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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81)화 (280/1,192)

제281화

황보주아는 수원상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호숫가를 향해 걸어갔다. 수원상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야 추문이 힘껏 콧방귀를 뀌었다.

“참나, 죄신의 딸 주제에 어찌 저리 거만한지!”

황보주아의 모습이 나무 뒤로 사라지자 수원상이 물었다.

“폐하께서는 황보주아가 돌아온 걸 아시고도 어찌 붙잡지 않으신단 말이냐?”

추문이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

“왕야께서 손을 쓰셨겠지요!”

수원상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황보 일가를 몰살하신 이상, 왕야께서 손을 쓰셔도 쉽지 않았을 게야. 아무리 물고기가 그물을 빠져나갔다 해도 인정사정없이 잡아들여야 하는 법이지. 난 정말 모르겠구나. 왕야께서 폐하를 어찌 설득하셨단 말이냐? 어쩌면 무언가를 담보로 황보주아의 목숨을 지키셨을지도 모른다.”

추문이 눈동자를 굴리다 말했다.

“마마, 예삿일이 아닌 듯합니다. 대감마님께 서신을 보내는 게 어떨까요?”

수원상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직접 가 보는 게 좋겠다. 아버지께서 어찌 생각하시는지 들어 봐야겠어.”

* * *

황제는 조정에 나오는 대신 남서방으로 관료들을 불러 의견을 나누었다. 묵용감은 황제의 부름을 받지 못했기에 일찌감치 저택으로 돌아왔다.

막 아침을 먹은 황보주아는 그가 이른 시간에 돌아오자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

“셋째 오라버니, 오늘은 어찌 빨리 돌아오셨습니까?”

묵용감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오늘 조정에 나오지 않으셨다.”

“왜요?”

고개를 저은 묵용감이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황후 마마께서 편찮으시다더구나. 폐하께서도 근심이 크실 테니 정무에 집중하기 어려우시겠지.”

황보주아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큰일을 하는 분이 연정이 지나치면 좋지 않은 법이지요. 그러고 보면 황후도 참 대단합니다. 그간 황후의 도움이 없었다면 황제도…….”

묵용감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조정 신하도 아닌데 아는 게 많구나.”

황보주아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해명하기 시작했다.

“황제와 황후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조금 알고 있었습니다. 태자 오라버니도 황후가 여인임을 안타까워하셨지요. 사내였다면 조정의 관리가 되어 천하를 다스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거라면서요.”

묵용감이 조용히 탄식했다.

“좋은 사람은 복이 많다고 하니, 황수께서 이번 겨울을 잘 이겨 내시길 바랄 뿐이다.”

“황후가 이렇게 된 이유는 과로 때문이겠지요. 누구든 황제의 곁에 있으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주아야.”

“오라버니, 저보다 오라버니께서 황제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황제는 태자 오라버니와 제 가족을 죽였습니다. 그 사악한 야욕은…….”

“주아야!”

묵용감이 더욱더 힘주어 말했다.

“말하지 않았더냐. 그 말은 꺼내지 말거라.”

“아뇨, 그래도 해야겠습니다.”

그가 화났다는 건 황보주아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한들 두렵지 않았다.

“묵용한은 비열한 소인배입니다. 선한 척해도 속은 음흉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지요. 그해 일은 분명 그자가…….”

“뭐라 하였느냐!”

별안간 묵용감이 손을 들어 올리며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깜짝 놀란 황보주아는 속으로 부들부들 떨었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한껏 치켜들었다.

“때리십시오. 절 때려죽이지 않는 이상, 입을 다물 일은 없을 겁니다.”

그녀를 무섭게 노려보던 묵용감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렸다.

“주아야. 폐하께서 네 털끝 하나 건드리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다. 그러나 네가 폐하를 위협한다면 이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다. 폐하와 너는 내 가족이다. 어째서 그리 목숨을 걸고 달려드느냐?”

“오라버니, 제발 정신 좀 차리십시오. 황제가 가족이라니요, 황제도 오라버니를 가족으로 여긴답니까? 오라버니께 적이 많다는 걸 알면서도 병권을 빼앗지 않았습니까. 오라버니를 사지로 몰아넣는 게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되었다. 그만하거라!”

묵용감은 겨우 억누른 화가 다시 치솟자 서둘러 그녀의 곁을 떠났다.

황보주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불끈 쥐었던 주먹을 천천히 풀었다. 두려웠다. 너무나 두려웠지만 그를 몰아세워야 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그를 몰아세워야만 했으므로. 황제 쪽에서도 그를 압박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자’는 황제가 병권을 가져가면 절대 묵용감을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녀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 * *

이튿날이 되어도 조회는 열리지 않았다. 고승해가 몇몇 신하의 이름을 부르며 남서방에서 황제를 알현할 것을 알렸다. 묵용감의 이름은 없었다. 예상했던 일인 만큼, 묵용감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오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며칠간 보지 못했던 진왕이 불쑥 튀어나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셋째 형님.”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 묵용감이 빙그레 웃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더니, 또 기방에서 살고 있느냐?”

평소라면 장난스럽게 맞받아쳤을 진왕이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형님, 호부를 폐하께 넘기셨다면서요?”

묵용감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참으로 어리석으십니다.”

진왕이 급히 말을 이었다.

“어찌 호부를 넘기셨습니까? 그건 형님을 지켜 주는 호신부護身符입니다!”

“주아에게 목숨을 빚졌으니 호부로 그 애의 목숨을 살리는 수밖에. 그래도 문제 될 일은 없다.”

진왕은 속이 터지는지 막말을 던졌다.

“문제 될 게 없긴 개뿔이나요! 이틀 동안 폐하께서 형님을 남서방으로 부르시긴 했습니까? 신하들은 하나같이 세상 물정에 밝습니다. 형님을 대하는 폐하의 태도만 봐도 눈치채고 남지요! 그간 폐하 때문에 형님께서 얼마나 많은 원한을 사셨습니까?

이렇게 물러나시면 그자들이 형님을 가만두지 않을 테지요. 그중에서도 앞장설 사람은 단연 백여름입니다. 폐하의 총애를 받는 백 귀비를 등에 업지 않았습니까. 예전에는 신중해 보이더니 지금은 저 안하무인을 보십시오. 정말 웃기지도 않은 인간입니다.”

묵용감이 먼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난 그저 황수가 걱정이다. 이번 겨울을 넘기지 못하시면 상황이 더 어려워지겠지.”

“…저도 걱정입니다.”

진왕의 얼굴에 더욱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래도 형님이 더 걱정입니다.”

“내 걱정은 할 필요 없다. 폐하께서는 날 신경 쓸 여력도 없으시니.”

머쓱해진 진왕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황보주아에게 특별한 점이라도 발견하셨습니까?”

“역시 복수를 하러 돌아왔더구나. 이제는 내게 병권이 없으니 날 아무리 몰아세워도 방법이 없다는 걸 잘 알겠지.”

진왕이 놀란 어조로 물었다.

“제가 아는 황보주아는 연약한 성격이었는데… 형님을 몰아세운다니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변하는 법이지. 그렇게 큰일을 겪었으니 변하는 게 당연하다.”

그의 뇌리에 순간 자그마한 얼굴과 까만 눈동자가 스쳐 지나갔다. 세상에 영원불변한 사람이 있다면, 오직 그녀이리라.

“그 말씀은 틀린 듯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은 어떤 일을 겪어도 초심을 잃지 않거든요.”

묵용감이 흥미를 보였다.

“그런 사람도 있느냐?”

진왕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럼요. 형님께서 말씀하셨던 분입니다. 초왕비요. 구렁텅이 같은 백 승상 집에서 자랐으면서도 천진난만함을 잃지 않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도 진왕이 백천범을 말하리라 예상했다. 다만 그동안 누구도 그녀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기에 그저 진왕이 하는 말을 더 듣고 싶었다. 그녀를 머나먼 농촌 별장에 보냈지만,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에 있든 생기발랄하게 잘 지낼 테니.

두 형제는 천천히 궁 문을 향해 걸어갔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지만, 분명 누군가가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당분간 급한 일이 없거든 되도록 날 찾지 말거라.”

진왕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폐하께서도 제가 형님과 친하게 지낸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상황이 달라지면 모든 게 달라지는 법이지. 형님께서 날 지키진 못하시더라도 넌 지키실 수 있을 것이다.”

“형님!”

진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부라렸다.

“뭘 그리 놀라느냐? 농 좀 한 것 가지고. 궁 밖으로 나가면 네 갈 길 가거라. 따라오지 말고.”

진왕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 따라가고 싶은 줄 아십니까?”

그가 성큼성큼 앞서가더니 곧장 가마에 올라탔다.

묵용감은 말에 올라탄 뒤 고삐를 움켜쥐고 질주했다. 영구와 가동도 서둘러 뒤쫓았다.

묵용감의 말은 저택이 아니라 성 외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궁문을 나선 그는 줄곧 서쪽으로 향했다. 비가 온 후라 땅은 진흙투성이였다. 세 사람이 탄 말은 한동안 요란하게 흙탕물을 튀기며 달려갔다.

묵용감은 높은 언덕 위에 올라가더니 말 고삐를 놓았다. 언덕 아래로 드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논밭과 산, 하천, 그리고 숲속의 집도 보였다.

그는 말 위에 앉아 멀리 처마 끝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가동은 그제야 이곳이 어디인지 깨닫고 영구에게 눈짓했다. 영구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가동이 입을 열었다.

“왕야, 왕비 마마가 보고 싶으신 것이군요. 잠시 들러 보십시오. 이렇게 코앞인데…….”

묵용감은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가동은 온몸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묵용감은 곧바로 말을 돌려세우고는 왔던 길로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행동에 영문을 알 수 없게 된 가동이 영구를 바라보았다.

“왕야께서 대체 왜……?”

영구는 바보 같다는 말만 남기고 서둘러 묵용감의 뒤를 따랐다.

남겨진 가동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그리워하시는 것도 알아맞혔는데 뭐가 바보 같다는 거야?”

그가 입술을 쭉 내밀며 영구의 뒤를 쫓아갔다.

“너, 똑바로 얘기해! 내가 왜 바보 같다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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