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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88)화 (287/1,192)

제288화

세찬 바람을 무릅쓰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묵용감을 뒤따랐지만, 두 호위 무사와 묵용감 사이의 거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가동이 오만상을 쓰며 외쳤다.

“왕야께서 어디로 가시는 거야?”

영구는 대꾸도 없이 내달리는 묵용감의 뒷모습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한눈을 팔다 시야에서 놓칠까 걱정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묵용감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곁을 지키며 전략이나 정변을 터득해가는 초왕을 보았다. 그가 아는 초왕은 태산이 무너져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사람이 아닌가. 그의 유일한 약점은 백천범뿐이다. 위기의 순간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던 초왕은, 그녀와 관련된 일이라면 몹시도 위태로운 사람이 되었다.

굽이지고 울퉁불퉁한 산길로 들어서자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녹색 빛이 남아 있었다. 빽빽한 나뭇가지와 잎이 달려가는 묵용감을 감춰 버렸다. 시야에 묵용감이 들어오지 않았지만 영구는 그를 놓치진 않았다. 이 적막한 산속, 말발굽이 마른 나뭇잎을 밟으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요란했으므로.

영구는 천천히 말을 세웠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현장을 감독하러 온 적 있었다. 말하긴 조금 민망했지만, 초왕의 일급 호위 무사라 할지라도 명이 내려지면 무덤 보수 같은 일도 도맡았다.

가동이 뒤늦게 도착해 말에서 내렸다. 그의 머리는 산발이었고, 옷에는 자그마한 낙엽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영구가 오도카니 서 있는 모습에 가동이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놓쳤어?”

이내 가동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여길 오시다니, 어리석은 짓을 하시려는 건 아니겠지?”

영구는 언짢음을 숨기지 않았다.

“형님의 생각이야말로 어리석지요.”

“그럼 어떡해? 여기서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잖아. 가서 찾아야지.”

“찾을 필요 없습니다. 앞쪽에 계세요.”

“그래? 그럼 멍하니 서서 뭐 해? 어서 가자.”

가동이 나서려 했지만 영구가 그를 막아세웠다.

“가지 마십시오.”

“왜?”

영구가 눈을 치떴다.

“왕야의 심기가 불편하시니, 잠시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심기가 불편한 묵용감 앞에 누가 감히 나설까? 가동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기로 했다. 속으로는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었다. 대체 왜 이곳으로 달려왔단 말인가?

“가까이 가진 않고 몰래 지켜만 볼게.”

영구도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 가동이 조심스레 몇 발짝 나아가더니 나뭇가지를 젖히고 묵용감의 모습을 찾았다.

넓게 펼쳐진 대지 한가운데에 무덤이 우뚝 솟아 있었다. 무척 크고 정성스럽게 꾸며진 무덤이다. 오석으로 만든 묘비의 검은 광택과 금빛 글자가 훌륭한 조화를 이루었다. 다만 거리가 있어 새겨진 글자를 읽을 수 없었다. 그 묘비 앞에, 묵용감이 깊은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가동이 고개를 돌려 영구에게 물었다.

“누구 무덤이길래 여기까지 오신 거야?”

“왕야의 일입니다. 자꾸 묻지 마십시오.”

가동은 영구에게 핀잔을 들어도 개의치 않고 한숨만 내쉬었다.

“왕야께서 아직 왕비 마마를 마음에 담아 두시는 것 같아. 이러실 거면 왜 왕비 마마를 보내신 거야? 황보 아가씨를 별장으로 보냈으면 더 좋았잖아?”

이렇게 눈치 없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자니 기운이 쭉 빠졌다. 영구는 동네 바보를 바라보듯 가동을 응시했다.

영구의 그 눈빛을 싫어하는 가동이 살짝 화를 냈다.

“그렇게 보지 마. 내 말이 틀렸어? 왕야께서도 왕비 마마를 좋아하셨잖아. 황보 아가씨에 대한 죄책감만 아니었어도 왕비 마마를 보내실 일이 있었겠냐? 대체 왜 스스로 불구덩이에 들어가시는 거야.”

묵용감은 무덤 앞에 놓인 제사 음식과 불에 탄 지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예상대로다. 백천범은 떠나기 전 이곳에 들러 유모에게 이별을 고했다. 예상은 적중했지만 동시에 가슴속에 바윗덩어리가 들어앉았다. 이곳을 찾아 이별을 고했다면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거나, 적어도 금방 돌아오진 않겠다는 뜻이 아닌가.

그는 무릎을 꿇고 등불에 불을 붙여 타다 남은 지전을 다시 한번 태웠다. 주황색 불꽃이 춤을 추며 지전을 집어삼키더니 곧 검은 재를 뱉어냈다. 재는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허공으로 천천히 흩어져 갔다.

이윽고 그가 무덤 앞에 주저앉았다. 이마를 몇 차례 문지르기만 하던 그는 헛웃음과 함께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왕비를 떠나보낸 저를 바보 같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왕비에게 상처를 주었으니, 제 잘못입니다. 왕비는 정말 단순명쾌한 사람입니다. 제 주변에 난잡한 일이 잦으니 절 이렇게 두고 훌훌 떠나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리도 지독한 사람으로 보였겠지요. 다 왕비를 위해서였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쥔 채 한동안 말을 삼켰다. 한참이 지난 뒤, 그가 미간을 꾹꾹 눌렀다.

“유모의 이야기를 종종 들었습니다. 지혜로운 분이시니 절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마음의 짐을 풀어놓을 곳이 여기밖에 없으니, 말이 많더라도 부디 노여워 마십시오……. 왕비는 떠났지만 저는 여기 있습니다. 새해가 되면 제사도 올리고 지전도 태워 드리겠습니다. 왕비는…….”

그가 비로소 먼 곳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제게 잡히지 않기를 바라야겠지요. 안 그랬다간…….”

끝맺지 못한 말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사실 그도 정해 둔 바가 없었다. 물론 그녀를 찾아낼 작정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먼 곳으로 떠났더라도, 반드시 그녀를 자신의 곁으로 데려와야 했다. 초왕비의 신분으로 도망을 치다니, 그의 얼굴에 얼마나 더 먹칠을 할 생각이란 말인가?

그녀를 찾아내면……. 그가 주먹을 힘껏 쥐고 이를 악물었다. 쉽게 용서할 수 없었다. 절대로.

묵용감의 안색은 제법 차분해졌다. 말을 몰고 유유히 산길을 내려오는 도중에 백천범과 함께 왔던 기억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그날은 유독 날씨도 좋았다. 두 사람은 풀밭에 앉아 간식을 먹고 차도 마셨다. 따사로운 햇볕이 감싼 그녀의 얼굴이 눈부셨다. 까만 두 눈망울이 더없이 찬란했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바보같이 웃는 모습도 그의 눈에는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누워 햇빛 아래에서 휴식을 취했다. 잠이 든 그녀의 어깨를 그가 감싸 안았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던가?

앞으로 그녀는 그의 사람이라고, 날마다 그녀를 안고 잠을 청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나중에서야 그의 생각이 너무 단순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오빠와 여동생이라는 틀 안에 그를 놓아두었으므로. 엄청난 공을 들인 끝에 겨우 그녀와의 사이를 바로잡았던 순간, 그의 심정이 어떠했던가…….

그녀와 함께 행복한 삶을 보내리라 믿었다. 그녀를 언제나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는 그가 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믿음이 깨진 건, 황보주아가 돌아왔을 때부터였다.

묵용감이 생각의 늪에 빠져 있는데 영구가 다가와 고했다.

“왕야, 소인이 별장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이미 떠났는데 가서 무엇 하느냐?”

그러나 영구는 결연한 표정을 보였다.

“왕비 마마는 왕야의 정실이십니다. 이렇게 가시면 왕야의 체통을 어찌 지키신단 말입니까? 부디 명을 내려 주십시오, 왕야. 소인이 반드시 모셔 오겠습니다.”

묵용감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굳이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 따로 가져간 것은 없는지 살펴보고 오너라. 그저 짐작만 하면 되니 속히 다녀와야 한다. 지금은 중요한 일이 있지 않느냐.”

옆을 지키던 가동은 눈만 끔벅거렸다. 왕비를 찾는 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일이 중요하단 말인가?

영구는 대답을 마치자마자 말에 올라타 별장 쪽으로 질주했다. 가동이 조심스레 묵용감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왕야, 정말… 왕비 마마를 찾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무엇 하러 찾는단 말이냐?”

가동은 백천범을 대신해 속상함을 느꼈다.

“왕비 마마께서는 상처를 받으셨겠지요. 그러니 잠시 잘못된 생각을 하셨다 해도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왕야께서…….”

백천범을 대신해 열변을 토하던 가동은 묵용감의 날카로운 눈빛 앞에서 바로 입을 다물었다.

* * *

저택에 돌아오니 황보주아가 중문까지 나와 맞이했다. 그녀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오라버니, 괜찮으십니까? 걱정되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난 괜찮다.”

말에서 내린 그는 고삐를 하인에게 넘기고 성큼성큼 안으로 향했다.

“며칠간 무탈하였느냐?”

“제가 탈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오라버니 걱정뿐입니다.”

황보주아는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

“궁에서 못 나오시는 줄 알고 몹시 걱정했습니다.”

묵용감이 그녀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어찌 그런 생각을 했더냐?”

“황제가 오라버니에게 손을 쓰려 한다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황보주아는 그와 보폭을 맞추느라 잰걸음으로 걸어야 했기에 숨을 헐떡였다.

“오라버니께서 돌아오지 않으시니 총관리인이 궁으로 사람을 보냈는데 그자의 말도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궁 문 앞에서 왕야를 기다리기만 했지요. 황제가 작정하지 않고서야 어찌 말도 못 전하게 막겠습니까?”

묵용감이 안으로 들어오자 기홍이 그의 수척한 모습을 알아차리고 얼른 따뜻한 물을 가져와 세안을 도왔다. 옆에서 녹하가 차를 올렸다.

세안을 마친 묵용감이 기홍과 녹하에게 눈짓을 보내자 두 시녀는 눈치껏 방을 나섰다.

“내일이면 섣달그믐이다. 황후 마마의 국상 중이지만, 그래도 함께 식사라도 해야지.”

“오라버니 말씀이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황보주아는 이상함을 직감했다. 백천범이 도망친 일은 학평관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기에 기홍과 녹하는 모르지만, 황보주아는 알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잘된 일이지만, 묵용감이 이토록 태연하니 의아할 수밖에.

백천범에 대한 정이 깊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엄연히 초왕비가 아닌가. 정말 도망치게 내버려 둘 생각인가? 초왕의 체면을 죄다 구긴다 해도?

“안 그래도 오라버니께서 출궁하신다는 소식에 총관리인에게 지시해 두었습니다. 내일은 명절 음식을 차려야지요. 다만… 왕비는…….”

조용히 차를 마시던 묵용감이 입을 열었다.

“왕비 몫은 준비할 필요 없다.”

“셋째 오라버니.”

그녀가 그를 넌지시 떠보았다.

“정말 떠나게 두실 생각이세요?”

“줄곧 왕비를 싫어하지 않았느냐? 떠났으니 네게는 잘된 일이지.”

“소문이 퍼지면 오라버니의 체면이…….”

그녀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코웃음을 쳤다.

“오라버니, 어쩌면 오라버니의 얼굴에 먹칠을 하려고 도망쳤을 수도 있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라버니께서는 백 씨 집안에서 버린 딸로 여기시지만 그게 아니라면요?

백여름 그 작자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딸 한 명은 황제 곁에, 한 명은 오라버니 곁에 두지 않았습니까. 천하에서 권력이 가장 막강한 두 사람이 그자의 사위입니다. 사소한 일도 그자가 가장 먼저 소식을 접할 테지요. 암암리에 수를 쓴다면 황제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지만, 오라버니가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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