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6화
묵용감이 가마에서 내리자, 입구에 서 있던 소태감이 예를 갖췄다.
“왕야를 뵈옵니다.”
“고 태감은?”
때마침 고승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예를 갖추며 인사를 올렸다.
“왕야, 노고가 많으십니다.”
묵용감이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폐하께서는 어떠하신가? 뭐라도 드셨는가?”
고승해가 붉게 충혈된 눈을 끔벅이며 한숨을 쉬었다.
“마마께서 떠나셨으니 입맛이 있으시겠습니까. 어젯밤부터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으셨습니다. 계속 멍하니 넋을 놓고만 계십니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아플 정도입니다.”
“내가 말씀드려 보겠네.”
묵용감이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옆을 지키던 금군 두 명이 칼을 뽑아 들고 그를 막아섰다.
“아니 되옵니다, 왕야!”
고승해가 서둘러 설명을 늘어놓았다.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어명을 내리셨습니다. 황명을 거스르시면 아니 되옵니다.”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렸다.
“계속 드시지 않다간 큰일이 날 걸세.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종사는 어찌한단 말인가?”
“폐하께 시간을 드리는 게 어떠신지요, 왕야. 폐하께서는 어질고 현명한 분이시니 분명 이겨내시리라 믿사옵니다.”
이런 일에는 묵용감도 위로할 길이 없다. 묵용감은 하는 수 없이 두 금군의 얼굴을 훑어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들은 폐하의 사람이니 폐하를 잘 보필하여 옥체가 상하시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네. 모레 아침, 사람을 보내 입관을 할 테니 그리 알게.”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야. 소인들이 폐하를 잘 보필하겠습니다.”
* * *
교외의 농촌 별장 사람들이 하나둘 잠에서 깨어났다. 해가 중천에 뜬지 오래였다. 어젯밤 너무 많이 먹고 마신 탓에 죄다 깊이 잠들고 말았다. 때마침 근처 산의 사찰에서 조종이 울리자 별장 사람들은 화들짝 놀랐다. 사찰에서 조종이 울린다면, 국상國喪을 뜻한다. 대체 어느 고귀한 이가 세상을 떠났단 말인가?
물론 국상은 좋은 일이 아니다. 초왕은 황실 종친이고 이곳은 그의 별장인 만큼 당장 걸맞은 조처가 필요했다.
여득귀가 급히 왕비를 찾았다. 정원에 도착하니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는 별생각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처소가 유난히 조용한 데다 두 시녀도 보이지 않았다. 왕비의 침대는 장막으로 꽁꽁 감싸여 있으므로 그는 장막 밖에서 조심히 왕비를 불렀다. 한참이 지나도 대답이 없었다.
감히 장막을 걷을 수 없던 여득귀는 시녀들이 묵는 방으로 향했다. 그곳도 조용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침대의 장막을 걷었다. 누군가 누워 있는 듯 이불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알 수 없는 불안한 예감에 급히 이불을 걷었다. 역시나 이불 속에는 옷더미가 둥글게 뭉쳐 있었다.
그는 황급히 왕비의 침소로 돌아갔다. 장막을 걷고 이불을 젖히니 역시나 뭉쳐진 옷가지가 놓여 있었다. 여득귀는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다 몇 발짝 물러났다. 옷을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한겨울임에도 여득귀의 이마는 땀으로 흥건했다. 그는 사람들을 모아 왕비를 찾아 나섰지만, 숲에서 찾아낸 거라곤 아직도 술이 덜 깬 두 명의 친위병뿐이었다.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다른 두 명의 친위병도 방에서 곯아떨어져 있었다.
아무리 우둔한 사람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초왕비가 도망쳤다!
초조함이 극에 달한 여득귀가 마차를 타고 초왕의 저택으로 향했다.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초왕이 그의 목을 베고도 남았다. 그러나 숨길 수 있는 일이던가. 목이 베이더라도 초왕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막상 저택에 도착하니, 초왕은 황후의 초상으로 궁에 불려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연신 옷을 잡아뜯던 여득귀는 학평관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학평관은 멍하니 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왕비가 도망을 치다니, 학평관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까?
* * *
더는 버티기가 힘들었다. 깊은 늪에 빠진 듯 아무리 발버둥 쳐도 진득한 슬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머지않아 끈끈한 감정이 목까지 차오를 것만 같았다. 황제는 홀로 남겨진 아이처럼 겁을 먹었고, 그저 막막했다.
황후는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기이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떠올라 있었다. 그녀가 그를 비웃고 있다. 그의 무능함과 유약함을 비웃고 있었다!
그는 늘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무능했으니, 황후에게 모든 걸 의존해 왔다. 겉으로는 누구보다 존귀한 황제였지만 그 안에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나약함이 웅크리고 있었다.
반면 황후는 늘 침착하고 냉정했다. 신중하고 꼼꼼하기까지 했다. 그가 두려움에 빠질 때면 황후는 그를 대신해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었다. 어찌 그녀를 흠모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황후는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유일한 안식처였다. 황후의 곁에 있으면 두려움도, 나약함도 잊을 수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자신이 빈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자신은 황후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아닐까. 황제의 존엄마저도 처절하게 짓밟히는 듯해, 그의 불만은 점점 마음을 좀먹었다.
그는 황후에게 반박하고 싶었고, 그녀의 의견에 반기를 들려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의 생각이 옳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묵용감이 그의 호랑이를 죽였을 때, 황후는 참으라는 말만 건넸다. 묵용감이 진상품을 가로채도 황후는 사소한 일이라고 했다. 묵용감이 그의 앞에서 백 승상을 걷어찼어도 황후는 초왕의 공로를 생각해 개입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묵용감이 황숙을 때렸을 때는? 황후는 예왕이 원인을 제공했다며 초왕의 편을 들었다. 묵용감이 궁에 묵겠다고 하니 황후는 동의했고, 궁에서 사람을 죽였어도 이유가 있을 거라 하지 않던가.
이 모든 일 앞에서 그는 황후에게 반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수년간 몸에 밴 습관은 그를 벙어리로 만들었다. 매번 화를 억누르고 혀끝에 물린 말을 목구멍 뒤로 넘겼지만, 그녀와 묵용감의 밀회를 목격하는 순간 참았던 분노가 단번에 폭발했다. 분노를 터트리고 나니 홀가분함도 느껴졌다. 마침내 황후의 약점을 쥔 것만 같았다.
묵용감과 황후에 대한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할 때, 그는 근원을 찾지도, 유언비어를 막지도 않았다. 그저 사태가 더욱더 불거지기만을 기다렸다. 그와 황후의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도록, 유언비어를 도구로 삼으려 했다.
황제인 그가 여인에게 의존하는 게 아니라, 황후가 그를 의지하길 바랐다.
그가 손을 뗀 동안 많은 것이 조금씩 변해 갔다. 그와 묵용감의 사이, 그와 황후의 사이…….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왔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낡은 관습에 얽매였고, 너무 오랜 시간 억압받았다. 그는 두 사람을 억압할 기회를 간절하게 원했다. 마침내 기회가 왔으니, 뜻을 견고히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는 백 귀비에게서 자존감과 정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늘 그를 존경하고 치켜올려 주었다. 백 귀비는 그의 밑에서 요염하게 꽃을 피웠고, 그가 한 번도 다다르지 못한 경지에 도달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거리낌 없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며 새로운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즐거울수록 공허함 또한 그의 안에서 자라났다. 심장에 구멍이 뚫린 기분이었다. 그 구멍은 날마다 커져 그를 참을 수 없는 무기력함으로 인도했다. 구멍을 메우고 싶었기에, 그는 기진맥진할 정도로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그런데도 구멍이 채워지기는커녕 공허함만이 그의 곁에 남았다.
황후가 피를 토하던 날, 그녀의 선홍빛 피가 그의 눈을 고통스럽게 찔러 댔다. 그 순간, 그는 지독하게 두려워졌다. 그녀가 정말 그의 곁을 떠난다면 그는 완전히 고립될 것만 같았다. 의지할 사람도 없이, 군주의 길을 홀로 걷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녀의 곁을 지켰다.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그녀를 보살폈지만, 그녀의 명은 자꾸만 깎여나갔다. 결국 그녀는 그의 품에서 영원한 잠에 빠졌다.
이틀간 그는 홀로 황후의 곁을 지켰다. 머릿속이 텅 비었다가 혼란스럽기를 반복했다. 숨 막힐 듯한 적막함이 그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 이대로는 버틸 수 없었다. 이곳을 떠나야 한다. 이 음침하고 쓸쓸한 궁을 떠나야만 한다!
그는 한밤중에 봉명궁을 뛰쳐나왔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경을 외는 소리가 들려 왔다. 누군가 저승에서 자신을 부르는 것만 같았다.
그는 비틀거리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저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백 귀비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서둘러 황제를 맞이하러 나갔다. 그녀가 문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황제는 그녀의 침소에 서 있었다. 그는 겁에 질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서 있는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귀비, 나 좀 도와주시오. 귀비가 날 좀 도와주시오.”
백 귀비는 적잖이 놀랐지만 이내 입꼬리를 올리고 어여쁜 미소를 지었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폐하. 당연히 폐하를 도와 드려야지요.”
그녀가 허리춤을 감싼 요대를 풀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매끈한 옷자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자, 도홍색 윗옷과 새하얀 피부가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의 곁에 도달한 그녀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받쳤다. 살짝 치켜든 새끼손가락이 무심결에 그의 코끝을 스쳤다.
황제의 창백한 얼굴에 조금씩 붉은 기운이 돌았다. 흐리멍덩한 눈망울에도 서서히 빛이 돌기 시작했다. 마침내 교태를 부리는 그녀의 얼굴이 그의 눈에 오롯이 담겼다.
그는 말없이 눈앞의 여인을 들쳐 안고 침대로 향했다.
장생전은 불경 소리와 슬픔에 겨운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서복궁은 아양을 떠는 여인의 목소리와 거친 숨 소리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황제는 흉포하기 짝이 없었다. 사냥감을 잡아먹으려는 들짐승처럼 그는 굶주림을 달래고자 했다. 그는 피로함도 잊고 멈추지 않았다. 어슴푸레한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는 남은 힘을 다 써버린 듯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짙은 상실감이 그의 등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 * *
황후의 시신이 마침내 관에 놓였다. 황제는 사흘간 그녀 곁을 지키겠다는 말과는 달리, 어젯밤 그녀의 곁을 떠났다. 묵용감은 시종일관 평정을 유지하며 규율에 걸맞게 모든 일을 지휘해나갔다.
그때, 영구가 급히 곁으로 뛰어오더니 목소리를 낮춰 고했다.
“왕야, 역시 왕야의 예상대로였습니다. 궁 안의 사람들이 모두 바뀌었습니다.”
“소장강은 찾았느냐?”
영구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소인의 생각에는, 가망이 없을 듯합니다.”
“대략 몇 명이나 되느냐?”
“표면적으로는 평상시와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곳곳에 숨어 있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소인도 모르겠습니다.”
“가동은?”
영구가 힐끔 곁눈질을 했다.
“오고 있습니다.”
곧 묵용감에게 다가온 가동이 역시나 목소리를 낮춰 조용히 고했다.
“상황이 이상합니다. 방금 승덕전 주변을 살펴봤는데 잠복한 자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왕야, 서두르셔야 합니다. 모든 게 함정으로 보입니다. 왕야께 황후 마마의 장례를 맡기신 일도 왕야를 입궁시키려는 핑계…….”
“이번 기회에 폐하께서 본왕을 제거하려 하신단 말이냐?”
“소인이 감히 판단할 수 없사오니, 왕야께서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