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3화
가게를 나선 그녀는 자신을 찾아 헤매는 노병들을 발견했다. 월규와 월향을 데리고 인파 속으로 몸을 숨겼던 그녀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다 샀어요?”
그녀가 또 보이지 않아 마음을 졸이던 노병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왕비의 모습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 노병이 웃으며 손에 든 꿩을 흔들어 보였다.
“보십시오. 살도 많고 아주 싱싱한 놈입니다. 돌아가서 맛있게 요리해 드리겠습니다.”
“와, 정말 예뻐요!”
백천범이 꿩을 바라보며 기뻐했다.
“꿩 깃으로 제기 하나만 만들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갖고 싶은 게 있으시면 말씀만 하십시오. 소인이 전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다 샀으면 그만 돌아가요. 빨리 가서 꿩 요리도 하고 월향이 만든 요리도 배 터질 때까지 먹자고요.”
시원시원한 대답에 노병들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예전에는 왕야와 함께 먹고 마셨는데 이렇게 왕비 마마와 식사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소인들이 큰 복을 받았나 봅니다.”
“그 반대예요.”
백천범이 진지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저야말로 복 받은 거죠. 여러분은 다들 굉장한 영웅이잖아요!”
노병들은 조금 쑥스러워졌다.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탓에 다들 몸에 크고 작은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몇몇은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간 초왕을 제외하면 그들에게 신경을 써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그들을 똑바로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을 영웅이라고 불러 주는 초왕비의 모습에 노병들은 가슴이 벅차올랐고, 왕비를 향한 존경심이 솟구쳤다.
마부가 마을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백천범은 길가에 즐비한 마차 가게와 역관을 훑어보다 노병들에게 물었다.
“지금은 사람이 많지만, 명절이 되면 조금 한산해지겠네요?”
“그렇지요.”
한 노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고향으로 돌아가 명절을 보내니까요. 돈을 아끼려는 이들은 꼬박 삼십 일 동안 마차를 타기도 합니다. 예약만 하면 되니까요.”
“날이 추우니까 북쪽으로 가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죠?”
“예. 별로 없습니다. 남쪽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지요. 부호들은 남쪽에 별장을 지어 놓고 겨울마다 그곳에서 새해를 맞이합니다.”
“남쪽은 안 추운가요?”
“강남은 춥습니다. 영남嶺南(광동, 광서 지역 일대) 지역이 춥지 않지요. 한겨울에도 홑겹 옷만 입으면 너끈합니다.”
“정말 좋겠네요.”
백천범이 자신의 솜옷을 흔들어 보였다.
“제 옷 좀 보세요. 뚱뚱한 게 공처럼 굴러가도 될 정도라니까요.”
장난스러운 그녀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제멋대로이긴 해도 그녀의 진실한 모습에 모두가 마음을 열었다. 그녀는 왕비라고 콧대 높게 거들먹거리는 법도 없었다. 꼭 어린 친여동생 같았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왕비를 위해 노병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 영남 지역에 가려면 어디에서 어떻게 가야 하는지, 어느 가게의 마부가 괜찮은지, 어느 가게의 가격이 합리적인지 등을 자세히 알려 주었다.
백천범과 노병들은 신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월규와 월향은 줄곧 침묵을 지켰다. 이따금 왕비를 바라보는 두 시녀의 눈빛엔 의문이 가득했다. 백천범은 왜 청자를 팔아 버렸을까? 급히 돈을 쓸 데가 있는 걸까?
두 시녀는 별장에 돌아와서야 백천범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월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그 병은 왜 파셨습니까? 팔기 전에 말씀이라도 해 주셨어야지요.”
천범이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조용히 해.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안 된단 말이야.”
월향 역시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왕비 마마, 혹여 왕야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이러십니까? 그래서 왕야의 물건을 파신 거예요?”
백천범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조급하게 굴지 마. 어차피 돌아와서 너희한테 말해 주려고 했어.”
서둘러 창문을 닫은 그녀는 품에서 은표 다섯 장을 꺼내 탁자에 올려 두었다. 그녀가 월규에게 오백 냥을 꺼내라고 분부했다.
“총 오천오백 냥이야.”
그녀가 천 냥짜리 은표 두 장을 월규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똑같이 은표 두 장을 월향의 앞에 두었다.
“이건 너희 거고, 나머진 내 거야.”
두 시녀가 질겁하며 물러났다. 월향이 서둘러 은표를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왕비 마마, 소인들을 까무러치게 만드실 작정이십니까? 저는 필요 없습니다.”
“저도 필요 없습니다.”
월규가 월향보다는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이 돈을 왜 저희에게 나눠 주시려 하십니까?”
“왜냐면…….”
백천범이 잠시 눈을 내리깔더니 뜸을 들였다. 이내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곧 떠나려고.”
월규가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떠나시다니요, 갑자기 어디로 떠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쉿!”
백천범이 검지를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댔다.
“작게 좀 얘기해. 이럴 줄 알았으면 너희에게 말 안 했을 텐데.”
“안 해 주셨다면 저희를 죽이는 것과 다름없는 일입니다.”
“나도 알아. 내가 도망치면 왕야께서 너희를 가만 안 두시겠지. 그러니까 돈을 나눠서 각자 도망치자. 너희 생각은 어때?”
“어떻긴요?”
월규가 화를 못 이겨 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마마께서는 저희를 버리고 떠나실 생각이셨습니까?”
“나는 너희가 걱정돼서 그런 거지. 너희는 부모님이 계시잖아. 형제자매도 있을 테니 나와는 처지가 달라. 아버지는 날 버리다시피 하셨으니깐. 예전부터 도망쳐 나오고 싶었는데 지금이 좋은 기회잖아.”
월향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시울을 붉혔다.
“왕비 마마, 왕야께 조금도 미련이 없으십니까?”
백천범이 동그란 얼굴에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왕야께서 날 원치 않으시는데, 내가 왜 미련을 가져? 원래부터 황보주아만 기다리시던 분이잖아. 그토록 바라던 여인이 돌아왔으니 혼사를 치르시겠지. 그 사이에 내가 뭐 하러 끼어들어?”
월규도 묵용감에게 불만이 쌓여 있던 참이다. 예전에는 초왕을 신처럼 여겼지만 이번 일을 겪고 나니 그를 경멸할 수밖에 없었다. 황보주아와 초왕이 예전에 무슨 사이였든, 지금은 초왕이라는 사람이 몰인정한 소인배로 느껴졌다!
“소인도 마마께서 속상하시다는 거 잘 압니다. 정말 떠나시겠다면 소인도 함께 가겠습니다.”
“말도 안 돼. 넌 부모님이 계시잖아.”
“왕비 마마, 생각해 보십시오. 마마께서 떠나신다고 저희가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제 발로 무덤에 걸어 들어가는 일이지요. 왕야께 잡히면 저희는 죽은 목숨입니다! 집에 돌아가지 않으면 가족들도 이 일을 모를 테니 왕야께서도 손을 쓸 수 없으시겠죠.”
“월규 말이 맞습니다. 마마께서 떠나시겠다면 저희도 함께 떠나겠습니다.”
“날 따라와서 뭐 하게. 나가면 난 초왕비가 아니야. 너희도 힘든 날들을 보내야 하는데?”
“마마를 따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정말 같이 가겠다고?”
“예.”
월향과 월규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래도 약속해 줄 게 있어. 나가면 우린 더는 주인과 노비 사이가 아니야. 난 체구가 작으니까 사내아이 분장을 할 거야. 너흰 날 남동생이라고 생각해. 여인들만 다니는 걸 알면 나쁜 사람들이 노릴 테니.”
월규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예, 좋습니다. 마마께서는 천으로 몸을 동여매지 않아도 들키지 않겠지요.”
월규는 백천범의 귓가를 살피기 시작했다.
“귀를 뚫은 흔적만 없었어도 더 그럴싸했을 텐데요.”
담이 작고 신중한 편인 월향은 모든 면을 꼼꼼하게 살폈다.
“사내아이 분장을 하는 건 좋지만 옷은 어디에서 구한단 말입니까? 이곳에는 마마와 체구가 비슷한 사람도 없는걸요.”
백천범이 상자를 뒤적거리더니 보따리를 풀어헤쳤다.
“하인 분장을 하고 왕야를 따라갔을 때 입었던 거야. 계속 가지고 있다가 이번에 가져왔지.”
월규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마마, 그렇게나 일찍 계획하셨습니까?”
백천범은 부인하지도 않고 옷을 잘 개어 두었다.
“원상 언니처럼 되고 싶진 않아. 날 은애하지도 않는 사내만 바라보며 살기는 싫어.”
월향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인 생각에 왕야께서는 아직 왕비 마마를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다만 황보 아가씨 때문에…….”
“날 좋아했다 해도 황보주아가 돌아오기 전의 일이야. 황보주아가 돌아오고 모든 게 달라졌잖아? 난 첩을 들이는 사람한테 시집가기 싫었으니까 차라리 잘됐어. 두 사람은 두 사람의 삶을 살고, 난 내 삶을 살면 돼. 언젠간 왕야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겠지.”
잠시 침묵을 지키던 월규가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 저희가 붙잡힌다면 왕야께서 내버려 두지 않으실 텐데요.”
“나도 알아. 왕비가 도망쳤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겠지. 아니면 서로 흩어져서 도망치자. 한 번에 붙잡히는 일 없게.”
월규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 말은 이왕 도망치려면 빈틈없는 계획을 세우자는 뜻입니다. 절대 붙잡히지 않도록 말입니다.”
“다 생각해 둔 게 있으니 걱정하지 마. 며칠 동안 돌아다니면서 이 주변 지리는 다 익혔어. 일단 이렇게 하는 거야.”
그녀가 월향과 월규에게 귀를 가까이 대라며 손짓했다.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점점 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 * *
며칠 동안 황제는 조정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대신들은 매일 같은 시간에 조정에 나와야 했다. 문관들과 무관들이 금란정에서 자리를 지켰다. 그들은 서로 인사를 나눈 뒤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모기가 떼를 지어 돌아다니는 듯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과묵했던 묵용감은 가장 앞자리에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그때 누군가 그를 향해 걸어왔다. 머리에 백옥관을 쓴 쉰 살 정도의 사내는 유독 흰 피부를 지녔다. 제법 멀쑥하게 갖춰 입은 그가 묵용감에게 미소를 지었다.
“왕야, 요즘 저택이 평탄치 않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묵용감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태도만큼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신경 끄시오!”
“아주 좋습니다. 아직도 기세등등하시다니요.”
백여름이 머금은 웃음이 점점 더 진해졌다.
“병권을 잃으셨다 들었습니다. 대체 어디에서 이런 패기가 나오는 건지 모르겠군요.”
“병권은 없어도 승상을 죽이는 건 본왕에게 식은 죽 먹기지.”
“그렇다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왕야께서 소관을 죽이시는지, 그전에 자멸하실지 지켜봐야겠군요.”
묵용감이 싸늘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경고하는데, 밤에는 되도록 나다니지 마시오.”
“걱정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백여름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천범이를 농촌에 보내셨다지요. 무슨 연유로 그리하셨습니까? 갖고 놀다 질리니 버리시는 겁니까? 저희 백씨 가문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별안간 몸이 공중으로 휙 떠올랐다. 묵용감이 백여름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그대로 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