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2화
초왕의 농촌 별장은 규모도 크고 건물도 여러 채였지만, 거주하는 사람이 몇 없었다. 겨울이라 농사를 짓지 않으니 대부분의 일꾼은 명절을 쇠러 고향으로 돌아갔다. 남아서 별장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딸린 식솔들이 많은 몇몇 관리에 불과했다.
초왕과 함께 전장을 누비던 노병들도 몇 명 남아 있었다. 그들은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데다 돌아갈 집이 없어 이곳에서 지냈다. 그들은 이곳의 일을 조금씩 도우면서 먹고 자는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백천범은 유달리 붙임성이 좋아 노병들과 금세 친해졌다. 그녀는 그들이 전쟁터에서 겪었던 일과 전국 각지의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 게 즐거웠고, 노병들 역시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려 주는 게 좋았다.
노병들은 웃음이 많고 성품이 따뜻한 백천범을 좋아했다. 한편으로 그들은 이렇게 좋은 아내를 왜 이곳으로 보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초왕에게는 사랑받지 못해도 그들에게는 환영받는 왕비가 아닌가. 무술을 연마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 노병들은 특별히 여인들이 지니기 좋은 작은 칼과 가벼우면서도 정교한 새총을 선물했다.
선물을 받은 백천범은 뛸 듯이 기뻐했다. 무기는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게다가 노병들이 준 칼과 새총은 그녀가 쓰던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심심했던 그녀는 나뭇가지에 걸린 마른 대추를 향해 새총을 쐈다. 그러다 의도치 않게 참새를 잡아 버리자, 그녀가 신이 나서 손뼉을 쳤다.
“두 마리만 더 잡으면 꼬치구이를 먹을 수 있겠어요!”
옆에 서 있던 노병이 말했다.
“이리 자그마한 참새를 무슨 맛으로 드십니까? 마침 내일이 장날이니, 유가진劉家鎭에 가서 꿩을 사다 드리겠습니다. 버섯과 꿩을 함께 푹 고면 그야말로 일품이지요.”
“너무 좋죠. 말만 들어도 침이 고이는걸요. 꿩 요리는 저도 먹어 봤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유가진이 어디예요? 저도 데려가 주세요.”
“유가진은 이곳에서 멀지 않습니다. 그리 큰 마을은 아니지만 임안성과 전국 각지를 잇는 교통의 요지이지요. 몇 년 동안 나라가 평온하니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는 장사꾼들이 많아졌습니다.
다들 유가진에 들러 요기를 하며 잠시 쉬어가곤 합니다. 역참, 객잔, 주막이 수도 없이 많으니까요. 매달 초닷새, 보름, 스물 닷샛날마다 장이 열리는데 내일이 새해 전 마지막 장날입니다. 거리 전체에 물건을 가득 펼쳐 놓고 장사를 해서 없는 게 없지요.
꿩뿐만 아니라 노루 고기, 사슴 고기, 고기란 고기는 다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함께 가시지요. 갖고 싶으신 게 있으시거든 말씀만 하십시오. 뭐든 사 드리겠습니다.”
떠들썩한 광경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백천범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곧장 총관리인 여득귀에게 달려갔다.
여득귀도 왕비의 외출을 승낙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튿날이 되자 그는 돈까지 챙겨 주었다. 게다가 그녀를 수행할 노병들을 몇 명 더 붙여 주었다.
월규와 월향도 백천범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장 구경은 누구나 좋아하는 일이다. 마차에 탄 세 사람은 담소를 나누며 기대에 부풀었다. 왕비를 수행하는 일행들은 말을 타고 마차 뒤를 따랐다.
백천범은 이따금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물었다. 활기가 넘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지체 높은 여인이 아니라 집안 식구를 데리고 가는 듯했다.
제법 이른 시간에 출발했지만, 벌써부터 인파가 몰려드는 탓에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마부가 채찍을 내리치며 말에게 호통을 치는 소리만 이어졌다.
결국 백천범이 창문 발을 걷어 올렸다.
“죄송하지만, 마차 좀 세워 주세요. 사람이 너무 많으니 내려서 걸어가는 게 좋겠어요. 여기서 기다리시면 물건을 사고 돌아올게요.”
결국 마부는 왕비가 내릴 수 있도록 마차를 세웠다. 다른 사람들도 마방馬房에 말을 맡기고 백천범을 따라나섰다.
월규는 이렇게 큰 금액을 몸에 지니는 게 처음인지라 허리가 저절로 꼿꼿해졌다. 반면, 월향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월규의 손을 꼭 붙잡았다. 혹여 도둑이 월규를 넘볼까 봐 걱정하는 티가 역력했다.
백천범만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보이는 노점상마다 쪼르르 달려갔다.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며 구경했지만, 정작 사는 물건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여인의 물건을 파는 골목이라 노병들이 지루할까 걱정된 백천범은 사냥한 들짐승을 파는 곳으로 가 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들은 쉽게 떠나지 않았다. 붐비는 인파 속에서 그녀를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 따로 없었다.
노병들이 완고하게 나오자 백천범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신이 나서 미꾸라지처럼 인파 속을 요리조리 파고들었다. 그녀를 뒤따르던 노병들은 내내 그녀를 주시했지만, 순식간에 그녀를 놓치기 일쑤였다. 그들이 까치발을 들고 그녀를 찾으면 백천범이 그들 앞에 불쑥 나타났다. 그들은 이 조마조마한 숨바꼭질이 몇 번이나 이어졌다.
노병들은 들짐승과 담배, 칠통漆桶(옻을 담는 통) 등 각자 필요한 물건을 샀다. 그들이 물건을 사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백천범은 한 골동품 가게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월규와 월향도 서둘러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월규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마마, 이곳은 어찌 들어오셨습니까?”
월향이 목소리를 낮췄다.
“여 관리인이 돈을 주긴 했어도, 여기 있는 물건을 사려면 한참 모자랍니다.”
백천범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고개를 저으며 빙그레 웃기만 했다.
가게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점원이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백천범이 대뜸 본론을 꺼냈다.
“청자 좀 보려고 하는데요.”
계산대 앞에 서 있던 주인장이 그녀의 행색을 훑어보았다. 어린 계집아이가 청자를 찾으니 의아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도 장사꾼이다. 얼른 표정을 고친 주인장이 유약이 발린 자기를 들고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가씨, 이건 어떠신지요. 정통 청자입니다. 이 빛깔을 보십시오. 정말 파랗지 않습니까? 균형이 잘 잡혀서 모양도 일품이지요.”
백천범이 자기를 받아들고 자세히 살피다 물었다.
“이건 얼마예요?”
“고급 청자인지라 값이 조금 나갑니다. 시중에 나온 청자는 수가 적어 아주 귀하게 취급하지요. 이런 물건은 최소 천 냥은 주셔야 합니다.”
백천범이 자기를 돌려주며 말했다.
“초록빛이 많이 도는 게 그리 좋은 빛깔이 아닌걸요.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죠? 빙렬도 거의 없는데 이런 자기가 천 냥씩이나 한다고요?”
눈이 휘둥그레진 주인장이 그녀를 유심히 살피더니 서둘러 대꾸했다.
“아이고, 이렇게나 안목이 뛰어나시다니! 소인이 몰라뵈었습니다. 아가씨 말씀이 맞습니다. 이 자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답니다.”
그가 실없이 웃어 보였다.
“품질도 보통입니다. 아가씨의 안목이 높으시니 소인이 비싸게 받을 수는 없지요. 백 냥만 주십시오.”
그러나 백천범은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이건 별로입니다. 여기서 가장 좋은 청자를 보여 주십시오.”
깜짝 놀란 월규와 월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린 왕비가 대체 언제부터 골동품에 관심이 생겼을까. 토끼만 볼 줄 알았던 그녀가 이런 데 조예가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알겠습니다.”
주인장이 눈을 반짝였다. 값비싼 자기를 보여 달라고 하니, 물건을 살 의지가 있는 사람이 분명하다. 방금 알게 되긴 했어도, 어린 계집이 보통이 아니다.
안에서 목이 긴 병을 가져온 그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운을 떼었다.
“아가씨, 이것은 어떠십니까? 제법 오래된 청자입니다. 이 빙렬을 보십시오. 마치 얼음 표면처럼 눈꽃 모양으로 균열이 생겼습니다. 맑고 깨끗한 게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건 얼마죠?”
“물건을 잘 보시지 않습니까, 최소 오천 냥은 주셔야 합니다.”
월향과 월규의 입이 떡 벌어졌다. 오천 냥이라니! 그들이 가진 돈이라곤 오백 냥뿐이다…….
월향이 서둘러 백천범의 소매를 끌었다. 백천범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짓더니 주인장에게 말했다.
“저한테 더 좋은 물건이 있다면 오천 냥에 사시겠어요?”
주인장이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더 좋은 게 있으시다고요?”
백천범은 잠시 몸을 돌려 웃옷 안에서 정교한 편병扁甁(자라 모양의 납작하고 둥근 병)을 꺼냈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주인장에게 병을 건넸다.
“저것보다 좋은지 한번 보세요.”
주인장은 점원에게 불을 켜라고 분부했다. 그가 불빛 아래에서 병을 꼼꼼하게 살폈다.
백천범은 재빨리 말을 늘어놓았다.
“이 색 좀 보세요. 아주 훌륭하죠? 너무 파랗지도 않고, 너무 초록빛만 도는 것도 아니에요. 자색 빛도 섞이지 않아 호수처럼 맑은 푸른색이지요. 게다가 이 빙렬은 어떻고요. 하나같이 균등한 데다 질감도 매끈하니 최고급 자기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분명 최고급 자기다. 수십 년간 골동품만 봐온 주인장의 눈에도 흡족했다. 이런 물건을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물건인지 의심스러웠다.
“아가씨의 물건인지요?”
“네. 저희 집안 대대로 내려온 가보예요.”
백천범이 미간을 찌푸리며 탄식했다.
“저희 선조께서 대부호셨거든요. 아쉽게도 가세가 점점 기울었지만요. 아버지께서 술과 도박, 기생에 빠지셔서 돈이 되는 것들은 죄다 팔아 치우셨어요. 어머니께서 제 혼수로 남겨두신 거였는데… 곧 명절이잖아요. 집이 워낙 어려우니까 어쩔 수 없이…….”
옆에 있던 월규가 서둘러 맞장구를 쳤다.
“아가씨, 마님께서 혼수로 주신 거잖아요. 파시면 안 됩니다.”
“맞습니다.”
월향이 초조한 얼굴로 거들었다.
“파시면 안 됩니다. 차라리 외숙부 어르신께 돈을 좀 빌리시는 게…….”
“싫어. 외숙모가 얼마나 속물인데. 찾아가도 좋은 소리 못 들을 게 뻔해. 외숙부만 중간에서 난처하시겠지. 고작 병 하나잖아. 팔아 버리면 그만이야. 우선 명절이라도 잘 보내야지. 그 뒤에 다시 생각해 보자.”
주인장은 예쁘게 차려입은 그녀의 행색이 대갓집 아가씨처럼 보이는 데다 꼭 팔겠다는 말에 슬쩍 값을 낮춰 불렀다.
“아가씨, 물건이 정말 좋습니다. 그래도 아가씨께서 파시는 것과 제가 파는 것은 값이 다른 법이지요. 이건 많이 쳐도 삼천 냥밖에 못 드립니다. 그 이상은 저도 곤란합니다.”
“그럼 됐어요.”
백천범이 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 병은 팔천에서 만 냥은 받을 수 있을 텐데요? 오천도 이미 크게 밑지는 거예요. 차라리 다른 집으로 가야겠어요.”
주인장이 황급히 병을 감싸 쥐었다.
“왜 그리 조급하십니까? 물건을 사고팔 땐 본래 흥정을 하는 법이지요. 아가씨께서는 얼마를 원하십니까?”
“오천이요. 그 밑으로는 안 돼요.”
백천범이 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제 혼수잖아요.”
그 말이 맞다. 그가 사들여 다른 이에게 판다면 팔천에서 만 냥은 너끈히 받을 수 있다. 제 발로 굴러들어온 복을 마다하는 건 멍청한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물건도 볼 줄 아는 데다 값도 크게 올리지 않으니, 제법 합리적인 사람이 아닌가. 얼굴까지 귀여운 그녀의 모습에 주인장은 눈 딱 감고 흔쾌히 수락했다.
“좋습니다. 오천에 사겠습니다.”
두 사람 모두에게 기쁜 거래였다. 주인장은 귀하디 귀한 최고급 청자를 구할 수 있었고 백천범은 은표銀票(은으로 바꿀 수 있는 옛날 지폐) 다섯 장을 얻었다. 그녀는 지폐를 곱게 접어 품에 넣은 후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주인장은 어느새 굽실거리며 그녀를 배웅했다.
“아가씨, 또 좋은 걸 팔고 싶으시거든 이 가게로 와 주십시오.”
백천범이 시원스레 웃으며 호언장담했다.
“그럼요. 주인장이 이리 시원시원하니 저도 주인장에게 팔고 싶어요. 돌아가서 또 팔 만한 게 있거든 다시 찾아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