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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90)화 (289/1,192)

제290화

한 시진 뒤, 학평관은 또다시 묵용감을 찾아와 의사를 물었다.

묵용감은 하늘을 힐끔 바라보고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아직 이르다. 더 기다리거라.”

학평관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곧 날이 어두워진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제야 음식을 먹는 셈이긴 하지만…….

한겨울의 저녁은 먹물을 흩뿌린 듯 어두운 하늘을 보여 주었다.

묵용감은 커다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별안간 들려온 인기척에 슬며시 눈을 뜬 그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천천히 자세를 바로잡은 그는 책을 내려놓고 창밖을 향해 소리쳤다.

“상을 차리거라.”

밖에서 줄곧 기다리고 있던 학평관은 반색하며 곧장 하인들에게 분부를 내렸다.

그때, 기홍은 정신을 차린 후였다. 비통한 마음을 감출 길 없었지만, 그녀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새해 전날 초왕에게 불길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불같은 성격의 녹하는 들끓는 화를 잠재울 길이 없었지만, 역시 성을 낼 수는 없으니 아리따운 얼굴에 냉담한 기운이 가득했다.

학평관은 두 시녀를 지켜보며 속으로 끙끙 앓았다. 묵용감이 고민에 빠져 있느라 그녀들의 표정을 보지 못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시녀들이 상을 차리고 따뜻한 술까지 내어놓자 묵용감이 손을 내저었다.

“오늘은 새해를 맞는 날이니 다들 앞뜰에서 식사를 하며 즐겁게 보내거라. 이곳에서 시중을 들 필요 없다.”

학평관은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소인은 남아 있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가동과 영구만 있으면 된다.”

초왕의 분부이니 하인들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학평관은 회림각의 하인들을 데리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다만 녹하는 문을 나서면서 황보주아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하인들을 내보내고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 걸까?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어린 왕비를 생각하면 그녀의 코끝이 찡해지곤 했다.

하인들이 떠나자 묵용감이 반쯤 열린 창문을 아예 활짝 열고 시원스레 말했다.

“이제 내려오십시오. 벌써 한참이나 기다렸습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지붕 위에서 검은 그림자가 훌쩍 뛰어내렸다. 그는 공중에서 몸을 틀더니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방 안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등불 옆에 선 사내는 월백색 도포를 걸치고 목에는 백여우 모피를 두르고 있었다. 까만 장발은 초록색 명주 끈으로 동여맸고, 수척한 얼굴 가운데 총기를 머금은 두 눈이 맑게 빛났다. 소박한 차림이었지만,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기품은 감출 수 없었다.

창문을 잠근 묵용감이 돌아서더니 두 손을 맞잡고 예를 갖췄다.

“둘째 형님, 오랜만입니다.”

사내, 묵용연이 웃으며 답례했다.

“셋째야, 그간 무탈하였느냐.”

조용히 앉아 있던 황보주아도 일어나 감격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태자 오라버니, 오셨습니까.”

묵용연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태자가 아닌지 오래거늘, 앞으로는 둘째 오라버니라 부르거라.”

“그리 서 계시지 말고 어서 앉으십시오.”

묵용감이 걸어와 묵용연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고초를 겪고도 살아남으신 형님께, 이 아우가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묵용연이 미소를 유지하며 술잔을 잡았다. 단번에 술잔을 비운 그가 묵용감의 잔을 채워 주었다.

“위험에 맞서 싸워 결국 부귀를 얻은 셋째에게 이 형도 한 잔 따라 주마.”

묵용감은 그저 은은한 미소로 답하며 술잔을 비웠다.

황보주아는 조금 긴장한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이며 할 말을 찾았지만, 머리가 하얗게 빈 듯했다.

다행히 나쁘지 않은 분위기가 이어졌다. 간만의 재회 앞에서 두 형제는 나눌 말이 많았다.

묵용감은 줄곧 묵용연에게 음식을 덜어 주었다.

“드셔 보십시오. 어릴 때 드시던 맛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묵용연은 그가 준 고기를 입에 넣더니 감탄을 내뱉었다.

“그때 맛과 흡사하구나. 훌륭하다. 궁정 요리사를 불렀더냐?”

“궁정 요리사는 아니지만 제 부엌 시녀의 손맛이 아주 훌륭합니다. 다른 것도 드셔 보십시오.”

“부엌 시녀의 실력이었구나.”

묵용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리도 훌륭한 솜씨를 가진 시녀를 두다니, 아우가 먹을 복이 참 많구나.”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요. 마음에 드신다면 부디 저택에서 지내십시오, 형님.”

묵용연은 미소만 머금은 채 대꾸도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두 사람은 북쪽 지역 음식부터 남쪽 지역의 음식, 궁중 요리, 백성들이 즐겨 먹는 음식까지 다양한 음식 이야기를 나누었다.

뒤이어 묵용연이 각지를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것들, 어린 시절 추억 등을 꺼냈다. 즐거운 이야기를 나눌 때는 두 사람 모두 박장대소를 하며 즐거워했다. 마치 그리운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줄곧 불안하고 당혹스러워하던 황보주아도 형제의 모습에 조금씩 마음을 놓았고, 때때로 맞장구를 치며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식사를 마칠 때쯤 들뜬 분위기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묵용감이 웃으며 권했다.

“술은 어느 정도 마셨으니 자리를 옮겨 형님께 차를 대접하겠습니다.”

묵용연은 살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보주아가 따라 일어서자 묵용감이 말했다.

“주아는 그만 쉬거라. 네게 부탁이 하나 있구나.”

그가 탁자에 놓인 보자기를 그녀에게 건넸다.

“내일 아침, 하인들이 봉투를 받으러 올 것이다. 수고스럽겠지만 나 대신 나눠 주었으면 좋겠다.”

황보주아는 보따리 안에 든 은자를 눈치챘다. 이런 일은 보통 저택의 안주인이 하는 법이다. 왕비는 없어도 후원에 측왕비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런 일을 그녀에게 맡겼다면, 그 의미는 분명했다.

황보주아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보따리를 품에 안았다.

“사소한 일에 어찌 예를 갖추십니까? 어서 가십시오. 저는 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두 사람은 그녀를 지켜보다 그녀가 방을 나서자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다만 각자의 웃음이 의미하는 바는, 본인만 알 터였다.

이내 두 사람은 옆방으로 향했다. 묵용감이 탁자에 작은 난로를 두고 은탄을 넣었다. 능숙하게 은탄을 피운 그가 주전자를 올려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형님은 영남 지역 차를 좋아하시니, 특별히 무이산武夷山의 대홍포大紅袍를 준비하였습니다. 차는 명차지만 제 다도가 부족하여 차의 맛을 그르칠까 걱정입니다.”

묵용연이 그를 빤히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내게 끓여 달라고 말하면 될 것을, 언제부터 에둘러 말하는 법을 배웠더냐?”

묵용감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도포를 걷고 의자에 앉았다.

“안 그래도 그 말이 하고 싶었습니다. 역시 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둘째 형님이십니다.”

주전자에 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묵용연은 찻잔을 뜨거운 물로 데우고 남은 물로 찻잎을 우렸다. 첫 번째 우린 차는 색이 어두워 마시지 않으므로, 찻잎만 데우고 찻물을 전부 따라내었다.

문득 그가 묵용감을 돌아보았다.

“네 말대로다. 네 곁에 있진 않았어도 네 마음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주아가 여기 왔을 때, 넌 그 애의 신분을 숨겨야 하는 걸 알면서도 저택으로 불러들였다. 이 사실을 백여름에게 알리기 위해서, 그래서 그자가 황제에게 고하도록 한 게 아니더냐?

넌 주아의 목숨을 구하려고 병권을 넘겼다지만, 사실은 주아가 군대를 일으키자고 압박할까 봐 일부러 병권을 넘겼겠지. 병권이 없으면 당장은 손쓸 방법이 없으니까. …셋째야, 내 말이 틀렸느냐?”

묵용감은 놀라지도, 부인을 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웃음을 머금을 뿐이었다.

“역시 둘째 형님을 속일 수는 없나 봅니다.”

두 번째 우린 차는 맑은 황금빛을 띠었다. 묵용연이 잔을 들고 향을 맡았다.

“오, 향이 아주 좋구나.”

그가 한 모금 들이켜 보고 흡족한 표정을 보였다.

“역시 무이산 대홍포다.”

“어렵게 구한 것입니다. 그래도 동궁東宮(태자가 거주하는 궁)에서 마시던 대홍포에 비하면 부족하지요.”

“이것도 충분히 훌륭하다.”

묵용연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모처럼 마음을 쓰지 않았느냐.”

묵용연의 하얗고 긴 손가락 아래로 난로의 불길이 넘실거렸다. 그가 가느다란 막대를 들어 불길을 흩트렸다.

“황제도 내가 돌아온 사실을 아느냐?”

“예.”

묵용감이 솔직히 털어놓았다.

“폐하께서 황후 마마의 국상을 이유로 절 궁에 가두셨습니다. 절 처리하거나 지켜보기 위함이었겠지요. 주아에게 손을 쓰실까 봐 부득이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냐. 문제 될 건 없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니, 일찍 알게 되었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지.”

굳이 감출 이유가 없었기에 묵용연도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

“내가 돌아온 이유는 너도 알 테지. 이 형을 도와주겠느냐?”

묵용감이 눈을 내리깔더니 손에 쥔 찻잔을 천천히 흔들었다.

“형님, 제게 강요하지 마십시오.”

“강요가 아니다. 그자의 성품을 아직도 모르느냐? 그때 일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고 당당히 말해 보거라. 그간 천하가 태평해 보여도 암암리에 거대한 변화가 있었다는 걸 정녕 모르겠느냐?

어째서 그자가 늘 두려움에 떨고, 너를 경계하는 줄 아느냐?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걸 그자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야, 날 도와다오. 반란을 일으키려는 게 아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과오를 바로잡고 정의를 되살리는 게 마땅하지 않느냐.

금란정에 있는 그자는 음험한 소인배에 불과하다. 천하를 기만하여 군주가 되고, 부황을 시해한 반역자란 말이다!”

“그만하십시오!”

묵용감이 낮게 소리치며 찻잔을 탁자에 힘껏 내리쳤다. 억눌려 있던 고통이 그의 목소리에 짙게 서렸다.

“그만하십시오. 형님, 제발 그만하십시오.”

“다른 이들은 널 포악한 살인자라고 하지만, 이 형은 다 안다. 넌 누구보다 마음이 여린 사람이 아니더냐. 넌 네 손으로 병권을 넘길지언정 황제에게 맞서려 하지 않고, 가족끼리 해하려 하지도 않았지. 너만의 방식으로 나와 주아를 지키려 하는 마음을 잘 안다. 그러나 네 목숨은 무사할 성싶더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목숨을 내버리는 한이 있어도 형님과 주아를 폐하의 손에 넘길 일은 없습니다.”

묵용감이 진지하고 결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형님, 방금 일은 절대로 언급하지 마십시오. 백성들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편안한 날들을 보내게 된 지 겨우 몇 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누가 터전을 잃겠습니까? 백성들입니다. 큰형님은 그릇된 일을 저질렀을지언정 늘 백성을 위하는 좋은 황제가 되려 하셨습니다.

조정에는 형님의 측근도 있으니 잘 알고 계시겠지요. 폐하께서는 어진 정치를 펼치시며 늘 근면 성실하게 정무를 돌보십니다. 나라에 근심이 생기면 밤을 지새우느라 수척해지시는 게 일상이지요. 사치를 멀리하시고 겉치레에 신경 쓰시는 일도 없이, 늘 태평성세를 위하십니다.

형님, 어좌에 앉은 사람이 누구든 우리 묵용 씨의 천하입니다. 백성들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이 나라 사직이 굳건하다면 무엇 하러 지난 일을 들춘단 말입니까?”

묵용연이 별안간 눈을 부릅뜨며 언성을 높였다.

“하면 부황의 원수를 잊으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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