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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91)화 (290/1,192)

제291화

묵용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그는 그날의 일을 분명히 알지 못했다. 선황의 죽음은 묵용연에 의해서였을까, 묵용한과 묵용감이 황위를 놓고 다툰 결과일까……. 하나하나 따지기 시작하면 서로의 탓만 하며 흉한 꼴을 볼 게 분명했다.

묵용감이 침묵을 지키자 묵용연이 입을 열었다.

“너도 알다시피 조정에 내 세력이 있으니 황제가 하는 일은 나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지금은 궁 안의 금군을 모두 바꾸었지. 그중 팔 할은 네 수하들이 아니더냐. 그런데도 날 돕지 않고 이대로 있을 테냐? 정녕 황제가 네 목을 베길 기다리고 있느냐?”

묵용감이 침묵 끝에 입술을 떼었다.

“폐하께서 죽음을 내리시면, 신하된 도리로 피할 수 없습니다. 저는 병권도 없으니 형님을 도우려 해도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합니다.”

묵용연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찻잔을 내던졌다.

“우둔한 놈! 그래, 미련하고 멍청한 네가 어찌 될지 지켜보겠다. 네 목이 그자 앞에 놓였을 때, 그자가 얼마나 날렵하게 내려치나 지켜볼 것이다!”

묵용감은 눈을 내리깐 채 침묵으로 답했다. 그 순간, 그는 그녀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토록 춥고 어두운 섣달그믐 밤, 그녀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 * *

백천범은 닷새 동안 쉬지 않고 이동했다. 섣달그믐에도 비싼 값에 마차를 빌려 길을 재촉했다. 어둠이 가라앉을 즈음, 그녀는 한 객잔에 들어섰다.

그녀는 최대한 빨리 성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이렇게나 멀리 떠나 온 게 처음인지라, 그녀는 이미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곳은 임안성과 큰 군을 사이에 둔 위수강渭水江(황하의 대지류) 인근의 중원中原 지역이자 제법 번화한 도시다. 다만 대부분은 가족들과 명절을 쇠었기 때문에 객잔은 한산했다. 객잔 주인은 명절을 맞아 모든 손님에게 만두를 한 그릇씩 대접했다.

백천범은 남장을 하고 두 시녀의 남동생을 가장하고 있었다. 두건을 동여맨 이마 양쪽으로 삐죽 나온 잔머리가 그녀의 대범함을 알리는 듯했다. 하얀 얼굴과 대조되어 까맣게 빛나는 눈동자에 총기가 넘쳐흘렀다.

자그마한 입으로 말을 어찌나 예쁘게 하는지, 주인장과 객잔 일꾼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귀여워했다. 그녀에게는 특별히 만두도 많이 담아 주었는데, 만두가 그릇 밖으로 흘러넘칠 지경이었다.

월규가 그녀를 놀리듯 말했다.

“주인장에게 딸밖에 없다던데 아무래도 범이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이곳에 남겨서 아들로 삼으려는 건 아니겠지?”

백천범이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도 나쁘지 않아. 어디든 정착만 할 수 있으면 되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보다야 낫지 않겠어?”

줄곧 불안해하던 월향이 슬픔에 젖은 탄식을 내뱉었다.

“황후 마마의 국상이 치러지고 있으니, 왕야께서는 우리를 찾을 겨를도 없으시겠지?”

백천범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왕야. 왕야. 왕야. 너무나 오랜만에 듣는 한마디가 그녀의 마음에 긴 메아리를 남겼다. 그녀가 꺼내지 않으니 월향과 월규도 그간 입에 담지 않았다. 스스로를 속이는 심정으로 그의 존재를 잊으려 했지만, 결국 월향이 그의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그는 아예 그녀를 찾지도 않았던 게 아닐까. 그녀가 떠난 일이 그에게는 일종의 해방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도 궁금해하지 않으며, 황보주아를 곁에 둔 채 행복을 만끽하겠지…….

다만 그 음침하고 매서운 얼굴과 깊은 두 눈망울을 떠올리면,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했어도 그녀는 그를 잘 몰랐다. 그녀에게 잘해 줄 땐 누구보다도 소중하게 대해 주었지만, 그렇지 않을 땐… 그녀를 끝이 없는 못으로 빠뜨리는 듯했다.

그녀는 별장을 나온 후에야 자신이 저지른 일로 그의 체면이 깎이리라는 걸 알았다. 어쨌든 초왕비의 신분으로 도망을 치지 않았던가. 그의 성격이라면 암암리에 사람을 보내고도 남았다. 붙잡히는 날에는 틀림없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겠지.

그래서 더더욱 멈출 수 없다. 계속 도망쳐야 한다. 아주 머나먼 땅까지 도달해서, 평생 그녀를 찾을 수 없게 만들 생각이었다.

* * *

시간은 야속하리만치 빠르게 흘러, 어느새 봄이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게 그대로였지만, 전부 다 바뀌어 있었다. 하염없이 내리는 봄비가 사람들의 마음까지 축축이 적셨다.

묵용감은 매일 조정에 나갔다. 그러나 기개가 하늘을 찌를 듯한 초왕은 이제 없었다. 지금은 다른 신하들의 웃음거리일 뿐이다. 그는 종실 친왕이라는 명분 외에는 아무런 권력도 없으니, 빈껍데기만 남은 듯했다.

황제는 매일 조정에서 우스갯소리를 던지며 그를 약 올렸다. 그는 시종일관 묵묵부답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피폐해져 있었다.

그를 내버려 두지 않는 건 백 승상도 마찬가지였다. 백 승상은 음흉한 미소를 숨기지 않으며 틈날 때마다 그의 체면을 깎아 댔다. 예전이라면 진작 가슴팍을 걷어차 버렸겠지만, 지금의 그는 익숙해진 듯 묵묵히 견뎌냈다.

결국 참지 못한 진왕이 그를 타박했다.

“형님, 이게 무슨 꼴입니까? 저들이 하는 대로 이리 끌려다니시다니요. 무엇 하러 저들의 원망을 사십니까?”

묵용감은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둘째 형님이 돌아오신 걸 알면서, 아직도 뵙고 싶지 않느냐?”

“되었습니다. 전 관여하지 않고 계속 한량으로 지낼 생각입니다. 누가 주인이 되든 저는 두 발 뻗고 누울 집만 있으면 족합니다. 형님처럼 사이에 끼어서 고초를 겪을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형님의 상황 좀 보십시오.”

묵용감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앞을 막아서야 양쪽 다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진작 계획했던 일이다. 폐하께선 둘째 형님을 압박하고, 둘째 형님은 폐하를 견제하는 상황을 만들려 했지.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확신이 서질 않는구나. 나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진왕이 짧은 탄식을 흘렸다.

“형님께서 그리 마음을 쓰셨건만, 허사가 될까 걱정입니다. 폐하께서는 점점 더 방탕한 생활을 하시지 않습니까. 한때는 백성을 사랑하는 근면 성실한 황제였는데 지금은 백여름 부녀가 뭘 하든 내버려 두십니다. 그간 외척 세력을 견제하지 않은 황조가 어디 있었습니까?

백 승상의 권력은 이미 하늘을 찌를 지경입니다. 듣자 하니 재가裁可(군왕이 직접 안건에 어새御璽를 찍고 결재하여 허가하던 일)도 그자가 도맡았다 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조정뿐만 아니라 나라 꼴이 엉망이 되지 않겠습니까!”

묵용감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어떤 일은 끝끝내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지. 다만, 황후 마마의 부탁을 저버리게 될까 봐 걱정이구나. 어쨌든 동월국의 시작과 끝은 묵용 씨이니 마음 놓거라. 나도 생각해 둔 바가 있으니 나라가 엉망이 되게 두지만은 않겠다.”

“형님의 말씀을 들으니 그나마 마음이 놓입니다.”

이마를 문지르던 진왕이 뭔가를 떠올린 듯 입술을 달싹였다. 결국 진왕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형님, 왕비 마마의 소식은요?”

묵용감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도망치는 건 왕비의 특기가 아니더냐. 저택에서도 놓치기 일쑤였는데 이렇게 넓은 땅에서는 더더욱 찾기 힘든 일이지.”

“폐하께서도 이미 소식을 접하셨겠지요. 형님, 폐하보다 먼저 왕비 마마를 찾으셔야 합니다.”

가늘게 뜬 묵용감의 두 눈이 이채를 띠었다.

“…알고 있다.”

진왕이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췄다.

“형님과 술 한 잔 기울이고 싶지만, 그 또한 쉽지 않겠지요. 오늘은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 형님.”

“그래, 가 보거라.”

묵용감은 뒷짐을 진 채 멀어지는 진왕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곧 영구가 말을 끌고 왔다. 호리호리한 자태가 꼭 곧은 대나무 같았다.

“왕야, 한 장군의 밀서입니다.”

“뭐라더냐?”

“걱정하지 말라 하십니다. 이 장군과 준비를 마쳤으니 언제든 왕야의 명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묵용감은 막 새싹이 돋아나는 길가의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소장강의 상태는 어떠하더냐?”

“완쾌하였습니다. 더는 기다리기 힘들다며 임무를 내려 달라고 합니다.”

“잘되었구나. 해 줄 일이 하나 있다. 백여름이 먼 친척 동생을 우전右殿 장군으로 등용했다. 백정웅白正雄이라는 자인데 어제 부임을 마쳤다더구나. 무능의 극치인 자를 앉혔으니 소장강에게 살펴보라고 전하거라.”

영구가 결연한 눈빛을 반짝이며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예, 소인이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왕야, 언제 움직일 예정이십니까?”

묵용감의 눈빛이 끝없는 늪에 잠기듯 침잠했다.

“운명은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법.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을 차지했으니, 그자를 끌어내리는 것도 하늘의 뜻을 따르는 일이다.”

영구가 잠시 말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왕야, 태자 전하를 그 자리에 앉히실 계획이십니까?”

“태자께서는 현자가 아니시더냐. 현자야말로 이 천하를 감당할 수 있지. 다만.”

묵용감이 불쑥 말을 끊더니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아직 마지막 단계에 이르지 않았으니,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지.”

“소인의 생각에도 폐하께서는 중임을 맡긴 어려우실 듯합니다. 태자 전하께서 지혜롭긴 하시지만, 왕야야말로 용기와 지혜를 겸비한 분이 아니십니까. 어째서…….”

“무엄하다!”

일갈과 함께 묵용감의 사나운 시선이 영구에게 내리꽂혔다.

“다시는 내 앞에서 그런 말을 지껄이지 말거라.”

“예.”

곧장 고개를 숙인 영구의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져 갔다.

* * *

백천범은 더 도망치지 않고 이곳에 남기로 했다.

강남 지역에 데려다주겠다던 묵용감의 약속은 흩어져 버렸지만, 그녀는 직접 강남을 찾아왔다. 막상 강남의 풍경을 마주하니 그녀의 마음에 결심이 섰다. 푸른 기와와 하얀 벽으로 꾸며진 집, 석판이 고르게 깔린 골목길, 초록빛을 머금은 깨끗한 강물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여기에 터를 잡을 작정이었다.

강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사람이 얼마 지나지 않아 통통한 생선을 낚아 올렸다. 울타리 밖에 핀 새빨간 홍초紅蕉는 꿀을 잔뜩 머금고 탐스러운 모습을 뽐냈다. 한 송이 꺾어 입에 넣으니 꿀보다 더 달콤한 맛이 혀를 즐겁게 했다.

계획대로라면 세 사람은 영남 지역으로 향하고 있을 터였다. 한겨울에도 홑겹만 입는다니, 얼마나 따뜻하고 살기 좋은 곳일까. 그러나 강남 지역에 발을 들이니 백천범의 마음이 바뀌었다. 이미 위수강과 난강瀾江까지 건너왔으니 임안성과는 제법 떨어져 있지 않은가.

게다가 두 달 동안 초왕비를 찾는다는 말을 전혀 듣지 못했다. 초왕은 그녀를 완벽히 포기한 모양이다.

이곳에 남기로 한 만큼, 세 사람은 진지하게 앞날을 상의했다. 가진 돈이 적진 않아도 돈만 축내며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돈을 밑천 삼아 먹고 살 방법을 궁리해야 했다.

마침내 세 사람은 돈을 합쳐 가게를 열고 장사를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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