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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84)화 (283/1,192)

제284화

조정의 모든 신하가 넋을 잃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사방이 숨 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해졌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신하들은 문관 무관을 막론하고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묵용감의 팔뚝을 잡고 말리거나 그의 손가락을 떼내려 했고, 백 승상의 몸을 부둥켜안기까지 했다. 조정은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왕야, 노여움을 푸시고 손 놓으십시오. 이러다 숨이 막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왕야, 이곳은 금란정입니다. 소문이 퍼지면 어찌 감당하시려고 이러십니까…….”

“왕야, 폐하의 옥안에 먹칠을 하는 일이옵니다!”

“왕야…….”

다들 침을 튀겨가며 묵용감을 말리는 탓에 그는 결국 손을 놓았다. 그러나 온몸에 서린 포악한 기운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그를 말리던 신하들이 덜덜 떨며 뒷걸음질 쳤다.

땅에 내던져진 백여름은 부축을 받아 문관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들썩거려 숨을 쉬기도 쉽지 않았다. 목덜미에는 검붉은 자국이 띠처럼 둘려 있었다. 저승 문턱을 밟고 오기라도 한 듯 그가 눈을 부릅떴다.

예전에는 황제 앞에서 발로 걷어차 체면을 짓밟더니, 이번에는 문무백관들 앞에서 죽이려 들었다. 초왕의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단 말인가?

백여름의 눈에 초왕은 미치광이 같은 면이 있었지만, 병권을 잃고 성격이 더 포악해진 듯했다. 그래, 더 잘된 일이다. 초왕이 이렇게 나올수록 죽음만 앞당기는 셈이니.

웅성거리는 신하들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두 원수는 멀찌감치 떨어져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유달리 충혈된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았고, 다른 한 사람은 냉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눈에 핏발을 세우던 백 승상은 흠칫 놀라며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 * *

농촌 별장이 이렇게 떠들썩한 건 처음이다. 저녁놀이 질 무렵, 넓은 빈터에 장작불이 훨훨 타올랐다. 벽돌로 쌓아 올린 아궁이에 커다란 솥이 걸렸고, 그 안에서 통통한 꿩이 펄펄 끓으며 김을 피워 올렸다. 맛있는 냄새가 사람들의 코끝을 스치며 입맛을 자극했다. 노병들은 전쟁 중 행군하던 기억을 떠올리고 향수에 젖어들었다.

그때도 야외 군영에서 불을 때고 음식을 만들어 끼니를 때웠다. 고된 시간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감격스럽고 귀중한 날들이었다. 그중 몇몇 전우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이 자리는 백천범이 제안으로 열렸다. 그녀가 말을 꺼내자마자 노병들은 뜨겁게 환호하며 찬성했고, 여득귀만 에둘러 불만을 드러내었다. 날이 이렇게나 추운데 굳이 밖에서 요리를 해 먹겠다니!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왕비다.

불만이 있어도 여득귀는 주인의 분부에 따라야 했다. 결국 별장의 모든 이들이 한데 모여 야외에서 작은 연회를 열었다. 사내들은 불을 때 음식을 만들고 여인들이 옆에서 거들었다. 기다란 상을 펴고 불 주변에 둘러앉으니 그리 춥지 않았다.

고량주를 담은 단지가 상에 올랐고 옆에는 커다란 사발이 준비됐다. 고량주를 마시고 싶은 사람이 직접 떠먹는 식이다. 또 다른 장작불에는 물 주전자가 걸려 있었다. 따뜻한 차와 좋은 술은 겨울 음식상에 필수였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더니 금세 주변이 어두워졌다. 거세게 타오르는 장작불 때문인지 술을 마셔서인지 다들 벌겋게 물든 얼굴로 활짝 웃었다. 맛있는 음식과 술이 들어가자 하나둘씩 연로하신 부모님이나 사모했던 여인, 슬펐던 일이나 기뻤던 일 등을 털어놓았다.

어떤 이는 노래를 부르고 어떤 이는 취기가 올라 칼 솜씨를 뽐냈다. 떠들썩하게 웃고 떠들다 보니 꼭 예전으로 돌아가 명절을 보내는 듯했다.

* * *

왁자지껄한 농촌 별장과는 달리 초왕의 저택은 고요하게 어둠에 잠겨들었다.

창문 앞에 선 기홍은 희미한 조각달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왕비 마마께서는 잘 지내시나 모르겠네.”

탁자 앞에 앉아 신발에 수를 놓던 녹하의 손이 우뚝 멎었다. 그녀가 바늘 끝을 두피에 긁으며 대답했다.

“곧 새해니까 같이 식사라도 할 겸 데려오시지 않을까?”

“왕비 마마가 떠나신 뒤로 왕야께서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못 봤어. 말수도 줄어드셨고.”

“누가 아니래. 왕비 마마가 계실 땐 늘 즐거워하셨잖아. 그 음흉한 게 들어온 뒤로 왕야께서 옛날처럼 변해 버리셨어.”

녹하가 결국 바늘을 내려놓고 기홍을 바라보았다.

“아니면 왕야께 청을 드려보자. 적어도 왕비 마마가 저택에서 명절을 보낼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이야. 어때?”

기홍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인기척에 귀기울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누가 온 거지?”

녹하가 살금살금 문 앞으로 걸어가 발을 걷고 바깥을 살폈다.

“학평관 어르신이야. 누가 뒤따라오는데… 궁에서 온 사람 같아.”

기홍이 의아한 듯 눈을 깜박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왜 사람을 보냈지? 급한 일이라도 있나?”

그때, 녹하가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급한 일인 것 같아. 왕야께서 공공을 따라가셨어.”

* * *

문 앞으로 걸어가던 묵용감이 별안간 고개를 돌려 학평관을 바라보았다. 학평관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왕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택은 소인이 최선을 다해 관리하겠습니다.”

묵용감의 얼굴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견고한 성처럼 단단히 얼굴을 굳힌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애를 잘 돌봐주거라.”

학평관은 대답을 올린 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묵용감의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았다. 그가 몸을 돌려세우자 가여운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는 황보주아가 보였다.

“아가씨, 너무 늦었습니다. 그만 들어가 쉬시지요.”

황보주아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궁으로 불려가시니, 정말 걱정입니다.”

“폐하께서는 늘 왕야를 신임하셨습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입궁하라 명하셨다면 무언가 의논한 일이 생겼을 테지요.”

“황후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오라버니가 태의도 아니고, 무엇 하러 이 시간에 부른단 말입니까?”

학평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황보주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괜찮으니 그만 물러가세요.”

“시중을 들 시녀들을 부를까요?”

“아닙니다.”

황보주아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덕꾸러기 신세가 아닙니까. 몇 년 동안 떠돌며 지냈으니 제 몸은 직접 건사할 수 있습니다.”

학평관은 눈치껏 허리를 숙이고 앞뜰로 돌아갔다.

복도에 서 있던 황보주아는 정원에 핀 매화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가 연못 주위를 맴돌더니 다시 화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내 그녀는 복도를 따라 처소 뒤편으로 향했다. 주변은 먹물을 칠한 듯 어두웠고 머리 위의 조각달만이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녀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한 그녀가 하늘을 바라보며 ‘구구’ 소리를 냈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그녀의 손에 가뿐히 내려앉았다.

그녀는 비둘기 다리에 묶인 종이 뭉치를 풀어내고 비둘기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다시 하늘로 들어 올렸다. 비둘기는 곧장 날개를 펼치고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황보주아는 서둘러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창문을 꼭 잠그고 등불 아래에서 종이를 펼쳤다. 단 두 글자만 적혀 있었다. 「후폐后斃」.

황후가 사망했다.

멍하니 두 글자를 바라보던 그녀는 등갓을 열고 종이를 불씨에 대었다. 불길은 혀를 날름거리며 종이를 완전히 태워 버렸다.

묵용감을 궁으로 부른 이유는 황후의 죽음 때문이었다.

황후가 죽었으니 황제가 어떻게 나올까? 묵용감을 죽이고 그녀를 죽이러 올 수도 있다.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사람을 전부 제거하는 게, 군왕이 할 일이 아니던가.

* * *

두 명의 친위병은 월향과 월규가 들고 있는 술 사발을 바라보며 어쩔 줄을 몰랐다.

“왕비 마마, 소인들은 당직을 서야 해서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한 잔만 더 하십시오. 여기까지 들고 온 제 체면을 생각해 주시지요.”

백천범은 뜨거운 김을 내뿜는 꿩고기를 슬쩍 내밀었다.

“이렇게 추운 날에는 술로 몸을 덥혀야 한다고요. 날이 밝으려면 한참 남았는데 얼마나 고생이 많아요.”

“정말 안 됩니다, 마마. 마실 수 없습니다.”

“알겠어요. 저도 곤란하게 하지 않을게요. 하다못해 꿩고기라도 드세요.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요. 특별히 시장까지 나가서 사 왔으니까 다들 꼭 맛봐야 해요. 다른 두 분도 같이 먹었어요. 이제 두 병사님 몫만 남았으니까 따뜻할 때 드세요.”

“어서 드십시오.”

월규가 재촉하듯 거들었다.

“왕비 마마의 호의를 자꾸 거절하시면 정말로 마마의 체면을 구기시는 겁니다.”

두 친위병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사실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 온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당직 근무를 서다 보면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는 게 예삿일이지만, 그들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려 초왕비가 그들을 직접 챙겨 주다니!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인 만큼, 두 사람은 그녀의 마음씨에 크게 감동했다.

바르고 우직했던 두 친위병은 결국 그릇을 받아 들고 고기를 맛보았다.

“맛있죠?”

“맛있습니다!”

“많이 드세요.”

백천범이 술 단지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술은 안 드시겠다고 하니 버리는 게 좋겠어요.”

그녀는 월향과 월규에게 술을 버리라고 분부했다.

한 친위병이 본능적으로 두 시녀를 막아섰다.

“버리면 낭비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가 다른 친위병을 바라보며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우리가 마시는 게 어때? 한 사발 정도는 괜찮잖아.”

꿩 요리가 맛있긴 해도 술이 없으니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다. 다른 친위병도 향기로운 술 내음에 마른침을 연신 삼켰다.

“왕비 마마의 마음을 저버릴 수는 없으니 마셔야지, 암.”

백천범은 직접 그들에게 술을 쥐여 주며 환하게 웃었다.

“마셔요. 한 사발 정도는 괜찮아요.”

* * *

궁에 들어선 묵용감은 곧장 봉명궁으로 향했다. 차갑게 굳은 얼굴에서 눈망울만이 어둡게 번득였다.

유복이 엄숙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눈빛에 가득한 슬픔이 그의 심경을 말하고 있었다. 그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왕야,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묵용감은 고개를 끄덕이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웅장한 전당을 거대한 기둥이 떠받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마주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불빛마저도 희미했다. 끝없이 황량한 들판을 홀로 걷는 듯한 기분에 슬픔이 차올랐다.

그도 알고 있었다. 언젠가 마주할 날이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오다니. 하염없이 원망스러웠다. 만백성의 존경을 받던 황후가, 그들의 국모가 추운 겨울밤 조용히 떠났다. 고작 며칠 뒤면 새해였지만, 결국 버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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