훑어보았다.
“그래. 잠깐만 기다려.”
그녀는 긴 도포 자락을 옆구리에 끼워 넣고 두 손으로 나무를 껴안더니 원숭이처럼 잽싸게 나무를 탔다. 빽빽한 나뭇잎을 헤치고 연이 걸린 곳까지 올라간 그녀가 손을 뻗어 가볍게 연을 잡아당겼다. 다만 나뭇가지에 실이 엉켜 풀릴 기미가 안 보였다.
그녀는 한 손으로 나뭇가지를 잡고 몸을 기울여 연에 가까이 다가갔다. 한눈에 보아도 아슬아슬한 자세라, 누가 보면 질겁했을 터였다.
급히 밖으로 나온 월규가 나무에 올라탄 백천범의 모습을 보고 눈이 커지더니 희락을 나무랐다.
“우리 범이가 너희 하인도 아니고 왜 맨날 부려먹는 거야? 저렇게 높은 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져서 다치기라도 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월규의 무서움을 잘 아는 희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집 안에서 월규의 말을 들은 희락의 모친이 뛰쳐나오더니 불쾌한 표정으로 희락의 귀를 잡아끌었다.
“엄마가 말썽 피우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말을 안 들으니까 욕이나 얻어먹는 거야. 저렇게 고귀하신 분을 네가 함부로 부려먹을 수 있는 줄 알아? 얼른 들어가.”
울상이 된 희락이 나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내 연……!”
“얼른 들어가. 나중에 새로 사 줄게.”
그러나 백천범은 솜씨 좋게 실을 풀고 연을 내린 뒤였다.
“희락아, 여기 있어.”
“필요 없다.”
희락의 모친이 경멸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힐끗 보았다.
“네가 주웠으니 네가 가지든지.”
화가 치솟은 월규가 뛰어와 연을 빼앗더니 희락의 모친에게 집어 던졌다. 그러나 백천범은 기어코 연을 다시 주워 왔다.
“버리지 마. 이모가 나더러 가지라잖아. 찢어질지도 모르니까 조심해.”
“넌 비꼬는 말도 못 알아듣니?”
속이 부글부글 끓는 느낌에 월규가 쏘아붙였다.
“연은 누나가 사 줄 수 있어. 뭐 하러 남들 앞에서 망신당할 짓을 해!”
“사려면 돈이 들잖아!”
백천범은 그녀가 빼앗지 못하도록 아예 연을 등 뒤에 숨겼다.
월향이 둘을 보며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이야기는 들어와서 해. 길에서 떠들지 말고.”
백천범은 월향을 향해 활짝 웃어 보이고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월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안으로 들어간 월규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백천범을 꾸짖기 시작했다.
“내가 말했지? 지금은 평범한 백성처럼 지내지만, 신분을 잊으면 안 된다고. 이놈 저놈이 다 부려 먹게 두면 어떡해? 게다가 위험한 행동까지! 저렇게 높은 나무에 올라가다니,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무나 친하게 지내려 하니까 저런 아이들도 널 업신여기잖아. 오늘은 나무에 올라가라고 했지만 다음엔 담장을 넘으라고 하고, 그다음엔 무슨 일을 바랄지 누가 알겠어? 이러다 정말 널 하인처럼 부려 먹을 거라니까!”
월규는 제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치며 나무랐다. 그러나 백천범은 할 말을 참지 않았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희락이는 내가 좋으니까 같이 놀고 싶어 하는 거지.”
백천범이 희락을 대신해 해명하며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사내아이야. 당연히 사내아이들이랑 어울려야지. 아가씨들이랑 놀까? 그게 더 망신 아니야?”
“그저 사내아이 분장이잖아. 아가씨들 틈에 끼어 있는 게 뭐가 어때서?”
월규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너는 그래도 여인이야. 날마다 사내아이들과 어울리기만 하면 안 돼. 내가 볼 땐, 다시 여인으로 지내는 게 낫겠어.”
백천범이 고집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말했잖아. 집안에 사내 한 명은 있어야 한다고. 여인들만 있으면 누가 노릴지 몰라. 난 무술도 할 줄 아니까 이 차림으로 있는 게 나아. 그래야 못된 놈이 우리를 넘본다 해도 경거망동할 수 없지! 나중에 너희가 낭군을 찾으면 그때 여인 차림을 하지, 뭐.”
월규는 할 말이 남은 듯했지만 월향이 서둘러 끼어들었다.
“내 생각도 그래. 낯선 곳에서 여인 셋이 한집에 사는 건 위험해. 게다가 우리가 처리하기 힘든 바깥일들은 범이한테 맡겨야 하잖아. 그리고 희락이는 철없는 사내아이에 불과하니, 함께 지내도 문제없을 거야.”
월규가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속이 상해서 그래. 귀한 대접을 받던 분이 지금은 동네 꼬맹이 때문에 나무에 올라가서 연이나 줍고 계시잖아.”
“이제 우린 누나 동생 사이라니까. 왜 자꾸 날 주인으로 여기는 거야.”
백천범이 월규를 다독였다.
“예전 일은 잊어. 날 그냥 남동생 범이라고 생각해. 우리는 이곳 강남 사람이니까 여기에 뼈를 묻어야 해. 말투도 조금씩 바꾸고. 그래야 안 붙잡히고 안전히 지낼 수 있어.”
월규가 조소를 머금었다.
“계절이 바뀌어도 아무 소식이 없는걸. 왕야께서 아무도 보내지 않은 게 분명해. 앞으로는 숨지 말고 대범하게 지내자.”
백천범이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좋지. 이미 황보주아를 정비 자리에 앉히고 날 완전히 잊었을지도 모르니.”
그녀의 미소에 옅은 서글픔이 서렸다. 그녀의 말마저 자조적으로 들려왔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든, 어디에 있든 사랑했던 기억은 늘 마음에 희미한 흉터를 남긴다. 다만 그녀에게는 다 아물어 남은 흉터가 아니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깊고 선명한 상처로 존재했다. 어둠이 내려 모두가 잠들고 나면, 그녀는 그 고통을 오롯이 홀로 견뎌냈다.
* * *
정원 곁채 앞의 복사나무는 탐스러운 꽃송이를 빼곡하게 매달고 있었다. 바람이 스칠 때면 꽃잎이 우수수 흩날려 나무 아래에 붉은 융단을 펼쳤다. 연녹색 풀과 어우러지니 색의 조화가 감탄을 자아냈다.
창 옆에서 초왕과 태자는 바둑을 두고 있었다. 초왕은 자줏빛 도포에 옥관을 썼고 태자는 월백색 도포에 검은 머리를 명주 끈으로 묶었다. 두 사람의 표정은 평온했지만, 흑과 백이 어지럽게 뒤섞인 바둑판은 팽팽한 승부를 겨루고 있었다.
결국 태자가 힘겨운 승리를 거머쥐었다. 긴 손가락으로 바둑알을 함에 담던 그가 미소를 머금었다.
“셋째의 바둑 솜씨가 많이 좋아졌구나.”
“아직 형님의 적수는 못 됩니다.”
“예전에는 열 집 차이로 이겼던 것 같은데 오늘은 고작 세 집 차이가 아니냐. 머지않아 날 이기겠구나.”
묵용감이 평온한 웃음을 보였다.
“그날이 하루빨리 오길 바라야겠군요. 형님을 이기는 게 어떤 기분일지 이 아우, 몹시 궁금합니다.”
그때 학평관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왕야, 폐하께서 궁으로 드시라는 전갈을 보냈습니다.”
바둑알을 집던 묵용감의 손이 멈칫했지만 이내 태연한 목소리를 내었다.
“…알겠다.”
태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 시간에 입궁이라니,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냐?”
묵용감이 덤덤한 얼굴을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보면 알게 되겠지요.”
“줄곧 가만히 있다가 갑작스레 불렀으니, 좋은 일은 아닐 테지.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궁에 형님의 사람도 있는데 제 사람이라고 없겠습니까.”
묵용감은 마음의 준비를 마친 듯, 의연한 모습을 비쳤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황제가 그의 목을 칠 생각이었다면 지금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우유부단한 황제가 설령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고 해도 오늘은 아니었다.
가동과 영구가 오문까지 그의 뒤를 따랐다. 어쩐지 예전과 다른 분위기를 느낀 가동이 당부했다.
“왕야, 조심하셔야 합니다.”
묵용감은 그의 어깨를 몇 차례 두드려 주곤 이내 궁에 들어섰다.
황제는 침궁에서 그를 맞이했다. 안으로 들어서던 묵용감은 백 귀비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화장대 앞에 앉은 그녀는 보석함에 든 머리 장신구를 매만지고 있었다.
규율에 어긋나는 일이다. 후비가 늘 황제의 침궁에 머물러 있다니. 게다가 황제가 신하를 접견하는데도 자리를 피하기는커녕 태연하게 있지 않은가. 묵용감은 그녀의 아리따운 자태에 숨겨진 오만방자함을 읽어냈다.
묵용감은 공손히 예를 갖춘 후 황제에게 물었다.
“어인 일로 부르셨습니까, 폐하?”
“…앉거라.”
황제는 푹신한 의자에 축 늘어져 있었다.
“별일은 아니다. 근래에 너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 같아 불렀다.”
묵용감이 도포를 젖히며 의자에 앉았다.
“공사다망하신 폐하께서 아우를 그리 생각해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짐도 안다. 황후가 떠난 후로 소원해졌구나. 무슨 연유인지는 짐도 짐작하고 있다. 짐이 귀비를 총애하니 황후에게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겠지.”
묵용감이 두 손을 맞잡았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 침묵하던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후가 떠나고… 짐이 어찌 견딜 수 있었겠느냐. 혼이 나가 터무니없는 일을 저질렀으니 네가 상심이 클 만하지. 다만 짐이 진정으로 의지할 사람은 셋째 너뿐이다. 원한다면 짐이 곧장 네 복직을 명하고 병권도 돌려주겠다. 어찌하는 게 좋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