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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87)화 (286/1,192)

제287화

묵용감은 개의치 않는 듯 입가에 힘을 주었다. 완고한 결심이 얼굴에 떠올랐다.

“내게 손을 대시려거든 적어도 황후 마마의 상은 치르고 하셔야지. 너희는 궁을 떠나거라. 폐하께서는 내 목숨을 원하시니 너희와는 상관없다.”

“왕야!”

영구와 가동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모았다.

“소인들은 목숨을 걸고 왕야를 지킬 것입니다. 단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겠습니다.”

묵용감이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너희가 떠나야 내게도 살길이 있다.”

영구가 다급히 그를 설득했다.

“가동을 내보내십시오. 소인은 왕야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궁 안을 지키는 자들은 전부 바뀌었지만, 금군과 순포 병영은 여전히 우리 사람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궁을 나갈 수 있습니다.”

묵용감은 자꾸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황제가 그에게 수를 쓰리라는 건 예상했지만, 불안한 느낌이 자꾸만 엄습했다. 오랜 시간 그를 지켜 준 직감이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설마 황제에게 묘책이라도 있단 말인가?

* * *

가동의 출궁도 순조롭진 않았다. 궁 문에 다다르기도 전에 금군이 가동을 막아세웠다. 황후의 상 중이니 마음대로 궁을 드나들 수 없다는 게 그자의 명분이었다.

가동은 그저 가소로웠다. 출궁하려는 자가 자신만이 아니거늘, 어째서 막아선단 말인가? 가동이 요패를 꺼내 금군에게 내밀었다.

“눈 크게 뜨고 잘 보아라. 난 초왕을 모시는 일급 호위 무사다.”

그들은 요패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흉악한 표정으로 협박했다.

“당신이 누구든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오. 계속 억지를 부리면 험한 꼴을 볼 각오를 해 두시오.”

가동은 하는 수 없이 묵용감에게 돌아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영구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그자들이 막아선다고 나가지도 못한단 말입니까? 방법을 찾으셨어야지요!”

가동도 언짢긴 마찬가지였다.

“무슨 방법? 그놈들 머리 위로 날아서 도망이라도 치라고?”

영구가 맞받아치려 하자 묵용감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날 이곳에 묶어 두신 이유가 주아를 치시려는 게 아닐까 싶구나.”

그가 미간을 좁히며 고민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안 되겠다. 폐하를 찾아뵈어야겠어.”

발걸음을 옮기는 묵용감의 뒤에서 가동이 작게 투덜거렸다.

“차라리 잡아가시면 좋겠네.”

황제가 황보주아를 잡아가면 자연스레 왕비가 돌아올 수 있다. 적어도 가동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승덕전에서는 백 승상이 황제를 간곡히 타이르고 있었다.

“폐하, 기회를 놓치시면 아니 되옵니다. 다신 오지 않을 기회가 아닙니까. 주저하지 마시옵소서.”

머리가 아팠던 황제는 있는 힘껏 관자놀이를 눌렀다.

“황후의 상 중이 아닌가. 지금 손을 쓰는 것은 좋지 않다.”

“황후 마마의 국상을 초왕이 도맡고 있으니 허점을 찾아 죄를 물으면 됩니다. 궁 안에 병사들을 배치해 두었으니 이번만큼은 초왕이라도 빠져나가기 힘듭니다.”

황제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병권을 넘겼다지만, 군에서의 위상은 여전히 높을 걸세. 지금 치면…….”

“폐하, 잊으셨습니까? 그간 암암리에 군 세력을 끌어모으지 않았습니까? 초왕이 병권을 가지고 있을 때도 필적이 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병권마저 넘겼으니, 이빨 빠진 호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폐하께서는 초왕이 없어도 태평성세를 이루실 군주이시옵니다.”

백 승상이 청할 때마다 황제는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입을 떼려는데 고승해가 황급히 들어와 고했다.

“폐하, 초왕이 뵙기를 청합니다.”

“무엇 하러 찾아왔단 말이냐.”

황제가 성가신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돌아가라 이르거라.”

“폐하께서 마음의 안정을 찾으시느라 출입을 불허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초왕이 지금 만나지 않으시면 후회하실 거라고 말하는 통에…….”

황제는 어안이 벙벙했다. 묵용감은 함부로 남을 위협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이 정도로 말했다면 사달을 낼 게 뻔했다.

“…들라 하라.”

황제가 고개를 돌려 백 승상에게 말했다.

“들어가서 잠시 몸을 피하게.”

백 승상은 내키지 않았지만,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순 없었다. 결국 그는 안쪽 방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곧 묵용감이 들어와 황제에게 예를 갖췄다. 그가 천천히 황제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황제는 모든 걸 통찰하는 듯한 그의 눈빛이 불쾌하면서도 두려웠다.

“앉거라.”

황제가 입을 열었다.

“어인 일로 짐을 찾아왔느냐?”

묵용감은 물끄러미 황제를 응시했다. 그날 밤, 황제는 혼이 완전히 나가지 않았던가. 오늘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머리에 옥관을 쓰고 용포를 갖춰 입은 그는 어딘가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다만 눈 밑에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가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한 그의 상태를 알려 주었다.

“은혜를 내려주십사 청을 드리러 왔습니다. 이 아우, 입궁한 지 사흘이 되었습니다. 내일은 섣달그믐입니다. 황후 마마의 국상이 치러지고 있지만, 저택에 제가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남아 있습니다.

황후 마마께서도 입관을 마치셨으니 불사佛事가 끝나면 장지에 안치할 일만 남았습니다. 하여 잠시 휴가를 청하려 하옵니다. 오늘 저택에 돌아가 일을 처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황제는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들이켠 뒤,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하면 도리에 어긋나지 않느냐. 모든 일을 너에게 맡겼는데 도중에 그만두겠다니. 짐이 널 믿고 맡겼으니, 너도 짐의 신임을 저버리지 말아야지.”

“폐하께서 베푸신 은혜를 저버리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다만 중요한 일을 처리해야 하기에 청을 드릴 뿐입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필요치 않은 혼란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황제가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다.

“무슨 일이길래 네가 꼭 돌아가야 하느냐?”

대전에는 황제와 묵용감뿐이었지만, 묵용감은 굳이 황제의 앞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유는…….”

몸을 숨긴 백 승상이 귀를 쫑긋 세웠지만, 정작 중요한 부분은 듣지 못했다. 묵용감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묵용감이 말을 마치자 적막이 내려앉았다. 어쩐지 기이한 분위기다. 백 승상의 마음이 절로 조급해졌다. 황제가 그를 보내 줄까 싶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침내 황제가 입을 열었다.

“다녀오거라. 다만, 황후의 일도 네가 처리해야 하니 일을 마친 뒤엔 속히 돌아와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마치는 대로 돌아오겠습니다.”

백 승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나, 추측대로 되지 않았는가! 그는 황급히 밖으로 나왔지만 초왕은 이미 돌아간 후였다.

“폐하. 어찌 그런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백 승상이 조급함을 못 이기고 소리쳤다.

“이대로 돌려보내면 큰 후환이 됩니다. 폐하…….”

황제는 들은 척도 않고 고승해를 부르더니 초왕을 궁 밖으로 보내라는 명을 내렸다.

옆에서 백 승상이 쉴 새 없이 떠들었다.

“폐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궁 문을 봉쇄하시고 초왕의 목을…….”

“무엄하다!”

결국 황제의 호통이 터져나왔다.

“천자의 말을 그리 쉽게 번복하라는 것이냐?”

“하오나 폐하, 신이 오랜 기간 공들이지 않았습니까. 모두 폐하를 위한 일입니다. 초왕은 폐하께 위협일 뿐입니다. 더욱이 폐하를 안중에도 두지 않지요. 백성들도 폐하보다 초왕을 더 잘 알 정도입니다…….”

“승상의 뜻은 짐도 다 안다.”

황제가 짜증스럽게 탄식을 내뱉었다. 또다시 머리가 욱신거렸다. 관자놀이를 눌러도 통증이 가시지 않아. 황제는 소태감에게 백 귀비를 불러오라고 분부했다.

“귀비의 손놀림이 좋으니 눌러 달라고 해야겠다. 귀비가 하면 통증이 가시는 듯하구나.”

평소라면 황제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자신의 딸을 칭찬할 백 승상이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초왕을 다시 묶어놔야 한다.

“폐하, 초왕은 대체 무슨 일이 있다고 하였습니까? 어째서 그의 말에 동의하셨습니까?”

황제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가 묵묵히 이마만 문지르다 입을 열었다.

“승상, 지금은 초왕을 죽일 수 없네.”

“어째서입니까?”

백 승상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폐하, 차마 손을 쓰실 수 없사옵니까? 폐하의 수족이라고는 하나, 역대 황조를 떠올려 보십시오. 황권을 위해서, 안정된 천하를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큰일을 하시는 천자이십니다. 어질고 너그러운 마음이 손발을 묶으면 아니 될 일이옵니다.”

황제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멍하니 문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야 황제가 백 승상에게 물었다.

“승상, 하늘이 바뀔 것 같은가?”

백 승상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그가 고개를 들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화창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공손히 대답했다.

“신이 보기에는 바뀌지 않을 듯합니다.”

황제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짐도 바뀌지 않길 바라네.”

* * *

묵용감은 가동과 영구를 데리고 궁을 나섰다. 저 멀리 앙상한 나무 아래, 목이 빠지게 궁 문만 바라보는 학평관이 보였다.

불현듯 스치는 불길함에 묵용감이 발걸음을 서둘렀다. 학평관이 직접 여기까지 왔다면 큰일이 난 게 분명했다.

학평관도 그를 발견하고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울상이 되어 고했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 사라지셨습니다!”

그의 말이 묵용감의 머리를 세차게 내리쳤다. 묵용감은 멍하니 학평관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줄곧 황제가 황보주아를 처리하고자 자신을 궁에 가둔 줄 알았다. 한데 왕비라니, 그녀는 농촌 별장에서 잘 지내고 있지 않았던가?

그가 학평관의 옷깃을 잡아채며 으르렁거렸다.

“대체 어찌 된 일이냐?”

학평관은 여득귀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전했다. 축 늘어뜨린 그의 두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묵용감은 망연자실한 채 먼 길가를 바라보았다.

“제 발로 떠난 게 확실하더냐?”

“예. 옷가지도 다 가져가셨고 두 시녀도 데려가셨습니다.”

시녀까지 데려갔다면 충동적으로 떠난 게 아니다. 예전부터 떠날 계획을 세웠으리라. 어쩌면 저택을 나갈 때부터 그녀의 머릿속엔 작별이 움텄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리석게도,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낌새를 느꼈다면 절대 그녀를 보내지 않았을 텐데.

그는 허탈하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한 대가로 모진 반격이 돌아왔다. 본래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아픈 법이다. 그녀는 떠나 버리면 그만이지만, 그는 한 줄기 빛도 허락되지 않는 나락에 남겨져야 했다.

영구가 서둘러 말을 끌고 오더니 묵용감에게 고했다.

“왕야, 제가 별장에 가 보겠습니다.”

묵용감은 혼이 나간 듯 영구를 바라보았다.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영구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왕야부터 저택에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묵용감은 잠시 먼 곳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옆모습이었다. 별안간 그가 말에 올라타더니 채찍을 내리치며 달려 나갔다.

영구와 가동도 서둘러 말에 올랐다. 세 사람은 미친 듯이 내달렸지만 방향은 별장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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