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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80)화 (279/1,192)

제280화

넋을 놓고 있던 묵용감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시간이 더디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오늘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탓이리라.

새벽부터 동쪽 외곽의 제방을 살폈고 돌아와서는 백천범을 저택 밖으로 내보냈다. 점심에는 입궁하여 허무하게 병권을 넘겼다. 저택에 돌아오니 황보주아가 마침내 돌아온 목적을 밝혔고, 방금은 제 발로 자신의 침소를 찾아오기까지 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들로 그의 머리는 쉴 틈이 없었다. 분명한 일과 모호한 일이 혼재했지만,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되돌릴 방법도 없었다. 그는 그저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나도 그리워하지만, 만나기 두려운 그 사람을.

그 시각, 별장에 있는 백천범도 깨어 있었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모래시계를 줄곧 응시했다. 의자에 앉은 월규는 동전으로 장난을 치고 있었고, 월향은 졸린 눈을 억지로 뜨느라 우거지상이 되어 있었다. 월규가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승부가 가려지지도 않았는데 네가 자면 어떡해. 증인이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월향이 눈을 비비며 백천범에게 물었다.

“왕비 마마,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백천범이 발끝을 세우고 창밖을 힐끔 바라보더니 손짓했다.

“이제 됐어, 가자.”

세 사람은 조용히 문을 열고 몸을 낮춰 담장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한밤중에 살금살금 걸어가는 세 사람은 누가 봐도 수상쩍었다. 정원 대문에는 빗장이 채워져 있기에, 월향과 월규가 서로 밀고 당기며 최대한 조용히 빗장을 풀었다. 백천범이 문을 슬쩍 밀자 문에서 작게 끼익하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서둘러 손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기에 다시 문을 밀었다. 한 사람이 빠져나갈 정도로 문을 연 백천범이 좁다란 틈을 통과하고, 월규와 월향이 그 뒤를 따랐다.

주변은 온통 어둠이 드리웠지만 그나마 달빛이 밝았다. 달빛에 의지해 방향을 파악한 세 사람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나무를 향해 살금살금 걸어갔다. 의기양양해진 월규가 조용히 속삭였다.

“보세요, 아무도 없죠?”

그때, 별안간 두 사내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 이렇게 늦은 시각에 어디를 가시려는 겁니까?”

백천범이 걸음을 멈추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이 나타났으니 망정이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면 정말 체면을 구길 뻔했다.

그녀가 두 사람을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

“누군데 내 문 앞을 지키고 있느냐?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혼쭐을 내 주겠다!”

월규와 월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위협적인 말투는 대체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세 사람은 연약한 여인이고 상대는 건장한 사내들이다. 혹시라도 그들이 강도라면 어찌하려고?

두 사내는 백천범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며 공손히 말했다.

“왕비 마마, 그리 놀라시지 않아도 됩니다. 저희는 초왕야의 친위병입니다.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지켜 드리라며 저희를 보내셨습니다.”

“둘뿐이에요?”

그들 역시 양수리 마을에서 왕비의 용맹스러운 모습을 본 적 있었다. 그들은 왕비를 존중하는 언행을 유지하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왕비 마마께 아룁니다. 두 명이 더 있습니다. 묘시(오전 5시~7시)가 되면 저희와 교대를 할 예정입니다.”

백천범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월규에게 손을 내밀었다.

“봤지? 내가 이겼으니까 어서 줘.”

시원시원한 성격인 월규는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동전을 넘겼다.

“왕비 마마, 정말 매의 눈이십니다.”

* * *

이튿날, 우중충한 날씨에도 수원상의 기분은 상쾌하기만 했다. 저택에 들어온 후 이렇게 몸이 가뿐했던 날이 언제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초왕이 그녀의 정원에 꽃을 심어 주던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백천범이 저택을 나가다니! 마음이 더없이 후련했다. 아직도 그 사실이 꿈만 같아서, 그녀가 추문을 바라보았다.

“왕비가 정말 저택을 나갔느냐?”

“정말이고말고요. 마마께서도 직접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왕야께서 다시 데려올 일은 없어 보이더냐?”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요. 시골로 내쫓긴 사람이 돌아오는 일이 있었습니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추문의 얼굴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마마, 드디어 고생 끝입니다.”

그러나 수원상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백천범은 내쫓았지만 황보주아가 있지 않느냐. 둘 다 왕야가 끔찍이 아끼는 사람이지. 괜히 끼어들지 말고 눈치껏 굴어야 한다.”

추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마마, 황보주아는 법도를 어긴 죄신의 딸입니다. 왕야께서 그런 여인과 혼사를 치르시겠습니까? 그저 예전의 정으로 저택에서 지내게 해 주셨겠지요. 왕비가 떠났으니 이제 저택에서 가장 높은 분은 마마이십니다. 황보주아가 마마를 얕보지 않게 측왕비의 위엄을 보여 주셔야 합니다. 왕비 마마께서도 대학사 가문 출신이시니 몸을 낮추실 이유가 없습니다.”

수원상이 고개를 돌려 거울에 비친 모습을 점검하더니 오랫동안 단장을 했다.

“처소에만 머물렀더니 답답하구나. 나가서 바람 좀 쐬어야겠다.”

추문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며 다가왔다.

“마마, 참으로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녀는 수원상에게 도홍색 화전을 그려준 뒤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왕야께서도 마마를 오랫동안 보지 못하셨습니다. 가까이 있을 때보다 멀리 있을 때 더 잘 알아보는 법이지요. 연지를 조금 더 발라 드리겠습니다. 왕야께서도 좋아하시겠지요!”

수원상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누가 왕야를 보러 간다고 하였느냐? 멋대로 생각하지 말거라. 연지는 무슨 연지, 내가 그리 여우 같은 여인이더냐?”

추문이 멋쩍게 웃더니 입을 다물었다.

수원상은 그저 밖으로 나가 바람을 좀 쐬고 싶었다. 줄곧 처소에만 머무르지 않았던가. 백천범이 떠났으니 이제 자신은 처량한 측왕비가 아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저택을 거닐면 모두가 저택의 진정한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추문을 데리고 명호 주변을 천천히 거닐었다. 겨울이라 풍경이 그리 예쁘진 않았다. 호수 주변의 나무는 잎이 죄다 떨어져 가지만 휑하게 뻗고 있었다. 그 모습이 소리 없는 절규를 연상케 했다.

호수 한가운데 자리한 정자에 서 있던 그녀는 두르고 있던 피풍을 단단히 여미고 맞은편의 벽하각을 바라보았다. 고청접이 저택을 떠난 일을 떠올리니 탄식이 흘러나왔다.

사실 그녀와 고청접의 처지는 비슷했다. 둘 다 부귀한 가문에서 태어나 똑같은 교육을 받고 자랐다. 다만 고청접은 무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용감한 동시에 인내심이 부족했다. 그녀의 아버지인 대학사 수민은 일격에 치명상을 입힐 수 없다면 경거망동해선 안 된다고 가르쳤다.

묵용감은 모든 걸 통찰하는 사람이다. 그 점이 두려울 따름이었다. 그의 속내를 완전히 꿰뚫어 볼 수 없던 그녀는 수작을 부릴 생각조차 못 했다. 대신 그녀는 인내심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잘 참고 견디기만 하면 묵용감의 곁에서 오래 머무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그저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그녀는 그간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한참을 서 있으니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싸늘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호숫가를 향해 걸어갔다. 문득 고개를 드니 멀지 않은 곳에 빨간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 보였다. 다리 위에 서 있는 그녀는 꼭 수면에서 솟아오른 불덩이 같았다.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은 바람이 부는 대로 휘날리고 있었다. 여인의 표정은 쓸쓸했지만, 알 수 없는 도도함이 느껴졌다.

수원상은 황보주아를 처음 봤지만, 저 여인이 황보주아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먼저 황보주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단아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황보 아가씨였군요. 후원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황보주아도 자신에게 다가온 여인을 알아보았다. 측왕비와 마주하니 황보주아는 다소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묵용감에게는 여전히 대학사의 적녀인 아내가 있다. 애당초 백천범이 진짜 왕비가 아님을 황보주아도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측왕비, 수원상. 묵용감은 수원상에게 적왕비의 자리를 넘겨주려 했을 것이다. 결국 상황이 바뀌어 수원상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황보 가문은 몰락했지만 수가는 급부상하고 있다. 황조가 바뀔 때마다 누군가는 희생을 치르고, 누군가는 부귀영화를 누릴 기회를 잡는 일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황보주아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면 한없이 마음이 시렸다. 동시에 불공평한 이 세상이 증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대학사일 때, 수민은 고작 무영전武英殿(목활자로 인쇄된 총서가 간행되던 곳) 수서처修書處의 관리였다. 그는 당시 대황자였던 묵용한에게 알랑거리다가 총애를 얻었다. 대황자가 황위에 오르자, 그의 총애를 받은 수민은 대학사가 될 수 있었다.

황보주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수원상을 곁눈질했다. 그럴듯하게 꾸미긴 했지만 그녀 역시 묵용감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처지임을 알 수 있었다.

“왜요. 제가 후원에 오면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호의를 무시당한 수원상은 화가 나면서도 의아했다. 죄신의 딸에 불과한 여인이 아닌가? 한데 그녀의 태도는 공주라도 된 듯 거만하기 짝이 없다.

수원상은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했다.

“황보 아가씨가 남도 아니고, 어디를 가셔도 상관없지요. 다만…….”

그녀가 난처한 웃음과 함께 말꼬리를 흐렸다.

“특수한 신분이시니 다른 이들의 입에 쉽게 오르내리겠지요. 소문이 밖으로 퍼진다면, 좋을 일이 있겠습니까.”

수원상이 꺼낼 말을 짐작하고 있던 황보주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 일은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폐하께서도 제가 이곳에 있는 걸 이미 알고 계시는데, 다른 사람들이 떠드는 걸 겁낼 필요 없지요.”

수원상은 예상 밖의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 황보주아가 이곳에 있는 걸 알면서도 잡으러 오지 않다니! 초왕이 중간에서 손을 쓴 게 분명했다. 대체 무엇으로 황제를 움직였기에 역적이 살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버려 둔단 말인가? 황보주아가 사무친 원한을 갚을까 걱정이 되지도 않는 걸까?

수원상의 반응에 황보주아는 더욱더 기세등등한 표정을 보였다. 어젯밤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긴 했어도, 돌이켜보니 묵용감에게 그녀는 여전한 황보주아다. 그는 그녀를 너무나 아끼기에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다소 마음이 놓였다.

사실 어제 일은 조급하게 생각한 그녀 탓이었다. 기회를 빌미로 그를 설득할 생각이었지만, 괜히 자신의 발등만 찍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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