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9화
그녀의 끝없는 설명에도 묵용감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 왕비는 떠났으니 마음 놓거라.”
“혹 왕비가 밖에서 함부로 떠든다면 오라버니께도 좋지 않을 텐데요.”
“그게 무슨 말이냐?”
“왕비가 입을 열지 못하게 반드시 찾으셔야 합니다.”
황보주아가 묵용감의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묵용감의 표정은 어떠한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왕비 얘긴 그만하거라. 주아야, 명절을 보내기로 했으니 그분도 저택으로 부르는 게 좋겠구나.”
순간 황보주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오라버니…….”
묵용감이 그제야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널 돌려보내고 본인은 숨어 있다니……. 형님이 날 보길 꺼리시더냐?”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직접 만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분명 날 보고 싶어 할 것이다.”
황보주아는 여전히 혼이 나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오라버니…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걸 어찌 아셨습니까?”
“그리 떠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황보주아가 얼굴을 붉히며 웅얼거렸다.
“오라버니, 일부러 오라버니를 속이려 한 게 아닙니다. 정말…….”
“나도 안다. 오랜 시일이 흘렀으니 다들 변했을 뿐이지. 나도 그때의 내가 아니듯 그분도 마찬가지일 터. 신중하게 접근하려 하지 않겠느냐. 칠석 밤, 너희의 목표는 내가 아니라 백천범이었다. 초왕비의 목숨을 노린 게야. 내 말이 틀렸느냐?”
황보주아가 얼이 빠진 채 그를 바라보다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으로도 오라버니를 속일 순 없군요. 오라버니께서 손을 쓰지 못하실까 봐 도와주시려 했을 뿐입니다. 다만 예상치 못했던 일이…….”
“내가 왕비를 죽이지 않는 건 예상에 없었느냐?”
“예. 오라버니께서 왕비를 마음에 두신 것 같았습니다. 제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오라버니께서는 계속 왕비와 행복하게 지내셨겠지요.”
묵용감이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아야, 만약 예전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너와 내가… 어찌 되었을까?”
“저는 오라버니께 시집을 가서 행복하게 살았겠지요.”
묵용감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줄곧 황보주아를 사랑했다고 믿었기에 혼인을 거부해 왔었다. 그러나 백천범을 만난 뒤, 그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황보주아에게 향한 마음은 그저 정해진 도리에 순응하는 감정이었다.
익숙해서, 어려서부터 함께했던 정으로, 자신의 처가 될 거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남들과 다르게 대해 주었다. 그는 그 다름이 사랑인 줄 알았다.
그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백천범을 만나는 일 없이, 황보주아와 혼인을 올리고 아이를 낳으며 평생을 함께했을 터. 그렇게 살아가며, 진정한 사랑이 어떤 감정인지 영원히 몰랐을 그였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아무리 평온한 얼굴을 유지해도 불길이 인 듯 절절하게 끓어오르는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 *
섣달그믐엔 날씨가 맑았다. 황후의 국상 때문에 저택에 걸려 있던 등은 전부 떼어내고 다들 소복을 갖춰 입었다. 명절의 즐거운 분위기는 다소 사그라들었지만 섣달그믐이 되니 모두의 얼굴에 은은한 기쁨이 묻어났다.
묵용감은 아침 일찍부터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학평관은 그가 왕비 때문에 괴로워하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감히 방해할 수는 없었지만… 학평관은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잠시 들어가겠다고 고했다.
묵용감이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들어오너라.”
학평관이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왕야, 오늘은 섣달그믐이니 태비 마마께는…….”
초왕과 서 태비는 사이가 그리 가깝지 않아도 예를 갖춰야 할 땐 부족함 없이 지켜왔다. 그러나 초왕비가 궁에서 고초를 겪은 뒤로 그의 화는 아직 들끓고 있었다. 모자의 거리는 예전보다 훌쩍 멀어진 듯했다.
묵용감은 차분히 공문을 정리했다. 두껍게 쌓인 군사 보고서 옆면에 붉은 봉랍 인이 넓게 이어져 있었다. 그가 보고서를 서랍에 넣고 가볍게 닫았다.
“예년처럼 해야지.”
학평관이 조심스레 물었다.
“예년처럼이라 하심은, 왕야께서 가시겠단 말씀이신지요?”
“아니다. 사람을 보내거라.”
“예. 알겠습니다.”
발걸음을 돌리려던 학평관이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왕야, 태비 마마께 전할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묵용감의 싸늘한 시선이 학평관의 전신을 훑어내렸다. 학평관은 몸을 덜덜 떨며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동월국은 섣달그믐에 점심을 거르는 풍습이 있다. 대신 한창 배고플 어린아이들은 간식으로 요기를 할 수 있었다. 신시가 되면 명절 상을 차리는데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둥근 상 위에 반찬을 둥글게 차린 뒤, 중앙에 커다란 돼지고기찜을 배치한다. 여기에 갖가지 냉채와 요리를 곁들이면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는 저녁상이 완성된다.
묵용감은 매년 섣달그믐 저녁에 서 태비를 찾아가 함께 저녁을 들곤 했다. 그러나 올해는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묵용감은 책을 한 권 들고 창가에 자리 잡았다. 시선은 책을 향했지만 한참이 지나도 책장을 넘기지 않았다. 묵용감이 말을 듣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 학평관은 다시 한번 물었다.
“왕야, 신시이옵니다. 상을 차리라 이를까요?”
그제야 묵용감이 고개를 들고 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이르다. 더 기다리거라.”
학평관은 대답을 마치고 허리를 숙여 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황보주아가 싱숭생숭한 표정으로 복도에 서 있었다. 자꾸만 입구를 바라보는 모습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학평관은 의구심이 일었다. 초왕은 평온해 보여도 뭔가에 신경이 쏠려 있었고, 황보주아도 평소의 단아한 모습과 달리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설마 누가 오기로 했단 말인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던 그는 기홍에게 재잘거리는 녹하의 목소리를 들었다.
“왠지 초조해 보이지 않아? 왕비 마마께서 돌아오실까 걱정되나 봐. 흥, 걱정해도 소용없지. 섣달그믐이니 왕야께서 분명 왕비 마마를 부르셨을 거야. 어쨌든 왕비 마마는 거리낌 없이 시골로 보내는 첩이 아니라 저택의 진짜 안주인이시잖아. 두고 봐. 이번에 오시면 절대 돌아가실 일 없을 거야.”
학평관은 저도 모르게 끼어들고 말았다.
“공연한 걱정이구먼. 왕비 마마께서는 이미 떠나셨는데, 어찌 돌아오시겠나?”
“떠났다고요?”
두 시녀는 동시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특히나 기홍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그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어르신, 제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떠나셨다니요, 어디로 떠나셨단 말입니까?”
“그걸 어찌 나에게 묻는 건가.”
학평관이 스스로의 입을 탓하며 말했다.
“이틀 전에 도망치셨다네. 나란들 어디로 가셨는지 알겠는가?”
그 순간, 충격을 이기지 못한 기홍이 그대로 땅에 쓰러졌다. 학평관이 얼른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다른 이의 손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나타난 검은 형체가 기홍을 품에 안아 들었다.
학평관은 얼떨떨하게 눈앞을 바라보았다. 기홍을 안은 사람은 영구였다. 영구의 날렵한 손놀림이야 놀랄 일이 아니지만, 냉정한 영구가 먼저 나서서 누군가를 도와준 게 의아할 따름이었다.
옆에 있던 녹하도 넋을 놓고 바라보긴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시선에 얼굴이 살짝 붉어진 영구가 차가운 목소리를 내었다.
“계속 가만히 서 계실 겁니까?”
그제야 녹하가 정신을 차리고 그를 안내했다.
“힘들겠지만 방까지 좀 옮겨 주시지요.”
영구는 기홍을 안은 채 녹하의 뒤를 따랐다. 품에 안은 여인을 슬쩍 바라본 영구의 미간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기홍은 키가 큰 여인임에도 너무나 가벼웠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밥을 먹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녀도 다른 여인들처럼 밥을 거의 먹지 않는 것이리라.
녹하는 영구가 방에 들어올 수 있게 발을 걷어 주었다. 문턱을 넘을 때 영구는 부딪치지 않도록 머리를 살짝 숙여야 했다. 고개를 내리는 순간 기홍의 몸에서 은은한 한란 향이 풍겨 왔다. 갑작스레 그의 심장이 달음박질을 쳤다. 얼굴도 조금씩 붉어지더니 금세 목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기홍을 침대에 눕힌 그는 녹하 앞이었지만 거리낌 없이 맥을 짚었다. 숨을 죽이고 맥을 짚던 그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큰 문제는 아닌 듯합니다. 깨어나거든 따뜻한 물을 먹이십시오.”
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어찌나 발걸음이 빠른지 녹하가 이불을 여며주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저 멀리 밖으로 나가 있었다. 녹하는 서둘러 문 앞으로 달려가 소리쳤다.
“고마워요.”
영구는 힐끗 돌아보더니 대꾸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녹하는 모든 게 의아했다. 녹하와 기홍은 회림각에 온 뒤로 영구와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시종일관 냉정한 태도를 보이던 그가 언제부터 저리 친절해졌단 말인가?
마침 모퉁이를 돌던 가동의 눈에 영구를 지켜보는 녹하가 보였다. 별안간 그의 심장이 꽉 죄어들었다. 설마 녹하가… 영구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달려간 그가 녹하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뭘 그렇게 봐?”
정신을 놓고 있던 녹하가 깜짝 놀라 있는 힘껏 그를 때렸다.
“놀라 죽는 줄 알았잖아!”
“섣달그믐인데 죽는다는 말을 하고 그래, 얼른 침 뱉어.”
녹하도 실없는 말을 했다는 생각에 땅에 침을 세 번 뱉었다. 막 고개를 드는데 가동이 씁쓸한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
“부인.”
녹하가 곧바로 눈을 부릅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누가 네 부인이야?”
가동은 마음이 초조해졌다. 예전에는 부인이라고 불러도 부끄러워하며 짜증스럽게 대꾸하는 게 다였다. 그러나 지금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지 않는가.
가동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녹하가 그를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막아낼 틈도 없이 끌려 들어온 가동은 금세 기분이 풀려 방긋 웃었다. 그가 슬그머니 녹하를 벽으로 이끌어 둘만의 감미로운 시간을 즐기려 했다.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리 없는 녹하가 가동의 무릎을 매섭게 걷어찼다.
“떨어져!”
그녀의 추상같은 불호령에 가동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얌전히 두 발짝 물러났다.
녹하가 때려죽일 듯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왕비 마마께서 도망치셨다는데, 알고 있었어?”
“어제 궁에서 나온 뒤에야 알았어.”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가동은 입만 살짝 벌리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이는 나라면서? 나한테는 속이는 일 절대 없다더니, 이렇게 큰일이 있어도 말을 안 해?”
가동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네가 알고 있는 줄 알았어.”
“내가 어떻게 알아!”
머리끝까지 화가 난 녹하는 당장이라도 욕을 한바탕 퍼붓고 싶었다.
“아무튼, 왕야께서는 뭐라셔? 찾으실 거래?”
가동은 문을 향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말을 꺼냈다.
“안 찾으실 거래.”
“하, 성격 나오게 하네…….”
급기야 녹하가 한숨을 거칠게 내쉬며 몸을 풀었다.
겁을 집어먹은 가동은 황급히 줄행랑을 쳤다. 녹하에게서 멀리 떨어진 후에야 그가 답답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왕야께서 안 찾으시겠다는데, 날 때려서 뭐 해. 차라리 왕야를 때려 보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