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292)화 (291/1,192)

제292화

오랜 시간 머리를 맞댄 끝에 세 사람은 자수 공방을 열기로 했다. 녹하에게 자수 기술을 배운 월규가 수를 놓으면 좋은 값을 받을 터였다. 월향의 솜씨도 뛰어나니 가게 운영에 큰 도움이 되리라. 백천범은 자수는 조금 부족해도, 물건을 사들이는 수완을 살리면 든든한 일꾼이 될 수 있었다.

세 사람은 결정을 내리자마자 분주히 움직이며 머무를 집을 알아보았다. 꼼꼼하게 따져가며 고른 집은 뒤쪽에 커다란 곁채가 세 개나 있었다. 그 앞에는 정원도 있고 가장 앞쪽에는 가게로 쓸 만한 공간도 있었다. 크기가 크니 마음껏 꾸밀 수 있었다.

세 사람은 계약금을 낸 뒤, 가게를 정비할 사람과 가구, 그 외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했다. 며칠간 공을 들인 끝에 가게 문을 열 수 있었다. 가게에는 파란색 바탕에 붉은 글씨로 「효월수방曉月綉坊」이라 적은 현판도 걸었다.

가게 이름은 백천범이 지었다. 처음에는 월규와 월향의 이름에서 ‘월’자를 따고 부르기 쉽게 ‘소’자를 붙여 소월이라 지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월향이 소는 예쁜 글자가 아니라며 ‘새벽 효’자를 넣어 새벽달이라는 의미를 알려 주자, 백천범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 밖에서 채찍 소리와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세 사람은 귀를 막고 가게 안으로 들어와 꺄르르 웃었다. 가지런하게 전시된 자수품과 생기가 넘치는 거리를 지켜보며, 세 사람은 서로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도, 그들은 마주할 자신이 있었다.

* * *

백 승상이 급히 승덕전으로 들어서자 문 앞을 지키던 고승해가 막아섰다.

“승상 어르신,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소인이 들어가 고하겠습니다.”

백 승상이 눈을 부릅뜨며 불쾌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었다.

“본 상이 폐하를 뵐 때도 보고를 올려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고승해는 어딘가 곤란한 기색이었다. 그는 대꾸하지 못하면서도 우물쭈물하며 계속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제야 백 승상은 발을 한 번 구르고 속으로 백 귀비를 원망했다. 황후가 죽었으니 이제 필요 없는 짓이거늘, 아직도 벗어나질 못하다니……. 중독이라도 되었단 말인가?

옆으로 비켜선 그는 망측함에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처마에 그려진 그림을 응시했다.

“끝났는지 들어가 보게. 급한 일이라 서둘러 폐하를 뵈어야 하네.”

고승해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조용히 내전으로 들어갔다. 침궁 입구에 서 있던 난지가 고승해에게 얼른 예를 갖췄다.

고승해가 손짓하자 난지가 문 근처를 기웃거리며 기척을 살폈다. 그러더니 붉게 물든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고승해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어, 그는 한번 더 헛기침을 내뱉었다.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침대가 갑작스럽게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헐떡거리는 백 귀비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늘고 보드라운 실에 몸이 얽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처럼 들렸다.

내감인 고승해는 이쪽 분야에 둔한 편이다. 그러나 백 귀비의 음성이 끊이지 않으니 그 또한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이번에는 크게 목을 가다듬었다.

마침내 안에서 거친 목소리가 응답했다.

“무슨 일이냐?”

“폐하께 아룁니다. 백 승상께서 급한 일로 뵙기를 청합니다.”

“…알았다.”

고승해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슬며시 물러나려는데 백 귀비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보드라운 실이 갑작스레 하늘로 빨려 올라가는 듯한 소리였다.

돌연 잠잠해지더니 한동안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그는 한참 뒤에야 옅은 한숨을 내쉬며 정신을 차렸다. 정말 소름 끼치는 소리가 아닌가.

고승해는 소매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승상 어르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끝난 듯합니다.”

백 승상은 짤막하게 대꾸하고는 뒷짐을 진 채 밖을 서성였다. 기회를 봐서 백 귀비를 타이를 필요가 있다. 급박한 시국에 늘 황제를 붙잡고 있어선 안 된다.

잠시 후 난지가 백 승상을 안으로 모셨다.

침전에는 아직 퇴폐적인 기운이 맴돌았다. 백 승상은 민망함에 고개를 들 수가 없어, 눈을 내리깔고 오조룡이 수 놓인 황제의 신발을 바라보며 예를 갖췄다.

“폐하. 노신,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황제는 옷을 갖춰 입긴 했지만 머리는 헝클어져 단정치 못한 모습이었다. 태감이 황제의 뒤에 서서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그가 나른한 표정으로 물었다.

“말해 보게. 무슨 일인가?”

백 승상이 머리를 빗겨주는 태감을 힐끗 보고는 머뭇거렸다.

“괜찮네. 짐 곁을 지키는 노쇠한 태감이 아닌가. 말하게.”

“예. 방금 노신이 들은 소식인데 남방 주둔군들이 북서쪽으로 전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도성에서 지령을 내린 적이 없고 호부도 궁 안에 있는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황제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게 사실인가? 승상이 이미 우전 장군을 보내지 않았던가?”

“바로 그 점이 의아하옵니다. 두 주둔군은 줄곧 초왕의 측근이었습니다. 노신의 생각에는 초왕이 수를 쓴 게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아무런 힘도 없는 놈이 무슨 수로 일을 벌이겠는가?”

“군에서는 아직 초왕의 권위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소인은 이대로라면 초왕이 천하를 어지럽힐까 걱정입니다. 혹여…….”

백 승상이 조심스레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폐하, 초왕을 더는 내버려 두시면 안 됩니다. 서둘러 처리하지 않으면 후환이 남는 법이지요.”

황제의 시선은 구리거울 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조금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짐도 방도가 없네. 승상도 알고 있지 않나. 그 당시 태자의 영향력은 조정 안팎으로 막대하여 동궁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지. 이리 대담하게 돌아왔다면, 무언가 결심을 내렸기 때문이네. 초왕이 냉혈한이긴 해도 짐은 그 애를 잘 안다네. 안 그랬다면 그 해, 그 애가 어찌 짐을 위해…….

초왕이 태자를 통제해야 짐도 준비를 할 수 있네. 태자가 짐에게 달려들기라도 하면 잃는 게 많지 않겠는가. 게다가 짐이 그 애를 압박하듯 태자 쪽에서도 그리 나올지 어찌 알겠는가?”

백 승상이 잠시 의견을 정리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압박하셔도 초왕은 태자와 적이 되진 않을 테지요. 책략을 짤 시간이 필요합니다. 태자도 기회를 엿보고 있지 않겠습니까. 다만 노신은 그 시간이 길어지다…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될까 걱정입니다.”

그때, 백 귀비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폐하, 승상의 말씀이 맞습니다. 초왕과 태자를 해결해야 폐하께서 근심 없이 지내실 수 있습니다. 초왕은 태자와 맞서려 하지 않으니 신첩이 보기엔 폐하께서 초왕을 더 몰아세우셔야 할 듯합니다. 마침 신첩에게 좋은 방도가 있는데 들어 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말해 보시오.”

백 귀비가 섬섬옥수를 황제의 어깨에 올려놓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폐하, 초왕비를 기억하십니까?”

“물론이오. 다만 초왕비는 이미 도망치지 않았소?”

“초왕비가 도망쳤는데도 초왕은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았지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습니다. 그래도 생각해 보시어요. 초왕이 저질렀던 대역무도한 짓들은 전부 초왕비를 위한 일이 아니었습니까?

신첩이 보기엔 초왕은 연막전술을 펼치고 있습니다. 초왕비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못하게 말입니다. 사실 초왕이 가장 위하는 사람은 초왕비입니다. 폐하, 초왕비로 구실을 만들어 보시면 어떻습니까?”

백 승상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사라진 판국에 어디서 찾는단 말입니까. 그리 좋은 방안이 아닌 듯합니다.”

“찾느냐 못 찾느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초왕의 반응부터 살피려 합니다. 혹시 압니까? 예상이 적중할지.”

두 사람 사이에서 고민하던 황제는 백 귀비의 말에 점점 마음이 기울었다. 호랑이를 죽인 것도 모자라 진상품을 가로채고, 황숙에게 폭력을 가하고 마마를 죽인 일 모두 초왕비와 연관되지 않았던가.

“귀비의 말대로 하겠소. 초왕에게 태자가 중요한지, 초왕비가 중요한지 짐이 한번 봐야겠소.”

백 승상이 황제를 만류하려 했다.

“하오나, 폐하…….”

황제가 성가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더는 왈가왈부하지 말게. 귀비의 말대로 할 생각이네.”

* * *

임안성 서쪽에 있는 평범한 집. 그 집의 안뜰에서 소식을 들은 태자 묵용연이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끊임없이 몰아세우면 얌전한 토끼라도 사람을 무는 법이지. 초왕이라고 다를까.”

한쪽에 서 있던 모사謀士 제갈겸유諸葛謙瑜가 의견을 더했다.

“폐하께서 초왕을 거듭 압박하셔도 초왕은 꼼짝도 하지 않겠지요. 그 인내심을 얕봐선 안 됩니다. 노부老夫의 생각에 폐하께서 계속 이리하신다면 전하를 돕는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화살을 활시위에 걸었으면, 쏘지 않으면 안 되는 법이지요.

화살이 오랫동안 활시위에만 걸려 있으면 변고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초왕비는 황제보다 저희가 먼저 찾는 좋을 듯합니다. 어쨌든 백여름의 딸이니 확보하면 쓸모가 있겠지요. 전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묵용연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켠 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초왕비를 만난 적은 없지만, 주아의 말로는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라더군. 한데 초왕비가 도망쳐도 셋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주아를 남기고 초왕비를 보냈을 때도 그 애의 마음을 보여 주려는 줄 알았지.

선생의 말도 맞아. 내 아우지만 인내심이 보통이 아니네. 나도 그 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았지. 초왕비를 확보하는 게 좋을 듯하면, 선생의 말대로 하게. 다만 초왕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유의해야 할 걸세.”

* * *

강남 지역의 봄은 빠르게 찾아왔다. 붉은 복사꽃이 피어나는 걸 시작으로, 곧 나뭇잎도 싱그러운 빛을 뽐냈다. 길가의 풀잎마저 바람과 햇빛에 흔들리며 쑥쑥 자라나니, 눈길이 닿는 곳마다 활기가 넘쳤다.

백천범은 유지로 만든 우산을 벽에 세워 두고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손씨네 아가씨가 월규가 만든 양말을 보더니 이제 우리 집에서만 사갈 거래.”

월향이 웃으며 대답했다.

“잘됐다. 앞으로 단골손님이 한 명 늘겠네.”

월규가 대뜸 찬물을 끼얹었다.

“양말 한 짝 팔아 봤자 다섯 푼밖에 못 받잖아. 공은 종일 들이는데. 이렇게 가다간 한 달 내내 몇 푼 벌지도 못하겠어. 어찌 먹고 살지 걱정이다.”

월향이 탁자 위에 놓인 붉은색 혼례복을 가리켰다.

“혼례복도 있잖아. 이거 팔면 은자 다섯 냥은 받을 거야. 여기에 신발이랑 면사포, 손수건 같은 것들도 팔면 제법 벌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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